백도형의 '술어화불가능성'에 대한 비판논증

제가 지금 속해있는 세미나 모임에서 나온 제 발표에 대한 피드백을 반영하여 쓴 글입니다.


세미나에서 백도형의 4차원 개별자론에서 '술어화불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 논증을 제시했다.

(1) 4차원 개별자론에 따르면 4차원 개별자는 술어화불가능하다.
(2) 4차원 개별자론에 따르면 4차원 개별자는 역사적이다.
(3) '역사적'이라는 말은 술어이다.
(4) (1)-(4)에 의해 4차원 개별자론은 모순적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이 공통적인 반론을 제시한다.

  • 술어화불가능성은 속성의 차원에서 개별자에 본질적으로 적용되는 속성으로서의 술어가 없다는 것이지, 언어의 차원에서 술어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위 반론은 백도형에 대한 정확한 비판이 아니다.

확실히 이 지적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4차원 개별자론이 유명론적 특성과 실재론적 특성을 모두 유지하려는 시도로 인해 모순적인 양태를 지니게 됐다는 점을 부각하려도 다소 무리한 논증을 펼쳤다. 보다 내 취지에 부합하면서도 무리가 없는 비판 논변은 다음과 같이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1) 4차원 개별자는 실재론이고, 4차원 개별자는 실재로서의 개별자이다.
(2) 실재론이 참이라면 실재는 그에 대응되는 진술에 대한 참/거짓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3) 실재에 대한 참 혹은 거짓인 진술은 언어적이다.
(4) 4차원 개별자는 술어화불가능한 것으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설명력을 지니지 못한다.
(5) 4차원 개별자는 그에 대응하는 진술에 대한 참/거짓을 판별하는 기준일 수 없다.
(6) (1)-(5)는 모두 동시에 참일 수 없으므로 4차원 개별자론은 모순적이다.

4차원 개별자가 술어화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언어의 차원에서는 그 특성을 서술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 논증은 해결이 안된다. 한 개별자에 대한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 결정하는 기준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도 언어적 차원에서 수행되는 것이라고 하면 4차원 개별자라는 개념은 존재론적 잉여에 불과하다. 굳이 실재의 차원을 가정하지 않아도 한 진술에 대한 모든 종류의 진술, 심지어 참/거짓 판단까지도 전부 언어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면, 실재는 굳이 상정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반면 이런 비판을 피하기 위해 4차원 개별자가 그에 대한 언어적 진술의 참/거짓을 판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백도형의 4차원 개별자론에 따르면 개별자 간에는 실질적인 인과성이 성립하지 않고, 오직 언어의 차원에서만 개별자들이 인과성을 가진다고 설명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백도형은 실제 개별자들이 가지지 않는 작용이나 특성도 언어적 서술의 차원에서는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서술돼어도 괜찮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더더욱 4차원 개별자는 그에 대한 진술의 진위여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물론, 실재론이 반드시 실재가 그 실재에 대한 진술의 진위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내 주장이 틀렸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실재론이라면 어떠한 변형을 거쳤든 간에 '참'은 실재와 분리될 수 없다. 마음이 세계(실재)를 거울처럼 비춰야 한다는 표상주의부터, 실재 세계를 가장 성공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과학 이론이기에 과학이 실재의 설명에 대한 특권적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과학주의까지, 실재론자들 중 실재와 참/거짓을 분리시켜서 설명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백도형의 4차원 개별자론을 실재론이 실재론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는 비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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