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엄밀한 현상학으로서의 문학비평을 향하여: 박이문, 「현상학으로서의 문학비평」

박이문의 「현상학으로서의 문학비평」은 문학비평이 일종의 현상학적 기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은 사회학, 심리학, 정신분석 등을 통해 작품을 외재적 관점으로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에 반대하여 작가가 체험한 세계를 내재적 관점으로부터 ‘해명’하고자 하는 시도야 말로 참다운 문학비평이라고 지적한다. 문학비평이 근본적으로 현상학과 다르지 않다는 입장을 지지하는 나에게는 이 논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매우 흥미로웠다. 다만, 현상학적 기술에 대한 이해, 작가의 중요성을 바라보는 관점, 언어 이전의 체험에 대한 생각에서 내 입장은 박이문의 입장과 약간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문학비평에 대한 박이문의 입장을 소개할 것이다(Ⅰ). 다음으로, 현상학적 기술, 작가의 중요성, 언어 이전의 체험에 대한 박이문의 해설을 비판할 것이다(Ⅱ).

Ⅰ. 현상학으로서의 문학비평

박이문은 ‘설명(explanation)’과 ‘해명(elucidation)’이라는 두 가지 이해의 방식을 제시한다. 이러한 구분은 대상을 외재적 관점을 상정한 상태에서 이해하고자 하는지 내재적 관점만으로 이해하고자 하는지에 근거하고 있다. 즉, (1) 설명은 주어진 현상을 더욱 일반적, 근본적, 고차원적 층위로 환원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가령,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만유인력’이라는 현상 뒤편의 법칙을 상정하는 작업이 ‘설명’이다. 그러나 (2) 해명은 주어진 현상을 그 자체만으로 더 밝게, 명료하게, 뚜렷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가령,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단순히 멍하게 바라보는 태도에서 벗어나 떨어지는 사과의 색깔, 그 사과가 땅에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 그 소리를 들고서 느낀 놀란 감정 등에 주목하는 작업이 ‘해명’이다.

전통적 문학비평은 작품을 ‘설명’하는 작업에 초점을 맞추었다. 즉, 다양한 사회학적, 심리학적, 정신분석학적, 철학사상사적 이론을 끌어들여 작품이 어떠한 점에서 해당 이론에서 제시되고 있는 내용에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는지를 논증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문학작품은 인간 삶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다루어졌고 문학작품을 설명하는 이론을 현상보다 더 근본적 층위의 ‘법칙’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다루어졌다. 작품을 비평하는 작업이란 미리 전제된 사회학적, 심리학적, 정신분석학적, 철학사상사적 이론이 참이라는 사실을 작품을 통해 증명해내는 작업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미리 전제된 이론에 근거하여 작품을 비평하려는 시도는 작품을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는 한계를 지닌다. 전통적 문학비평에서 작품이란 단지 미리 전제된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자, 예증이자, 비유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학비평은 ‘작품’이 아니라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되는 ‘이론’을, ‘현상’이 아니라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전제되는 ‘법칙’을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실제로 비판과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이론이다. ‘문학비평’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문학작품에 대한 이야기보다도 사회학적, 심리학적, 정신분석학적, 철학사상사적 이론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만다. 박이문은 전통적 문학비평이 정작 ‘문학비평’이라는 이름과 달리 작품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비판한다.

대체로 전통적인 문학비평은 타율적 이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 이른바 사회학적·심리학적 정신분석학적 또는 사상사적 문학비평이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적절한 예들이다. 문학작품잉 위와 같은 입장에서 관찰되고 이해될 수 있음은 물론이요, 그것은 그것으로서 충분히 흥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문학작품을 다룬다는 것은 결코 엄밀한 의미에서 독자적인 분야로서의 문학비평이 아니라 문학비평이라는 명목 아래 사회학·심리학·정신분석학 또는 철학사상사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더 명확히 말하자면 문학은 다른 과학들의 자료가 되는 것이며, 문학비평은 과학이론의 재미스러운 예증학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위와 같은 방법의 문학비평은 참다운 문학비평일 수 없고, 위와 같은 각도에서 볼 때 문학은 문학예술로서의 자율적인 의미를 잃게 된다. 바꾸어 말해서 문학작품이 문학작품으로서 이해되지 못하는 것이다.(박이문: 2017: 344)

