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윤리학?: 코라 다이아몬드의 「윤리, 상상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의 방법」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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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대학교에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윤리학에 대해 논문을 쓰고 계신 K씨와 이야기를 하다가, 코라 다이아몬드(C. Diamond)와 제임스 코넌트(J. Conant) 등으로 대표되는 소위 ​‘새로운 비트겐슈타인(new Wittgenstein)’ 진영이 비트겐슈타인의 윤리학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해 토론하게 되었다. K씨는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이, 논리실증주의 진영처럼, 윤리학을 ‘순전한 무의미(plain nonsense)’로 규정해버리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셨다. 나는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이 애초에 ‘의미/무의미’라는 이분법 자체를 해체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들이 논리실증주의 진영과는 명확하게 구별되는 입장을 제시할 것 같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다이아몬드가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윤리학을 주제로 쓴 글들을 읽어본 적은 없기 때문에,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이 윤리학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떠한 입장을 제시하는지는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번에 K씨가 언급하신 논문 중 다이아몬드의 「윤리, 상상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의 방법(Ethics, Imagination and the Method of Wittgenstein’s Tractatus )」이라는 글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내가 이해한 이 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비트겐슈타인이란 무엇인가?

기존 비트겐슈타인 해석자들과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해석자들은 『논고』가 말하고 있는 ‘무의미(nonsense)’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한 의견 대립을 보인다. 우리는 앤스콤과 다이아몬드 사이의 대립을 통해 두 입장 사이의 대립을 요약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 앤스콤(E. Anscombe)으로 대표되는 기존 비트겐슈타인 해석자들은 무의미한 문장들 중에서도 (a) 말할 수 없는 진리를 가리켜 보이고 있는 무의미한 문장과 (b) 순전히 철학적 혼동으로 인해 발생한 무의미한 문장이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논고』 자신의 문장은 세계에 존립하는 사태를 기술하는 문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의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한계 너머에 있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순전히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 다이아몬드(C. Diamond)로 대표되는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해석자들은 모든 무의미한 문장이 ‘순전한 무의미’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무의미한 문장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의 핵심 주장이다. 『논고』 자신의 문장도 순전한 무의미에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즉, 이러한 해석은 『논고』 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책이 아니라, ‘아이러니’를 통해 철학적 질병을 해소하고자 한 책이라고 이야기한다. 『논고』의 명제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형이상학을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논고』의 끝부분에 이르러 형이상학에 대한 지금까지의 모든 탐구가 사실 무의미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빠지기 때문이다(비트겐슈타인, 2006: 6.54-7 참고). 따라서 『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 아니라, 정반대로 말할 수 없는 것 따위는 순전히 무의미할 뿐이라고 말하는 책으로 해석된다.

2. 새로운 비트겐슈타인이 옳다면, 윤리적 명제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논고』의 모든 명제가 순전한 무의미일 뿐이라면,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윤리적인 것(the ethical)’은 어떠한 지위를 가져야 하는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요점이 ‘윤리적’이라고 강조하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책을 통해 윤리적인 것이 내부로부터 한계를 얻기 때문에, 『논고』가 쓰여진 부분과 (정말로 중요한) 쓰여지지 않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도 이야기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은 『논고』의 모든 명제가 순전한 무의미라는 해석이 윤리적인 것에 대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급들과 어떠한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이아몬드는 우선 『논고』가 6.54에서 책의 저자(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해를 요청한다고 지적한다. 즉, 자신의 모든 명제가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있는 저자를 이해할 때에야 『논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의해서 하나의 주해 작업이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을 통해──나의 명제들을 딛고서──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

(비트겐슈타인, 2006: 6.54, 인용자 강조)

