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자 요한네스에 대한 단상: 쇠얀 키르케고어, 「유혹자의 일기」

그의 생활은 시적(詩的)으로 살려는 과업을 실현시켜 보자는 시도, 그것이었던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흥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날카롭게 발달된 천품이 부여되어 있던 그인지라, 그는 흥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발견한 후에는 늘 그 체험을 시적(詩的)으로 다시 표현하곤 했다.(키에르케고어, 2008: 539)

유혹자 요한네스가 지닌 삶의 태도가 ‘시적’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요한네스는 자신이 흥미를 느낀 대상을 시적으로 음미하려는 취향을 지닌 인간이다. 여기서 ‘시적’이라는 용어는 다소 부정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심미적’ 실존의 극단을 대변하는 인물이 ‘시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되고, 시적 태도는 결국 이후에 일종의 ‘병적’ 징후로서 설명되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이 일기가 이다지도 문학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그의 시인적인 소질이 그리 풍부하지 못하였다고나 할까, 혹은 또 그리 빈약하지 않았다고나 할까, 요컨대 시와 현실을 따로따로 구별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는 시인적인 소질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로써 설명이 된다. 이 월등한 천품이야말로 그가 현실의 시적인 상상을 향락하는 시적인 것의 정체였고, 그는 이 월등한 천품을 다시 문학적인 반성의 형식 속에서 이끌어냈던 것이다.(키에르케고어, 2008: 540)

요한네스에게는 모든 것이 시적 향락의 대상이다. 그는 현실 전체를 시적으로 음미하고자 한다. 요한네스의 일기가 ‘문학적’ 색채를 지니고 있는 것은 요한네스의 현실 자체가 ‘시적’ 색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요한네스에게 시인적인 소질이 그리 풍부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요한네스의 일기가 얼핏 아무리 문학적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요한네스는 단지 자신이 겪은 현실을 아무런 문학적 창작도 없이 자신에게 경험되는 대로 기록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2) 우리는 요한네스에게 시인적인 소질이 그리 빈약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요한네스의 일기에 아무런 문학적 창작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요한네스는 자신의 인생 자체를 시적으로 음미하는 작업에서만큼은 대단한 시인적 소질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적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시적인 것을 향락한다는 것과는 또 다른 제2의 향락으로써, 요컨대 그의 인생 전체는 이 향락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던 것이다. 처음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의 심미적인 것을 인격적으로 향락하였고 제2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의 심미적 인격을 향락한 것이다.(키에르케고어, 2008: 541)

‘문학적’과 ‘시적’이라는 표현이 구분되고 있다. 현실을 직접 향락하는 태도는 ‘시적’이고, 현실을 향락하는 자신을 향락하는 태도는 ‘문학적’이다. 즉, 요한네스는 현실 자체를 일종의 시처럼 향락한다는 점에서 1차적으로 시적 향락을 즐기는 인간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향락을 즐기는 자기 자신을 다시 고찰한다는 점에서 2차적으로 문학적 향락을 즐기는 인간이다. 따라서 요한네스의 향락이 낳은 1차적 열매는 현실에서 그가 만나게 된 흥미로운 것들에 대한 직접적 반응으로서의 ‘정서’이고, 2차적 열매는 그가 느끼게 된 정서에 대한 반성적 고찰로서의 ‘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배후에는 까마득한 저 멀리에 제2의 세계가 있다. 그런데 이 제2의 세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는, 마치 가끔 우리가 극장에서 보는 실제의 장면 배후에 제2의 장면이 나타나는 그때의 두 장면의 관계와 비슷하다. 얇은 베일을 통하여 보이는, 이른바 베일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보다 훨씬 가볍고 훨씬 우아하여 현실세계와는 질적(質的)으로 다른 세계이다. 육체적으로는 현실세계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허다한 사람들이 현실세계에서는 안주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다른 세계를 동경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이렇게 점점 자신을 감소시켜, 현실에서 모습을 말살해갈 수 있다는 것은, 병의 징후이기도 하다.(키에르케고어, 2008: 541)