전통적 문학비평을 극복하기 위해 1920년대에 미국에서 등장한 뉴크리티시즘과 1950년대에 프랑스에서 등장한 구조주의 역시 결국 작품을 ‘설명’하려는 태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뉴크리티시즘과 구조주의는 작품을 자율적 대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작품을 현대 기호학이 제시하는 언어적 구조로 환원하고 만다. 두 입장이 강조하고자 한 작품의 ‘자율성’이란 기호학적 체계의 자율성이다. 이러한 비평은 작품이 말하고 있는 의미나 내용을 삭제해버린 상태에서 작품을 이루고 있는 언어적 구조에만 집중하는 형식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작품을 작품으로 다루고자 하는 태도는 뉴크리티시즘과 구조주의에서도 제대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작품을 외재적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전통적 문학비평에 반대하여 작품을 내재적 관점으로부터 ‘해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현상학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체험’ 혹은 ‘세계’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 현상학이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즉, 시나 소설은 애초에 추상적 이론을 논증하고자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사물, 인물, 감동, 사건 등을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잊고 지내고,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나쳐버리고, 자주 놓쳐버리는 체험을, 우리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체험으로서 다시 보여주고자 하는 작업이 문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작업이다. 따라서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체험을 더 밝게, 명료하게, 뚜렷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문학비평의 작업이란 현상학적 성격을 지닌다. 박이문은 문학비평이 현상학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문학이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이론도 아니요, 어떠한 사상도 아니다. 그것은 이론이나 사상을 벗어난, 아니 그 이전에 가장 직접적으로 아무런 선입감도 없이 피부로 체험된 대상 혹은 세계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종류의 경험을 순수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철학에서 말하는 현상학이란 다음 아니라 바로 위와 같은 순수인식을 체계적으로 밝혀보자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상학이 체계적으로 밝혀내려는 대상이나 세계는 문학을 통해서 작가가 제시하고자 하는 대상이나 세계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박이문, 2017: 349-350)

참다운 문학비평이란 현상학과 다르지 않다.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체험을 내재적 관점으로부터 해명하고자 하는 작업이란 현상을 그 자체만으로 기술하고자 하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문학비평의 목표는 “사태 자체로!” 다가가고자 하는 현상학의 목표를 시나 소설 같은 문학작품에 적용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현상학은 모든 종류의 사태를 내재적 관점에서 해명하고자 하는 목표를 지닌다. 현상학이 다루고자 하는 사태에는 당연히 인간이 만든 문학작품들 역시 포함된다. 따라서 이러한 문학작품들이 보여주고 있는 체험을 내재적 관점에서 해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일종의 ‘현상학’이라고 정당하게 일컬어질 수 있다. 박이문은 문학비평이 현상학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자면 현상학적 방법은 경험의 대상을 ‘설명’함으로써 이해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해명’함으로써 이해하자는 것이다. 이 ‘해명’하는 과정을 현상학에서는 ‘현상학적 기술phenomenological description’이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해명’은 잠재적인 것을 가려내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제시해보도록 하는 과정이다. 이와 같이 해석된 현상학은 문학비평과 일치한다. 다시 말하자면 문학비평은 일종의 현상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비평의 근본적인 기능은 한 작가가 그의 의식 속에서 가장 원초적으로 경험한 순수한 대상의 형태를 밝혀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박이문, 2017: 351)

현상학으로서의 문학비평은 작품에 대한 해명이 결코 단일한 정답에 이르러 완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체험’ 혹은 ‘세계’란 작가에 따라, 작품에 따라, 비평가에 따라 무수히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과학적 세계와 달리 현상학적 세계는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특수한 작가는 특수한 때와 장소에서 특수한 방식으로 세계를 체험한다. 특수한 세계는 특수한 작품에 반영된다. 특수한 작품 역시 특수한 비평가에게 특수한 방식으로 세계를 보여준다. 작가가가 세계를 체험하는 방식도 무한하고, 그에 따라 작품이 세계를 보여주는 방식도 무한하며, 비평가가 그렇게 드러난 세계에 주목하는 방식도 무한하다. 박이문은 작품이 ‘특수한 세계’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문학비평이 한 작품 속에 잠재적으로 제시돼 가장 원시적인 작가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보이게 하는 데 있긴 하지만, 그런 세계는 결코 역사나 사회라는 구체적인 여건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완전히 보편적인 세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특수한 작가에 의해서 특수한 때와 장소에 보여진 세계일 수밖에 없고, 그것에 그쳐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각도에서 보여진 구체적인 세계를 작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하거나, 우리들 자신이 막연히 경험했던 세계를 의식하게 된다.(박이문, 2017: 353)