그런데 무의미를 말하고 있는 저자를 이해하는 작업이란 역설적인 성격을 지닌다. (a) 이러한 작업은 저자의 두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경험 심리학적 기술 따위가 아니다. 가령, “저자 A 에게 자극 S 가 주어질 때 A 는 성향 I 를 갖는다.”라는 식의 법칙에 대한 기술에는 어디에도 저자가 말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이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b) 이러한 작업은 “Ap 임을 믿는다.”라는 종류의 문장으로 기술될 수도 없다. “Ap 임을 믿는다.”라는 문장은 오직 p 가 이해될 수 있는 문장인 상황에서 의미를 지닌다. p 자체가 애초에 무의미한 명제인 상황에서는 “Ap 임을 믿는다.”라는 문장 역시 무의미한 문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다이아몬드는 무의미를 말하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작업에서 ‘상상(imagination)’이 요구된다고 지적한다. 즉, 우리는 무의미를 말하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상황에서 그 사람이 무엇인가 의미 있는 사유를 하고 있다고 상상해야 한다. 그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무의미하더라도 그 말에 매료되어 그 말이 무엇인가 의미를 지닐 것이라고 상상해야 하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무의미를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길 원하는 것은 무의미를 의미라고 상상적으로 생각하는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요점은 『논고』가, 철학적 무의미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진 것으로서 그 자신을 이해하는 가운데, 그리고 자신의 독자들에게 제시한 것과 같은 종류의 욕구에 대한 이해 가운데, 일종의 상상적 활동(imaginary activity)을, 곧 무의미를 의미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능력의 발현을, 우리가 그 무의미 속에서 어떤 것을 사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성향을 상상적으로 공유하는 능력의 발현을 상정한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말하자면, 당신의 무의미를 의미로 보지 못한다면, 곧 나 자신이 상상적으로 그 무의미의 매력을 느끼도록 하지 못한다면,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Diamond, 2000: 157-158)

바로 여기서 윤리적 명제를 말하고 있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해명된다. 『논고』의 저자인 비트겐슈타인은 (설령, 그 자신은 『논고』의 6.42에서 윤리적 명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종의 ‘윤리적’ 명제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논고』가 폭로하는 바에 따르면, 윤리적 명제는 결국 무의미하다. 따라서 윤리적 명제를 말하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작업은 무의미를 말하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윤리적 명제를 말하고 있는 사람이 무엇인가 의미 있는 사유를 하고 있다고 ‘상상적으로(imaginatively)’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상상적 관점을 통해 ‘윤리적’ 명제는 다른 무의미한 명제들과 구별되는 방식으로 의미를 얻는다. 즉, (a) 『논고』가 비판하는 철학적 명제, (b) 철학적 명제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된 『논고』 자신의 명제, (c) 『논고』가 지향하는 윤리적 명제는 모두 ‘순전한 무의미’이다. 그러나 윤리적 명제는 다른 무의미한 명제가 더 이상 매력을 지니지 않게 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매력을 지니는 명제이다. 설령, 그 명제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거기에 무엇인가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상상하도록 만드는 명제가 바로 윤리적 명제인 것이다. 가령, 다이아몬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을 고려해 볼 것을 요청한다.

나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변하는 대상들에 인생의 선(goodness)이 의존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성향이 있다.(Diamond, 2000: 161)

이 말은 크게 두 가지를 함의하고 있다. 발화자는 자신의 명제가 형이상학적 진리와 무관하게 성향에 근거한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명제를 계속 말하고 싶어한다. 즉,

  •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변하는 대상들에 인생의 선(goodness)이 의존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무의미하다. 이러한 명제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진리도 말하고 있지 않다. 다만, 발화자는 이러한 명제를 말하고자 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 그러나 발화자는 자신이 말하는 명제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명제를 말하고자 한다. 그 명제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그 명제가 지닌 매력을 없애버리지 못한다. 발화자는 (혹은 우리는) 여전히 그 명제를 의미 있는 것처럼 상상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윤리적 명제는 철학적 명제나 『논고』 자신의 명제와 달리 마지막에는 없어져야 하는 대상 따위가 아니다. 다이아몬드는 윤리적 명제가 지닌 특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만일 우리가 ‘윤리적 문장’의 외적 특징을 고려할 경우 우리가 그것들을 세 번째 그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 문장들은 『논고』 자신의 문장이나 형이상학적으로 무의미한 문장과 어떤 방식에서 다르다. [……] 명백하게 의미가 있다고 상상적으로 여겨지는, 윤리적 문장들과 철학적 문장들 사이에는 중요한 유사점이 있다: 윤리적 무의미와 철학적 무의미 둘 모두는 총체로서의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생각이 지닌 매력을 반영한다. 그러나 나는 만일 우리가 『논고』를 올바로 읽는다면, 책의 결론이 그 두 종류의 무의미 발화자에 따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적 문장의 매력은 그 책이 철학자들 속에서 [우리를 빼내어] 이끌어가기 원하는 종류의 자기 이해를 통해 사라질 것이지만, 윤리적 문장의 매력은 사라지지 않는다.(Diamond, 2000: 161)