요한네스의 모습은 일종의 ‘병의 징후’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된다. 현실을 시적으로 음미하고 싶어 하는 태도는 현실보다 ‘훨씬 가볍고 훨씬 우아하여 현실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를 지향하고 싶어 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모습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으로서 결코 건전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흥미롭게도, 요한네스를 ‘병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화자는 심미적 실존의 또 다른 대변자인 A이고, (이 책의 편집인으로 상정된 가상 인물인) 빅토르 예레미타는 A가 사실 요한네스 본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심미적 실존의 모습을 병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인물은 역설적이게도 심미적 실존 자신인 것이다.

이 사실이, 병의 징후라고 하는 후자의 경우가, 곧 내가 그의 실태(實態)를 모르면서 이제까지 알아왔던 이 사내의 경우다. 그는 현실 속에 있지는 않았지만 현실과 다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항상 현실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그가 거의 완전히 현실에다 자신을 내맡기고 있던 때라도, 그는 초연하게 현실밖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앞으로 몰아내는 것이 선(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확한 의미에서 악도 아니었다…….(키에르케고어, 2008: 542)

요한네스는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살아가지는 못한다. 그는 모든 것을 시적으로 향락해야 만족하는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흥미를 느끼지 않는 대상에는 결코 머무를 수 없고, 흥미를 느끼는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며, 흥미를 느낀 대상 앞에서도 시적 향락을 느끼기 위해 반성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선’하다고 하기는 힘들다고 해도 반드시 ‘악’하다고 평가할 수도 없다. 다만, 우리는 요한네스가 무엇인가에 몰려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에 관해서 악(惡) 운운하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다. 그는 일종의 발노성 정신병(發怒性 精神病, exacerbatio cerebri)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병에 걸리면 현실은 충분한 자극을 주는 것이 못 되고 단지 고작해야 일시적인 자극제가 되는 존재에 불과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현실이 주는 중압(重壓) 밑에서 파산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현실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나약했던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너무나도 강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 강인성이야말로 실은 하나의 병이었던 것이다. 현실이 자극제로서의 의의(意義)를 상실한 순간, 그는 무장해제를 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 그의 속에 깃든 악(惡)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극을 받고 있던 순간에도 이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고, 또 이 의식 속에 악이 도사리고 있었다.(키에르케고어, 2008: 543)

요한네스가 겪는 정신병은 역설적이게도 요한네스가 엄청나게 강인한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는 도저히 현실에 만족할 수 없어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자극을 주는 대상을 찾아다녀야 한다.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한 상태에서 향락의 대상을 매 순간 발견해야 하는 삶이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지치는 삶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요한네스는 너무나 강인한 인간이라 현실 전체를 최대한 시적으로 향락하고자 하는 모험을 결코 쉬고자 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강인성이야 말로 요한네스를 끊임없이 현실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병’이라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강인성이야 말로 요한네스가 자신이 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미적 실존을 극단까지 몰아가고자 하는 시도를 끝까지 버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악’이라는 사실이다.

타고난 정신적인 재능의 도움을 받아 그는 처녀를 유혹하는 온갖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고, 또 그것으로써 처녀를 자기에게로 이끌었다. 그러나 물론 그 이상으로 처녀를 자기의 소유로 삼지는 않았다. 그가 어떻게 하면 처녀를 최고로 흥분시킬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또 그럼으로써 처녀가 온갖 것을 그에게 바칠 용의를 찾을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상상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건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면, 그는 돌연 한 걸음도 더 나가지 않고 약속이나 맹세는 물론이거니와 한 마디 사랑의 속삭임도 남기지 않고 그 관계를 딱 잘라버리는 것이었다.(키에르케고어, 2008: 543-544)

