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에 대한 질문

안녕하세요, 철학을 막 공부하기 시작한 학생입니다. 여러가지 철학들을 훑어보다가, 하이데거의 철학이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져 하이데거 철학의 입문서를 사서 읽고 있는데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질문드립니다.
이 책에서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발간한 목적은 존재-물음의 필요성을 밝히기 위한 것이였다고 하는데, 조금 뒤에 가서는 하이데거가 존재의 의미를 시간이라고 결론지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이데거는 존재-물음의 필요성을 제기 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 자체를 규명한 것이 되지 않나요? 존재의 의미를 묻는 것의 필요성과 존재의 의미를 함께 밝힌 것일까요? 만약 함께 밝혔다면 하이데거는 그 필요성이 어디에 있다고 했는지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개의 좋아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구체적으로 정리작업하는 일이 이 책이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을 모든 개개 존재 이해 일반의 가능한 지평으로 해석하는 것이 이 책의 잠정적인 목표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7, 13쪽.)

『존재와 시간』의 전체 목표는 '시간'을 존재의 의미로 규명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하이데거에게 '의미Sinn'란 일종의 '지평Horizont' 개념인데(429쪽 참고), 마치 지평선 위에 모든 것들이 솟아 올라오는 것처럼, 시간이 존재를 솟아오르게 하는 조건이라는 이미지로 이해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존재 물음의 필요성'을 밝힌다는 건, 결국 존재의 의미를 시간으로 규명하기 위한 가장 첫 번째 단계인 것이지 그 자체가 책 전체의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필요성은 존재물음의 '존재론적'이고 '존재적'인 우위를 이야기하는 제3절과 제4절에서 이미 설명되거든요. 애초에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 제목부터가 이 책의 작업이 결국 '시간'이라는 지평을 지향하고 있다는 걸 잘 드러내주죠.

4개의 좋아요

몇 달 전에 『존재와 시간』 전체를 해설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적이 있는데, 이걸 참고해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1개의 좋아요

앗, 감사합니다 !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이, 사람들이 "우리가 이미 존재를 이해하고 있는데 굳이 존재의 이해조건에 관한 질문을 왜 던져야 하는가?" 라고 물었을 때 하이데거는 "이 책의 목적이 그 질문을 왜 던져야 하는지에 대한 규명이다." 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이 말은 책을 읽다보면 존재물음의 필요성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을까요? 답변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하이데거가 정확히 그런 워딩을 사용해서 말한 곳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마 입문서 저자분께서 하이데거의 철학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기 위해 약간 각색을 하신 것 같습니다. 다만, 『존재와 시간』이 서두에 존재물음의 필요성을 이해시키고 있는 것은 맞죠. 그 필요성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해서 존재 이해가 시간성의 지평에서 이루어진다는 걸 보여주는 작업이 책의 목표이긴 하지만요.

그런데, 참고적으로, '존재물음의 필요성'이라는 걸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상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다소 요구됩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적어도 전기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라는 건 철저하게 '존재자의 존재(Sein des Seienden)'이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신비한 대상 같은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존재'란, 엄청나게 대단하고 심오한 무엇인가가 아니라, 단지 개별 존재자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given (혹은 현시되는manifested) 방식을 나타내는 표현이에요.

가령, 우리에게 '망치'라는 존재자가 못을 박기 위한 것으로서 주어지면(현시되면), 그 존재자는 '못을 박기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이고, (어벤져스의 토르가 사용하는 묠니르처럼) 적을 때려잡기 위한 것으로서 주어지면(현시되면), 그 존재자는 '적을 때려잡기 위한 존재'가 되는 거죠. 각각의 존재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도 저렇게도 수많은 방식으로 주어질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존재자가 주어지는 방식이 그 존재자가 존재하는 방식인 거고요.

문제는, 우리가 일상에서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쉽게 망각해버린다는 거에요. '존재'란 고정된 무엇인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 존재자와 어떻게 만나는지에 따라서, 언제나 새롭게, 경이롭게, 다양하게 현상할 수 있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마치 사물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고정된 채 존재하는 것처럼, 대상의 '본질'이라는 것이 형이상학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한다는 거죠.

이런 일상적인 태도를 20세기에 본격적으로 비판하면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을 강조한 철학의 분야가 '현상학'이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현상학에서 존재물음의 단초를 찾아요. 『존재와 시간』은 '판단 중지', '태도 변경', '환원', '기술' 같은 현상학적 방법을 기본적으로 전제한 채 쓰인 책이죠. (물론, 하이데거가 후설의 이런 용어나 방법들을 그다지 꼼꼼하게 소개하고 있지는 않지만요.) 여하튼, 그래서 '존재 물음'이라는 것도 이런 현상학적 맥락을 바탕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어요. 그렇지 않고서 다짜고짜 "서양철학은 존재망각에 빠져 있었다."라느니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가 중요하다."라느니 하는 테제 자체만을 대뜸 강조하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전혀 감조차 안 잡히죠.

4개의 좋아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떠오르는 철학이네요. 바쁘실텐데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개의 좋아요

네네 <꽃>이라는 시가 종종 하이데거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국내에서 자주 거론되곤 하죠. 하이데거 본인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좋아했던 걸로도 유명해요. 똑같은 장미와 똑같은 여우라도,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게 그 소설의 주제잖아요. 어른들의 세계는 이런 어린왕자의 통찰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상을 눈에 보이는 형태(눈앞의 존재Vorhandensein)로만 고착시키려 하고요. 바로 이렇게, 어른들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어린왕자의 시선이, 하이데거가 기술문명의 시대에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거죠.

3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