3. 새로운 비트겐슈타인이 옳다면, 전기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다이아몬드는 윤리적 문장에 대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이 논리실증주의의 관점과 분명하게 구별된다고 강조한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 둘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발언들이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Diamond, 2000: 163)라는 질문에 대해 차이를 보인다. 즉,

  • 논리실증주의는 윤리적 명제가 의미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소위 ‘메타 윤리학(meta-ethics)’을 통해 무의미한 윤리적 명제를 유의미한 경험적 심리학의 명제로 환원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윤리적 명제는 발화자의 연상, 감정, 소망, 태도 등을 나타내는 (더 이상 윤리적 명제가 아닌) 경험적 심리학의 명제로 분석되는 상황에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 비트겐슈타인은 윤리적 명제가 철저하게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메타 윤리학을 통해 윤리적 명제를 경험 심리학의 명제로 유의미하게 바꾸는 작업은 역설적이게도 윤리적 명제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작업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윤리적 명제가 순전히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명제를 상상적으로 유의미한 것으로 다루고자 해야 한다. 그 명제가 우리에게 발화되는 이유는, 그 명제가 의미 있는 명제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명제가 무의미한데도 여전히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는 매력을 지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윤리적 명제는 단순히 ‘의미/무의미’라는 범주에 갇히지 않는다. 『논고』는 윤리적 명제에 어떠한 범주도 부여하지 않는다. 즉, 윤리적 명제에 의미를 부여하는 토대를 찾고자 하는 시도는 논점을 잘못 잡고 있다.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는 윤리적 명제를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경험 심리학적 명제로 환원하더라도 윤리적 명제가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작업은 윤리적인 것에 대한 논의를 발화자의 연상, 감정, 소망, 태도에 대한 논의로 대체해버릴 뿐이다. 따라서 윤리적인 것을 직접 말하고자 하는 윤리적 명제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윤리적인 것을 환원시키고자 하는 경험 심리학적 명제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애초에 ‘사실/가치’ 혹은 ‘의미/무의미’라는 이분법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 다이아몬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을 우리가 신뢰하는 것보다도 더 신뢰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논고』를 올바로 읽었다면, 거기에는 사실-가치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의미를 지닌 문장과 논리학과 수학의 문장 사이의 구별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문장과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의미 없는 기호를 포함하는, 무의미한 문장 사이의 구별이 존재한다. 윤리적 문장은 무의미한 문장의 하위 범주(subcategory)가 아니라 [애초에] 범주가 없다(non-category).(Diamond, 2000: 164)

4. 새로운 비트겐슈타인이 옳다면, 우리는 윤리적 명제를 이해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하는가?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에 따르면, 『논고』는 우리가 윤리적 명제를 이해하고자 하는 상황에서 수행하고 있는 활동이 무엇인지를 보도록 만든다. 『논고』가 윤리적 명제를 제시하는 방식은 크게 두 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 우리는 명제 p 를 윤리적 명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 p 는 우선 윤리에 대해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 우리는 명제 p 를 더 이상 윤리적 명제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 우리는 p 를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p 자체가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p 를 의미 있게 읽어내고자 하는 상상적 활동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윤리적 명제가 순전한 무의미라는 사실로부터 윤리적 명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논고』는 우리가 윤리적 명제를 설명하려는 시도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자각하도록 유도한다. 다이아몬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의미에 대한 엄격한 관점으로부터 무의미에 대한 어떠한 설명이나 해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따라나온다고 하더라도, 무의미성에 대한 자각이 우리가 [무의미한 명제를] 설명하는 활동을 포기하도록 이끈다는 사실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관점은 우리가 [무의미한 명제를] 설명하는 활동을──순전한 무의미가 제시하는 의미의 외현에 매료된──우리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상상적 이해로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Diamond, 2000: 165)

