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로버트 브랜덤의 『명시적으로 만들기』: 우리는 누구인가?(3)

1. 우리가 누구인지 경계 정하기

흥미롭게도, 『명시적으로 만들기』는 우리(we)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의로부터 화용론과 의미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인지 말하는 것, 곧 우리를 다른 사물과 생물로부터 구분하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과제이다. ‘우리’에 대한 논의와 ‘언어적 실천’에 대한 논의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언어적 실천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로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2.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하고자 하는 작업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혹은 ‘우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보다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우리’라는 존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특정한 대상은 어느 순간 우리라고 인정되기도 하고, 더 이상 우리라고 인정되지 않기도 한다. 따라서 탐구의 초점은 우리가 대상을 우리라고 인정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맞추어져야 한다. 우리를 규정하는 기준을 미리 고정시킨 상태에서 ‘우리’를 자의적으로 정의하려 하기보다는, 무엇인가가 우리라고 여겨지도록 만드는 실천을 기술하고자 해야 하는 것이다.

3. 우리가 누구인지를 명시적으로 만들기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이론적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탐구의 목표이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라는 표현은 ‘실천 속에서 다른 존재를 우리 중 하나로 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라는 표현으로 다시 설명될 수 있다. ‘이론적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표현 역시 ‘명시적으로 만들기’라는 표현으로 다시 설명될 수 있다. 즉,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이론적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란 ‘실천 속에서 다른 존재를 우리 중 하나로 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시적으로 만들기’이다.

4. 의미, 이해, 개념, 합리성

브랜덤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전통적 대답 중 하나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언어철학을 끌어들인다. 그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철학이 우리를 ‘합리적 존재(rational being)’로 바라보았다 사실에 주목한다. 즉, 우리는 이유에 묶여 있는 존재이다. 우리는 이유를 찾는 존재이고, 이유 중에서도 더 나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존재이고, 정당한 이유가 주어질 경우 그 이유에 굴복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이유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의미하고(mean), 우리에게 개념적 내용(conceptual content)을 지니고, 우리는 그 내용을 이해한다(understand).

5. 이유의 공간

합리적 존재는 이유의 공간(space of reasons)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이유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란 이유가 지닌 권위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이다. 이유가 지닌 권위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란 이유를 통해 구성된 질서를 규범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는 자신의 태도와 수행에 대해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유의 공간’이란 바로 합리적 존재가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활동 속에서 참여하고 있는 질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용어이다.

6. 믿음과 행위

이유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모든 인식과 행위는 이유의 지배를 받는다. 가령,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라는 믿음(belief)을 갖고 있다.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은 삶을 변화시킨다.” 같은 다른 이유에 근거하여 도출되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같은 다른 믿음을 위한 이유로서 다시 사용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약자를 돕는 행위(action)를 하도록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이유에 근거하여 도출되고, “저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같은 다른 믿음을 위한 이유로서 다시 사용된다.

7. 이해와 추론

인식과 행위의 주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인식과 행위가 이유의 공간 속에서 맺고 있는 추론적 관계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유는 독립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그 이유를 정당화하는 이유와 그 이유가 정당화하는 이유를 한꺼번에 파악해야 한다. 이유는 꾸러미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따라서 이유의 공간 속에서 성립하는 인식과 행위를 이해하는 일이란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추론의 속성을 숙달하는 일이다.

8. 지각적 존재와 지성적 존재

이유의 공간 속에서 인식하며 행위하는 주체는 ‘지성적 존재(sapience)’라고 일컬어진다. 이러한 존재는 ‘지각적 존재(sentience)’와 구별된다. 즉, 지각적 존재는 단순히 깨어 있는 의식을 바탕으로 대상을 자각하는 동물적 존재이다. 그러나 지성적 존재는 이유로 맺어져 있는 추론적 관계를 바탕으로 자신의 인식과 행동을 이해하는 합리적 존재이다. 믿음이나 욕망 같은 지향적 상태(intentional state)는 우선적으로 지성적 존재에게 귀속되는 상태이다.

9. 추론과 진리

지성적 존재를 추론(inference)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진리(truth)의 관점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 추론과 진리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맺고 있는 개념이다. 추론적 관계를 바탕으로 성립하는 지향적 상태에는 언제나 그 상태를 참으로 만들어주는 진리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가령,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라는 믿음은 일종의 지향적 상태이다. 이러한 믿음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게 정말 진리냐?”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물음에 대해 정당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과 믿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의 인식과 행위가 놓인 추론적 관계를 이해하고 있는 지성적 존재란 자신의 인식과 행위를 위한 진리 조건을 이해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10. 명제

추론과 참은 명제적 형식(propositional form)을 지닌다. 여기서 ‘명제적 형식’이란 평서문으로 표현되고, ‘that’ 절이 귀속되는 형식이다. 가령, “나는 ……라고 믿는다(I believe that ……).”라는 문장은 주어+동사의 평서문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that’ 절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명제적 형식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1. 토의적 개념과 표상적 개념

토의적(discursive) 관점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은 표상적(representational) 관점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과 대비된다. 즉, 우리를 ‘이유의 생산자와 담지자(makers and takers of reasons)’ 혹은 ‘진리의 탐구자와 발화자(seekers and speakers of truth)’로 보는 입장은 ‘토의적’ 관점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입장은 우리가 언제나 이미 이유의 공간 속에서 특정한 추론적 관계를 전제한 상태로 세계를 파악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를 ‘표상의 생산자와 소비자(producers and consumers of representings)’로 보는 입장은 소위 ‘표상적’ 관점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입장은 우리가 바깥의 사물을 아무런 전제 없이 있는 그대로 우리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는 추론적 관계를 바탕으로 표상적 질서를 설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에 관하여(of)’, ‘……에 대하여(about)’, ‘……을 향한(directed at)’ 같은 얼핏 표상적 질서 속에서 잘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어휘조차 실제로는 추론적 관계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는 사실이 강조될 것이다.

12. 언어적 실천을 위한 충분조건 제공

토의적 관점에서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의가 언어적 실천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로 귀결된다. 우리는 ‘지향적 존재’이고, 지향적 존재는 추론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인식과 행동을 이해하는 ‘지성적 존재’이며, 지성적 존재는 소위 ‘이유의 공간’이라는 언어적 실천에 참여하여 자신의 태도와 수행에 대해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한 사회적 실천이 언어적 실천으로 여겨지기 위한 충분조건을 제시하는 작업이란 지성적 존재로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정의되기 위한 충분조건을 제시하는 작업과 동일하다.

13. 결론

따라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 책의 첫 번째 물음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여 마지막 결론까지 이어진다. 즉, 이 책이 탐구한 내용은 “언어, 마음, 논리에 대한 표현적 설명”이다. 이러한 설명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유의 공간 속에서 자신의 인식과 행위를 이해하고 있는 지성적 존재(sapient)로 밝혀진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합리적, 표현적, 담론적 존재이자 논리적, 자기 표현적 존재이다. “우리는 대상을 명시적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명시적으로 만든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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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pience'와 'sentience'라는 단어 사용에 주의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이재춘 선생님이 자신의 박사 논문에서 'sapience'를 '지적 존재'로, 'sentience'를 '감지력'으로 번역하신 것을 참고하였지만, 사실 두 단어는 '지성적 능력' 혹은 '지각적 능력'으로 번역되는 편이 훨씬 더 본래 의미를 잘 나타내기에 좋을 것이다. 오히려 '지성적 존재'라는 표현은 'sapient'나 'sapient being'이라는 단어의 번역으로 더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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