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영원회귀'에 대해 정확히 설명한 적 있나요?

니체가 영원회귀에 대해서 영원회귀 현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철학적 가정에 불과한 건지

정확히 설명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관련 자료 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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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저로서는 영원회귀가 사건들이 실재로 영원히 회귀한다는 형이상학적 논제가 아니라 "이 사건이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이것을 선택하겠다"라는 모종의 '실존적인 결단'을 위한 장치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문헌적인 근거는 없지만 옛날 백승영 선생님의 니체 강의에서 배웠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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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윗분과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영원회귀라는 것을 니체가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주장했다고 해석하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제가 알고 있는 니체는 그런 것을 주장할 철학자가 아니거든요. 저는 영원회귀라는 것을 초인의 조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원회귀의 삶 마저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 초인이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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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회귀와 관련하여 제일 유명한 구절 중 하나가 『즐거운 학문』에 나오죠. 다음 구절입니다.

최대의 중량. ― 어느 날 낮, 혹은 어느 날 밤에 악령이 너의 가장 / 깊은 고독 속으로 살며시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같은 차례와 순서로 ― 나무들 사이의 이 거미와 달빛, 그리고 이 순간과 바로 나 자신도. 현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가 거듭해서 뒤집혀 세워지고 ― 티끌 중의 티끌인 너도 모래시계와 더불어 그렇게 될 것이다!” ― 그대는 땅에 몸을 내던지며, 그렇게 말하는 악령에게 이렇게 대답하는 엄청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 “너는 신이로다. 나는 이보다 더 신성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노라!” 그러한 생각이 그대를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지금의 그대를 변화시킬 것이며, 아마도 분쇄시킬 것이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은 모든 경우에 최대의 중량으로 그대의 행위 위에 얹힐 것이다!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대 자신과 그대의 삶을 만들어나가야만 하는가?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영원회귀'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는 일종의 사고실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하였을 때,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가, 삶을 긍정하는지 긍정하지 않는지를 판단하는 척도라는 거죠. 그래서 영원회귀 현상이 (힌두교나 불교의 윤회처럼)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니체나 니체 철학 연구자들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니체가 자신의 철학적 주장이 당대의 우주론과 무관하다고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니체는 자기 시대의 과학적 지식들을 이용해서 '힘에의 의지'나 '영원회귀'를 정당화하려고 한 면모도 분명 지니고 있죠. 니체는 그 당시 동역학의 기계론과 인과론을 비판하고, 열역학 법칙을 비판하기도 하거든요. 우주가 열역학적 평형 상태에서 열사망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생각에도 반대하고요. 그러면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힘이고, 사물은 그 힘의 발현이라는 자신의 주장이 과학적으로도 참되다고 이야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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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로 계속해서 니체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영원회귀라는 개념 자체가 니체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만큼 설명하자면 끝도 없으니, 질문자님의 질문에 한정하여 짧게 답변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니체에게 영원회귀는 단선적 시간관/근대적 시간관(처음-끝이 존재하는 시간개념)과 반대되는 어떠한 '현상'을 지칭하지는 않습니다. 'TheNewHegel'님이 언급하셨듯이, 백선생님이 설명하시는 방법인 어떠한 장치/조건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제일 수월합니다. 물론 이게 명징하게 옳은 해석이라고 확정할 순 없습니다. 많은 문헌에서 'tae-hyung'님의 말씀처럼, 위버멘쉬와 어린아이와 관련한 비유에서 동시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영원회귀가 위버멘쉬의 '조건'이라거나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이것을 선택하겠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꽤나 무리가 있지만, 최대한 알기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전공자들의 수사적 표현입니다.
또한 'youn'님이 언급하셨듯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철학적 가정인지는, 적어도 니체 전공자들에게는 관심있는 연구주제는 아닌듯 싶습니다. 그리고 아마 니체에게도 그럴듯합니다.

지금까지 이것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만해왔지 긍정적 의미에서 의미규정은 가르쳐드리지 못했는데, 무지한 제가 알려드리는 것보단 직접 보시는게 더 도움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생각에 시적/수사적 표현이 많이 빠진 구절은 KSA12 213쪽 이하, KGW V-2 11[59] 혹은 VII-2 27[71] 등등을 살펴보십시오. 특히 '차라투스트라'이후에 출간된 저작들에서 많이 발견됩니다.(특히 우상의 황혼에서 잘, 그리고 많이 발견됩니다.) 영원회귀를 반헤겔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주석 작업은 '들뢰즈',' 클로소프스키',장그라니에' 등등 대가들이 수행했습니다. 간략하게 읽기에는 MIT PRESS에서 나온 'THE NEW NIETZSCHE'라는 논문집이 좋습니다. 한글판으로 읽고 싶으시다면 최근에 니체학회에서 번역한 슈텍마이어(세계적 니체 권위자입니다.)의 '니체입문'을 읽어보십시오. 정석적인 해석입니다. 하이데거를 비롯한 근현대 독일철학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하이데거의 니체를 읽는것을 권합니다.(하버마스의 해석은 좋지않은듯합니다.) 또한, 아주 최근에 니체 전공자신 이상엽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니체와 소피스트:우리에게 필요한 논리'를 읽었는데 이 책 전체에 걸쳐 영원회귀에 관한 연구가 수준있게 진행되어 있습니다. 책이 아주 짧으니 필요하시면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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