다이아몬드는 우리가 특정한 사람의 의지를 ‘선/악’으로 표현하는 상황에서 수행하고 있는 일을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반점(Brithmark)』과 그림형제의 동화 『어부와 그의 아내(The Fisherman and His Wife)』를 통해 해명한다. 두 이야기에서 표면적으로 주어지는 사건은 얼핏 매우 사소하다.

  • 『반점』 : 주인공 에일머는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의 뺨에 있는 반점을 불만족스러워한다.

  • 『어부와 그의 아내』 : 어부의 아내는 마법에 걸린 가자미 왕자에게 더 좋은 집에 살게 해달라는 소원을 빈다.

그러나 두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얼핏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사건이 사실 그 속에 사악하고 어두운 어떤 것을, 곧 ‘총체로서의 세계’ 혹은 ‘인생’에 대한 불만족을 품고 있었다고 폭로한다. 에일머는 아내의 뺨에 있는 반점을 없애버려고 하다가 결국 아내를 죽여버린다. 어부의 아내는 점점 더 큰 소원을 빌다가 마침내 자신이 신이 되어서 세상의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여기서 우리는 얼핏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사건을 통해 해당 인물들이 ‘악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상상하는 활동에 참여한다. 즉, (a) 아내의 뺨에 있는 반점을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에일머의 모습과 좋은 집에서 살길 원하는 어부의 아내의 모습은 그들이 내면에 ‘사악하고 어두운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 있는 말도 해주고 있지 않다. (b) 에일머와 어부의 아내가 악한 의지를 지닌 인물이라는 생각은 우리가 이야기 속에서 주어진 ‘사실의 문제(matter-of-fact)’로부터 일종의 상상을 전개한 결과이다. (c) 해당 인물들이 ‘총체로서의 세계’ 혹은 ‘인생’에 대해 악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우리의 상상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 (d) 그러나 이러한 상상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윤리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결코 이해할 수 없다. (e) 따라서 윤리적인 것에 대한 담화와 생각에서 ‘무의미’란 단순히 없어져야 할 질병 따위가 안니다. (f) 오히려 윤리적인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철저하게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윤리적인 것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다. 다이아몬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고려한 사례들에서, 인간 안에 있는──인간의 의지 안에 있는──악한 어떤 것에 대한 감각과 그 인간에 대한 이해──우리는 그 혹은 그녀가 어떤 것을 의지한다고 보기 원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언어 속에서 의지되고 있는 것이 아무 내용을 가지지 않는다고 규정한다──사이에는 연결점이 존재한다. 우리는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우리가 그러한 언어를 의지되고 있는 것을 주는 것으로서 파악한다고 우리 자신이 상상하도록 한다. 두 경우(환상illusion에 사로잡힌 사람을 이해하는 것, 어떤 사람에게 악한 의지를 귀속시키는 것) 사이의 유비가 지닌 한 가지 핵심적 요점은, 만일 우리가 이러한 상상의 활동에──줄 내용이 없는 곳에서 ‘내용’을 주는 활동에──참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우리의 목표를 상실하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자 한 것에 대해 말하지 못할 것이다. 환상은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꽌련된 의미에서, 내가 고려한 사례 속에서의 악한 의지 역시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심리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사실이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이 이후에 문법적이라고 부를 어떤 것이다.(Diamond, 2000: 167)

5. 새로운 비트겐슈타인이 옳다면, 『논고』는 어떤 점에서 ‘윤리적’인가?