따라서 문학비평이란 다양한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세계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더 독창적이고,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원초적인 세계인지를 평가하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우리 앞에는 작품을 통해 드러난 다양한 세계가 놓여 있다. 그러나 모든 세계가 우리에게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떠한 삶의 맥락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우리가 놀랍게 생각하는 체험, 아름답게 생각하는 세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체험과 세계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평가하는 작업이야말로 ‘문학비평’이라는 이름에 진정으로 합당한 작업일 수 있다. 박이문은 문학비평이 수행해야 하는 작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따라서 한 작품의 문학으로서의 특질은 독창적이면서 독자에 의해 어느 정도 공감이 갈 수 있는 세계로써 결정되고, 한 작품의 가치는 그 작품 속에 나타난 세계가 어느 정도 독창적임과 동시에 보편적이고, 또한 그 세계가 어느 정도 모든 이론이나 선입관을 넘어서서 정말로 가장 원초적으로 경험된 세계이냐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박이문, 2017: 353-354)

Ⅱ. 더욱 엄밀한 현상학으로서의 문학비평

나는 박이문이 주장하는 내용에 전체적으로 동의한다. 특별히, 박이문이 ‘현상학으로서의 문학비평’이라는 개념을 통해 작품보다도 작품을 설명하는 이론에만 주목한 전통적 문학비평을 비판하는 방식은 대단히 훌륭하다. 20세기 초에 현상학이 등장한지 12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절대다수의 문학비평은 작품을 사회학적, 심리학적, 정신분석학적, 철학사상사적 이론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아무리 외재적 비평 역시 나름대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외재적 비평이 마치 ‘문학비평’이라는 분야에서 당연히 수행되어야 하는 작업인 것처럼 여겨지는 오늘날의 상황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작품을 작품으로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비평은 엄밀한 의미에서 ‘문학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다.

그러나 현상학으로서의 문학비평에 대한 박이문의 입장에는 나로서는 다소 동의하기 힘든 몇 가지 철학적 견해가 포함되어 있다. 즉, (1) 박이문은 문학비평이 현상학적 기술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현상학적 기술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박이문은 작품을 내재적 관점에서 비평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도 작품에 대한 비평에서 작가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박이문은 문학작품과 문학비평이 필연적으로 언어에 매개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언어 이전의 체험이 존재한다고 무비판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현상학적 기술

박이문은 현상학으로서의 문학비평이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으로 이어지는 철학사의 현상학 전통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는 후설의 현상학과 그 이후의 현상학을 ‘존재에 대한 학설로서의 현상학’과 ‘철학적 방법으로서의 현상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의적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대상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학문이고 후자는 경험으로부터 주어지는 대상의 내용을 순수하게 기술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두 시도 중에서 문학비평이 지향해야 할 현상학이란 전자가 아니라 후자라고 이야기된다. 박이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현상학은 존재에 대한 학설로서의 현상학과 다만 철학적 방법으로서의 현상학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의미로서의 현상학은 현상학을 창조한 후설Husserl의 현상학이다. 후설은 가설에 입각한 불확실한 지식을 극복하고, 확고부동한 명증을 가질 수 있는 지식을 얻으려 했다. 그는 방법으로서 이른바 ‘판단중단epoche’과 ‘현상학적 환원phenomenological reduction’을 주장했다. [……] 이와 같은 후설의 현상학에 반해서 후자의 의미로서의 현상학은 후설에서 볼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학설을 떼어버리고 난 방법만으로서의 현상학이다. 이 현상학은 하이데거·사르트르·메를로 퐁티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과 작가들, 그리고 그밖에 흔히 말하는 철학적·심리학적·예술적·사회학적인 하나의 방법론을 의미한다.(박이문, 2017: 350)

그러나 박이문이 제시하는 구분은 아무런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후설의 현상학은 존재론이지만 그 이후의 현상학은 방법론이라는 주장은 현상학 전통을 상당히 왜곡하고 있다.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모두는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순수한 방식 일반을 기술하고자 하는 ‘일반현상학(general phenomenology)’을 주로 탐구하였다. 이들은 대상과 우리가 관계를 맺는 가장 원초적 층위가 무엇인지, 그 층위가 어떻게 구조화될 수 있는지, 그 층위에 대한 기술을 어디까지 명료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문학비평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현상학이란 뒤프렌느, 인가르덴, 슈츠 등이 제시한 ‘응용현상학(applied phenomenology)’이다. 이러한 현상학은 각각의 대상 영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술될 수 있는지를 본질 직관의 방법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존재에 대한 학설로서의 현상학’과 ‘철학적 방법으로서의 현상학’이라는 구분은 후설의 현상학과 그 이후의 현상학을 나누는 구분으로도,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 일반을 다루는 현상학과 각각의 대상 영역을 다루는 현상학을 나누는 구분으로도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2. 작가의 중요성

