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로버트 브랜덤의 『명시적으로 만들기』: 브랜덤은 누구인가?(1)

다음 주는 추석이라 쉬고, 27일에 두 번째 모임이 있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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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미나 소개

브랜덤의 『명시적으로 만들기(Making It Explicit)』을 강독하기 위해 세미나를 기획했다. 혼자서는 책을 꾸준히 읽기 어려울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받기 위해 ‘세미나’ 형태로 모임을 만들었다. 아무런 부담 없이 참여해도 괜찮다. 좋은 세미나는 발제자가 내용을 충실하게 준비해 오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편하게 들으면서 질문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발제는 거의 내가 맡을 예정이다. 텍스트를 미리 읽어오면 좋겠지만 읽어오지 않아도 괜찮다. 세미나 시간에 모든 내용을 이해하고, 모든 의문점들을 해소하고, 모든 논점들을 토론할 수 있으면 좋겠다.

2. 가장 영향력 있는 50명의 철학자 중 하나

브랜덤은 ‘The Best Schools’라는 사이트에서 뽑은, 살아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50명의 철학자 중 한 명이다. 이 사이트는 대학 순위를 평가하거나 학자들의 영향력을 평가하는 사이트이다. 물론, 우리가 이 사이트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반드시 공신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여러 대학에서 이 사이트의 리스트를 인용하고 있어서 나도 소개해 보았다. 흥미롭게도, 이 리스트에는 브랜덤뿐만 아니라 맥도웰도 뽑혀 있는데, 예전에 피츠버그 대학교 철학과 홈페이지에 이 두 명이 가장 영향력 있는 50명의 철학자로 뽑혔다고 공지가 올라오기도 하였다.

3. 좌파 셀라스주의 철학자

브랜덤은 좌파 셀라스주의 철학자이다. 셀라스는 (1) 「철학과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미지(Philosophy and the Scientific Image of Man)」에 나타난 자연주의적 면모와 (2) 「경험주의와 심리철학(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에 나타난 개념주의적 면모를 모두 갖고 있는 철학자이다. 밀리칸에 따르면, 각각은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 대응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상반되는 두 경향으로부터 셀라스의 자연주의적 면모를 계승하는 ‘우파 셀라스주의(right-wing Sellarsian)’ 철학자들과 셀라스의 개념주의적 면모를 계승하는 ‘좌파 셀라스주의(left-wing Sellarsian)’ 철학자들이 나왔다. 전자에는 데넷, 밀리칸, 처칠랜드 부부가 속하고, 후자에는 로티, 브랜덤, 맥도웰이 속한다. (이들 모두는 오늘날 분석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들이다.) 즉, 브랜덤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와 셀라스의 「경험주의와 심리철학」에 나타난 개념주의적 면모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좌파 셀라스주의 철학자이다.

4. 로티와 루이스의 제자

브랜덤의 박사 지도교수(doctoral advisor)는 로티와 루이스였다. 두 인물은 매우 상반된 성향을 갖고 있다. 즉, 로티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불릴 수 인물이다. 그는 형이상학적 실재, 고정된 본질, 객관적 실재, 세계에 대한 표상을 부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루이스는 전형적인 ‘분석적 형이상학자’이다. 그는 양상논리나 가능세계 이론 등 20세기 후반 분석철학의 다양한 영역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브랜덤은 이 두 인물의 제자로서 두 인물이 지닌 특징을 독특한 방식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철학의 내용은 로티의 포스트모던적 입장을 따라가면서도, 철학의 형식은 (‘점수기록 모형’ 같은) 루이스의 이론적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있다.

5. 분석적 헤겔주의자

브랜덤은 자신을 헤겔주의자로 규정한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헤겔의 아이디어를 오늘날의 최신 화용론과 의미론의 형태로 재구성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브랜덤의 철학이 헤겔의 철학을 얼마만큼이나 잘 계승한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다. 다만, 브랜덤이 헤겔을 굉장히 진지하게 읽는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어렵다. 브랜덤의 대표적인 인물 사진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브랜덤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독일어로 직접 읽는 학자이다. 몇 년 전에는 『신뢰의 정신(A Spirit of Trust)』라는 제목으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대한 연구서를 쓰기도 했다.

6. 브랜덤의 대표 저서들

『명시적으로 만들기(Making It Explicit)』는 브랜덤을 대표하는 저서이다. 이 책은 700쪽이 넘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 이 책을 보다 읽기 쉽게 대중적인 형태로 축소한 것이 『이유를 분절화하기(Articulating Reasons)』이다. 그리고 이 두 책에서 제시하는 추론주의 의미론의 관점에서 서양 철학사를 독해한 책이 『위대한 죽은 자들의 이야기(Tales of the Mighty Dead)』이다. 여기서 브랜덤은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헤겔, 셀라스, 하이데거 같은 철학사적 인물을 추론주의적으로 해설한다. 마지막으로, 추론주의의 입장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해설한 책이 최근에 나온 『신뢰의 정신(A Spirit of Trust)』이다. 이 책은 『명시적으로 만들기』와 더불어 브랜덤의 또 하나의 대표 저서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방대한 저서이다.