『논고』 자신이 내포하고 있는 윤리적 명제 역시 상상적 활동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가령, 우리는 『논고』가 “세계를 올바른 방식으로 보도록”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잘못된 요구, 기대, 소망을 단념시킨다는 점에서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계가 나의 의지대로 존재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태도가 바로 『논고』가 비판하고자 하는 ‘잘못된 상상(false imagination)’이라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상상적 행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즉, (a) 『논고』가 말하고 있는 모든 명제는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 (b)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 있는 무의미를 의미 있는 것처럼 상상할 때에야 비로소 『논고』를 일종의 ‘윤리적’ 명제로 이해할 수 있다. (c) 따라서 ‘윤리적인 것’에 대한 내용은 『논고』에서 쓰여지지 않은 부분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d) 그러나 윤리적인 것을 다루고자 하는, 쓰여진 부분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상상적 활동을 통해 이해해야 하는 『논고』의 부분이야 말로 진정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다이아몬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자신의] 책이 윤리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기술은 ‘총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대해 마치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종류의 언어로 우리를 향하게 한다. 그래서, 만일 책의 저자로서 그[비트겐슈타인]가 이해되었다면, 책의 윤리적 의도를 부여한다고 주장하는 언어는 오직 우리가 책을 구성하는 문장들을 독해하는 가운데 사용하도록 초청받는 가상의 방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Diamond, 2000, 169)

6. 새로운 비트겐슈타인이 옳다면, 『탐구』는 과연 『논고』를 부정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이 이전에 『논고』에서 지니고 있던 생각들을 이후에 『탐구』에서 많이 변경하였다고 하더라도 ‘악한 의지’에 대한 명제가 ‘사실의 문제’에 대한 명제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버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a) 어떠한 인물에게 악한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는 일상적인 사실들을 기술하는 방식으로 파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b) 악한 의지에 대한 명제는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 (c) 우리는 악한 의지에 대한 무의미한 명제를 상상적 활동을 통해 의미 있는 것처럼 이해해야 한다. (d) 물론, 우리는 상상적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언어의 한계’나 ‘명제의 일반적 형식’ 같은 『논고』의 개념에 반드시 의존할 필요는 없다. (e) 그러나 악한 의지에 대한 명제가 사실의 문제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고』의 입장 자체는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다이아몬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만일 인간의 마음속 어둡고 사악한 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말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what goes on)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말로부터 그러한 말을 잘라내는 논리적 특징을 통해──우리의 말이 일상적인 말로 들어가버리지 않도록──구분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한 논리적 특징은, 내가 논증한 것처럼, [『어부와 그의 아내』 같은] 동화에서 보여질 수 있을지도 모르고, 다른 방식으로는, 악한 의지의 경험적 심리학에 대한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거부에서 보여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적 사유가 우리를 이러한 종류의 대립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그 대립을 언어의 한계 같은 개념이나 명제의 일반적 형식이라는 개념에 호소함으로써 기술하려는 성향을 가지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이 우리에게 의의를 지닌다면, 우리가 그 대립과 그것이 우리에게 지니는 중요성을 구분한 방식으로 기술할 수 있다.(Diamond, 2000, 170)

7. 새로운 비트겐슈타인의 의의와 한계는 무엇인가?