박이문은 작품과 작가를 종종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한다. 그는 작품이 다른 영역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세계를 작가가 자신의 삶에서 겪은 일들로 설명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즉,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세계 뒤에는 작가가 놓여 있는 것으로 상정된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어떠한 삶을 살았고,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떠한 의도를 표현하고자 했는지에 주목해야 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주어진 작품을 넘어서 작가에게 도달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요청받는다. 가령, 박이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문학작품은 한 작가가 자기의 체험을 표현하는 방법이요, 그 체험의 기록이다. 문학은 살아 있는 사람이 쓴 것이요, 그 살아 있는 사람은 반드시 어떤 경험을 가졌던 것이고 그 경험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참다운 문학작품의 이해는 작가의 체험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고 언어적 의미만을 밝히는 데 그친다면, 문학비평은 별로 그 의미가 없다. 둘째, 작가는 작품이라는 언어를 갖고서 어떤 것을 표하려는 데 있지 않고, 그가 체험한 세계를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은 그 속의 언어가 어떻게 의미를 조직하게 되는가를 ‘설명’함으로써 이해될 수 없으며, 작가가 경험한 세계가 무엇인가를 ‘해명’함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다.(박이문, 2017: 347)

그러나 작품을 넘어서 작가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가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이러한 시도가 찾고자 하는 ‘작가’라는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결코 명확하지 않다. 가령, 우리가 ‘작가’를 확정하기 위해 참고해야 하는 범위가 작가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전체 삶인지, 작가가 작품을 쓰기 위해 전념한 인생의 특정한 시기인지, 작가에게 작품의 영감이 떠오른 한 순간인지에 따라 ‘작가’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견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설령, 우리가 작가의 삶에서 어떠한 범위를 참고해야 하는지를 확정하였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작가의 사적 체험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오히려 작품 뒤편에 작가를 상정하는 비평은 ‘설명’과 ‘해명’이라는 구분을 사실상 모호하게 만들고 만다. ‘해명’이란 결국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세계를 작가에 대한 전기적 정보로 환원하고자 하는 일종의 ‘설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3. 언어 이전의 체험

박이문은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세계가 비언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가 현상학적 기술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대상이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순수의식이라고 주장한다. 즉, 언어로 쓰여 있는 작품 뒤편에는 언어로 쓸 수 없는 대상이 놓여 있다. 작가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대상을 ‘작품’이라는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고 독자는 언어로 파악될 수 없는 대상을 ‘작품’이라는 언어로 파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문학비평이란 언어와 비언어 사이를 오고 가는 과정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대상을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고 언어로 파악할 수 없는 대상을 언어로 파악하고자 하는 모순을 내재한 작업이다. 다만, 이러한 모순은 인간의 삶에서 사라질 수 없는 일종의 근원적 경험으로서 긍정된다. 박이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여기서 우리는 문학예술의 성격을, 문학적 의도의 내재적 모순을 다시금 회상해볼 필요가 있다. 작가는 필연적으로 언어를 통해서만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게 마련이다. 독자는 작가가 표현하려는 경험을 직접 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독자는 오로지 언어로써 보고되고 의미화된 작품을 통해서만 작가가 경험한 대상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대상 자체는 언어도 아니요 의미도 아니다. 그냥 그대로의 의식의 대상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대상이 언어화되어 작품으로 표현됐을 때 대상은 이미 추상화될 수밖에 없고, 언어화 이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박이문, 2017: 351)

그러나 작품 뒤편에 놓여 있다고 상정된 비언어적 대상이 작품의 의의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과연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우리가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체험이나 세계를 감상, 비교, 평가하기 위해 실제로 의존하는 대상은 명제적 내용을 지닌 문장(sentence)이다. 가령, “고대 그리스의 비극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좌절하는 영웅의 비장한 면모를 찬양하고 있다.”와 “유대-그리스도교 성서는 종말론적 미래에 의지하여 억압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희망을 독려하고 있다.” 같은 비평은 모두 문장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각각의 문장을 통해 작품이 어떠한 체험에 주목하고 있는지, 어떠한 세계를 그려내고자 하는지, 어떠한 가치가 우리에게 더 감동을 주는지 등을 평가할 수 있다. 비언어적 대상이 비평에서 따로 상정되어야 하는 이유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평이란 언어로 표현된 작품을, 언어로 파악하여, 언어로 평가하는 활동일 뿐이다.

참고

박이문, 『인식과 실존: 언어철학, 그리고 시와 과학』, 미다스북스, 2017.

  1. 나는 글의 제목을 중의적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현상학으로서의 문학비평’이라는 박이문의 기획은 ‘더욱 엄밀한 현상학’을 지향해야 하는 동시에, ‘더욱 엄밀한 문학비평’을 지향해야 한다. 따라서 ‘더욱 엄밀한 현상학으로서의 문학비평’이란 박이문의 기획이 현상학과 문학비평 양쪽에서 요구되는 엄밀성을 더욱 충분하게 만족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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