7.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

브랜덤의 철학은 말 그대로 ‘명시적으로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일상 속에서 수많은 규범에 지배를 받고 있다. 가정, 학교, 사회에서 요구되는 여러 규범들을 따르면서, 그 규범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장하고, 다른 사람과 특정한 주제에 대해 논쟁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짊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규범을 이해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합리적 존재(rational being)’이다. 그러나 규범이 언제나 우리에게 명시적인 형태로 반성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대부분 규범을 암묵적으로 따른다. 우리에게 규범이 본격적으로 표면화되는 경우는 토의(discourse) 상황에서 상대방과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 맞는지 틀린지에 대해 의견 대립이 일어나는 경우이다. 브랜덤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그동안 우리에게 ‘암묵적으로(implicitly)’ 이해되던 규범이 어떻게 ‘명시적으로(explicitly)’ 반성되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소위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the game of giving and asking for reasons)’란 우리가 ‘사회적 실천(social practice)’ 속에서 규범을 암묵적으로 따르는 방식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는 이론적 모델이다. 이러한 놀이 속에서 자신이 따르고 있는 규범을 논리적 어휘(logical vocabulary)를 통해 명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논리적 존재(logical being)’이라고 일컬어진다. 합리적 존재가 암묵적으로 규범을 따르는 존재라면, 논리적 존재는 명시적으로 규범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8. 찬동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는 ‘찬동(commitment)’과 ‘권한(entitlement)’이라는 의무론적 상태(deontic statuses)와 ‘떠넘기기(attributing)’와 ‘떠맡기(undertaking)’이라는 의무론적 태도(deontic attitudes)로 구성된다. 우선, ‘찬동’이란 특정한 주장이나 믿음에 개입하는 상태, 발을 담그는 상태, 언질을 주는 상태이다. 브랜덤은 “……라는 믿음에 대해 찬동 한다(be committed to believe that ……)”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특정한 믿음이나 행위에 개별적으로 찬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 찬동은 다른 찬동들과 추론적 관계를 맺고 있다. 가령, 나는 “신은 존재한다.”라는 믿음에 대해 찬동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찬동과 추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다른 찬동들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 “신이 존재하니까, 너는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형태로 다른 찬동들 역시 마치 하나의 ‘꾸러미(package)’인 것처럼 함께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9. 권한

‘권한’이란 내가 찬동한 언명이나 믿음이 정당한 이유(reason)를 지니고 있는 상태이다. 브랜덤은 이 단어를 “……라는 언명으로 표현된 찬동에 대해 권한 이 있다(be entitled to the commitment expressed by the assertion that)”와 같은 형태로 사용한다. 권한 역시 찬동처럼 다른 권한들과 추론적 관계를 맺고 있다. 가령,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본 찬동들(default commitments)은 토의를 시작하기 위한 토대로서 그 자체로 권한을 부여받은 것으로 전제된다. 다른 권한들은 권한을 지닌 기본 찬동들로부터 추론적으로 도출된다. 이때, 우리가 찬동하고 있는 전체 믿음들 중에는 찬동해도 되는 권한을 부여받은 믿음들도 있을 것이지만 권한을 부여받지 못한 믿음들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토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찬동과 상대방의 찬동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찬동이 정당한 권한을 지니고 있는지를 매 순간 평가해야 한다.

10. 의무론적 점수기록

토의 상황은 일종의 ‘의무론적 점수기록(deontic scorekeeping)’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철수가 “신은 존재한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우리는 토의 상황에서 철수가 한 말을 평가해야 한다. 우선, 철수에게는 “신은 존재한다.”라는 믿음에 대한 찬동이 떠넘겨진다(the commitment is attributed to ……). 이제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는 근거가 있긴 해?”라는 물음을 통해 과연 그 믿음에 대해 찬동할 권한이 있는지 대답할 것을 철수에게 요구한다. 그러면 철수는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어!”라고 자신의 찬동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우리는 다시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다는 게 신이 존재한다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라고 철수가 제시한 이유를 평가한다. 이때 우리는 철수의 주장에 매 순간 점수를 매기면서 철수에게 떠넘겨진 주장을 우리 자신 역시 떠맡을 것인지(whether we undertake the commitment to the claim that ……)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 토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놀이 행위자(gameplayer)로서의 역할과 점수 기록자(scorekeeper)로서의 역할을 이중적으로 수행한다. 그들은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에서 매 순간 찬동과 권한을 떠넘기고 떠맡으면서, 자신의 찬동과 권한을 평가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찬동과 권한 역시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그 놀이에서 누가 승리하였고 누가 패배하였는지, 누구의 말이 옳고 누구의 말이 그른지, 누가 정당하고 누가 정당하지 않은지는 놀이의 과정에서 누적된 점수를 통해 결정된다.

​프레젠테이션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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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영상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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