요한네스가 처녀를 유혹하는 방식에서도 그가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요한네스는 한 명의 처녀에게서 최대한의 시적 향락을 뽑아내고자 한다. 그는 처녀를 구워삶아 하룻밤의 육체적 쾌락을 즐긴 뒤에 버려버리는 일반적인 유혹자들과는 수준이 다르다. 한 명의 처녀를 정신적으로 완전히 조종하여 그녀에게서 최대한의 사랑을 끄집어내는 것이 요한네스의 목표이다. 처녀가 요한네스 자신을 위해 몸이든지 마음이든지 모든 것을 정열적으로 바치도록 만들어서 그녀의 모습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절정을 확인하는 것이 유혹의 완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결코 한 명의 처녀에게서 만족할 수가 없다. 목표가 달성되고 유혹이 완성되면, 요한네스는 또 다른 처녀를 찾아내어 그녀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당연히, 새로운 처녀 역시 다시 버려지고 또 다른 처녀가 발견되어야 한다. 따라서 ‘약속’이나 ‘맹세’나 ‘사랑의 속삭임’ 같은 것으로 관계가 고착화되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처녀들을 정신적으로 완전히 장악하면서 사랑을 최대한 심미적으로 계속 음미하는 일이다.

[……] 처녀는 번갈아 금방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상대방을 용서하는가 하면, 이번에는 그를 비난하게 된다. 그러고는 도대체가 그들의 관계라는 것이 본래의 의미에서는 아무런 현실성도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처녀는 항상 사건 전체가 한낱 자기의 공상에 불과하였던 것이나 아닐까 하는 의심과 싸워야만 한다. 처녀는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애당초 하소연할 무엇인가가 없었으니까. 꿈을 꾸었다면 남에게 이야기라도 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 처녀가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꿈이 아니고 현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만약 처녀가 그것을 말로 토해서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풀어놓으려고 할 때에는, 거기에는 모든 것이 무(無)로 화해 버리고, 이야기할 거리가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이다. 느낌이라는 것으로 따져보면 그녀는 그것을 매우 날카롭게 느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녀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것을 포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그녀를 무서운 중압으로 억누르는 것이었다.(키에르케고어, 2008: 544-545)

요한네스는 처녀들과 맺은 관계를 결코 구체적인 형태로 고정시키지 않는다. 그는 어떠한 종류의 약속도 맹세도 하지 않고서 자신을 항상 애매한 존재로 남겨둔다. 그의 유혹은 언제나 처녀 편에서 요한네스 자신에 대한 상상을 전개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유혹의 끝에는 모든 것이 요한네스에 대한 처녀의 오해였고, 꿈이었고, 허상이었던 것으로 귀결된다. 처녀 혼자 요한네스를 상상하고, 처녀 혼자 요한네스에게 사랑에 빠지고, 처녀 혼자 요한네스를 버린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어디에도 요한네스 본인의 정체성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처녀는 자신이 유혹에 빠져서 요한네스에게 모든 사랑을 쏟았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을 할 수가 없다. 심지어 요한네스를 뚜렷한 형태로 비난할 수조차 없다. 처녀 자신조차도 도대체 요한네스가 자신을 유혹한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어서, 요한네스를 비난했다가, 용서했다가, 자신을 비난했다가, 자신을 변호했다가 하는 오락가락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들의 겉모양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어느 때나 마찬가지의 관계를 유지하였고, 또 예전과 똑같은 존경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변한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들에게도 거의 설명할 수가 없는 만큼, 남에게는 더욱 납득이 될 리가 만무하다. 그들의 인생은 항상 있는 세상의 유혹된 처녀들처럼 꺾여버렸거나 분해되지는 않았지만, 자기 자신 속에 갇혀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자기 자신들을 찾아보려고 헛되이 애를 쓰고 있었다.(키에르케고어, 2008: 545)