(1) 나는 다이아몬드가 『논고』를 적절하게 해석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이 제시하는 『논고』 해석은 지나치게 과격하다. 해커(P. M. S. Hacker)가 잘 보여준 것처럼,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은 『논고』를 정합적으로 해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다른 수많은 자료 역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Hacker, 2000 참고). 특별히, 다이아몬드가 『논고』의 모든 명제를 ‘순전한 무의미’라고 해석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경험 심리학에 대한 비판적 함의를 담고 있는 『논고』의 구절들은 유의미한 것으로 인용한다는 사실은 심각한 자기 모순이다(Diamond, 2000: 156-157 참고). 논의를 주석적 차원에 국한시킨다면,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은 『논고』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구절만을 대단히 선택적으로, 편향적으로, 자의적으로 뽑아내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그러나 나는 다이아몬드가 제시하는 철학적 입장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은 윤리적 명제가 자신의 뒤편에 아무것도 감추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순전한 무의미’라는 표현을 통해 정당하게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이러한 무의미가 윤리적 명제에 대한 고민을 금지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적절하게 지적하였다. 즉, 우리는 윤리적 명제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윤리적 명제에 매료될 수 있다. 윤리적 명제를 보장해 줄 형이상학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윤리적인 것을 지향할 수 있다. 윤리적인 것이 형이상학적 영역에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윤리적인 것이 경험 심리학적 영역으로 환원되지 않을 때에도, 우리가 여전히 윤리적인 것에 매료되어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상상을 계속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이 제시하는 『논고』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이 제시하는 철학적 통찰만큼은 대단히 가치 있다.

(3)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이 제시하는 입장은 칸트의 ‘마치 ~인 것처럼(als ob)’의 철학과 닮아 있다. 두 철학적 입장에서 윤리적인 것이란 사실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사실의 문제 속에 윤리적인 것을 정초하고자 하는 시도는 철저하게 거부된다. 오히려 우리는 사실의 문제가 어떠하든지 윤리적인 것이 마치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행동하도록 요구받는다. 우리가 인과적 질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마치 의지의 자유가 존재하는 것처럼, 도덕적 입법자인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최고선으로서의 행복이 실현될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이아몬드는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이 모두 윤리적인 것을 사실의 문제로 환원하길 거부하였다고 지적하기도 한다(Diamond, 2000: 168 참고). 물론, 그녀가 두 철학자 사이의 비교로부터 ​‘마치 ~인 것처럼’의 철학에 대한 논의로까지는 나아가지는 않지만 말이다.

(4) 다만, ‘마치 ~인 것처럼’의 철학이 일종의 회의주의로 비판받는 것처럼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도 자칫 회의주의로 귀결될 위험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윤리적 명제가 ‘순전한 무의미’라는 표현은 다소 오해의 소지를 안고 있다.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이 말하는 ‘무의미’란 사실 대단히 특수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무의미’란 윤리적 명제가 실제로 의미가 없다는 표현이라기보다는 단지 윤리적 명제가 형이상학적 진리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표현이다. 윤리적 명제를 보장하는 형이상학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윤리적 명제를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형이상학적 진리란 윤리적 명제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윤리적 명제의 ‘의미’는 윤리적 명제의 ‘사용’을 통해 결정될 뿐이다. 따라서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이 회의주의를 함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제대로 강조되기 위해서는 ‘순전한 무의미’라는 표현이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윤리적 명제는 형이상학적 진리와 상관 없이 언젠나 이미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참고

비트겐슈타인, 루트비히., 『논리-철학 논고』, 이영철 역, 책세상, 2006.

Diamond, C., “Ethics, Imagination and the Method of Wittgenstein’s Tractatus”, The New Wittgenstein, A. Crary and R. Read(ed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0, 149-173

Hacker, P. M. S., “Was He Trying to Whistle It?”, The New Wittgenstein, A. Crary and R. Read(ed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0, 353-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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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윤리적 명제는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고 하는 마지막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조금 이상한 질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윤리적 명제가 상상에 기초한다면 설사 회의론에 빠지지는 않더라도 일정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서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거칠게 말하자면, 윤리는 상대적인 것이 되어버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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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윤리적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특정한 '규칙'을 따르는 방식이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이유를 '훈련' 때문이라고 말하긴 해요. 사람들이 자신들의 전통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에 그 전통이 공유되는 사회 속에서는 그런 생각과 행동도 공유되는 것이라고요. 저는 이걸 일종의 '상대주의'라고 봅니다. 다만, '상대주의'라는 말이 때로 '회의주의'와 혼동되거나 때로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이라는 문제적인 개념을 함의하는 것처럼 오해될 때가 많아서, 이런 표현을 전면에 내세우는 건 조금 꺼려지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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