요한네스의 유혹에 빠진 처녀는 겉보기에 이전과 달라진 점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처녀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요한네스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처녀 혼자 요한네스를 열렬하게 사랑했다가 요한네스를 버려버린 것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처녀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한 번도 사랑을 몰랐던 사람에서, 엄청난 사랑의 열정을 지닌 사람이 되었다가, 이제 그 열정을 한 순간에 배신당한 고통을 혼자서만 감내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생애를 통하여 그가 걸어온 길은 단 하나의 발자취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바로 그런 방법으로(왜냐하면 그의 발은 아무런 발자취도 남기지 않게끔 되어먹은 발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생각해야만 하는 그의 무한한 자기반성을 가장 잘 상상할 수가 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는 어떤 희생자도 나타나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는 보통으로 이해되는 유혹자이기에는 너무나도 정신적으로 생활하였다. 물론 그도 때로는 Parastatic body(눈에 보이는 육체)에도 따랐고, 또 아주 관능적으로 되는 수도 있었다. 그런데 코데리아와의 사건은 하도 얽히고설켜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야말로 유혹을 당한 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지경이었고, 또 실상 그 불행한 처녀 자신도 그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그의 발자취는 분명치 않았기 때문에 어떤 증명도 불가능하다.(키에르케고어, 2008: 545-546)

요한네스는 유혹의 과정에서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그에게는 ‘정체성’이라고 할 만한 뚜렷한 무엇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처녀들과 맺은 관계는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하는지에 따라 너무나 다양하게 이야기될 수 있다. 심지어 그가 처녀를 유혹하기는커녕 처녀가 그를 유혹해서 버렸다고도 얼마든지 말해질 수 있다. ‘요한네스’라는 사람은 해석에 열려 있다. 아무런 약속이나 맹세를 남기지 않은 사람은 아무런 의무에도 속박되지 않는다. 요한네스가 아무런 정체성도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이 요한네스가 처녀를 유혹하였다는 사실을 명확한 형태로 비난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간주할까 하는 것이 궁금하다. 나는 극가 남을 당황하게 만들었듯이 그도 결국은 당황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가 남들을 유혹하여 그르쳤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면적인 면에서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적인 성격을 그르쳤던 것이다. 우리가 길을 잃은 나그네를 잘못된 길로 인도해 놓고, 그릇되게 인도한 거기에 방치해 버린다면 확실히 그것은 가증스러운 짓이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들어 버리는 것에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길은 잃은 나그네라면 그래도 끊임없이 바뀌는 주위의 새로운 광경을 본다는 위로가 있고, 또 변화가 있을 때마다 빠져나갈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자기 자신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그렇게까지 둘레가 크지 못하다. 그는 곧 자기가 빠져나갈 수 없는 쳇바퀴 속에서 뱅뱅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양심이 눈뜨고 이제야 말로 이 미로(迷路)에서 빠져나가야만 한다고 절실히 느낄 그때에 미로에서 탈출하기 위한 연줄을 잃고, 예민한 온갖 지능을 총동원하여 자기 자신과 대결하고 있는 모사(謀士)가 겪는 고민 이상으로 고통스런 상황을 나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다.(키에르케고어, 2008: 546-547)

요한네스 같은 심미적 실존의 극단은 결국 자신이 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병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만다. 그는 처녀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과정에서 매 순간 자기 자신을 당황스럽게 만들 수밖에 없다. 가장 완전하게 향락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이 결코 현실에 고정된 형태의 정체성을 지닌 상태로 남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심미적 실존은 단지 끊임없이 자극을 향해 움직이는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더 강인하게 심미적 실존을 지향할수록 우리는 더 빠르게 현실로부터 멀어진다. 마지막에는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향락의 쳇바퀴를 끊임없이 맴도는 운동만 남는다. 여기서 ‘향락’이 돈 주앙이 지향한 것과 같은 육체적 향락인지 요한네스가 지향한 것과 같은 시적 향락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새로운 자극을 향한 멈추지 않는 운동이 우리를 지치게 만들기만 한다는 사실, 그런데도 우리가 너무나 강인한 나머지 역설적이게도 피곤한 향락의 운동을 계속 수행하면서 끊임없이 지쳐간다는 사실, 그 과정에서 ‘나’라고 할 수 있는 정체성은 현실로부터 점점 더 희미해진다는 사실, 결국 이러한 악순환의 연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참고

키르케고르, 쇠얀., 「유혹자의 일기」, 『이것이냐/저것이냐』, 제1부,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08, 535-8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