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는 20세기 최고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비록 '신학자'라는 공식적인 타이틀을 갖고 있긴 하지만, 존재론, 유신론적 실존주의, 종교사 연구, 정신분석학, 문화비평 등 다양한 학문 영역에 광범위하게 연관되어 있는 인물이기도 하죠.
가령, 틸리히는 2차 세계대전 발발 전 독일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 철학자인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교수자격 취득 논문을 지도한 학문적 스승이었고, 미국 망명 시절에는 라인홀트 니버와 함께 미국의 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고, 말년에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학자인 미르치아 엘리아데와 함께 종교사에 대한 강의를 하였습니다. 은퇴 후에는 틸리히의 시카고 대학교 후임 교수 자리에 철학적 해석학의 대가인 폴 리쾨르가 임명되었죠. 이렇듯 틸리히가 속한 지적 전통은 신학을 넘어서 철학과 종교학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넓습니다.
미국 사상계에서 틸리히는 정말 엄청난 지위를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지위는 틸리히의 말년 경력만 보아도 드러납니다. 틸리히는 1953년과 1954년에 인문학 분야의 가장 명예로운 강좌 중 하나인 애버딘 대학교의 기포드 강좌를 맡았습니다. 또 1955년에 유니온 신학교에서 정년 은퇴한 이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 특별직 교수로 초빙되어 '강의 시간에 대한 의무 없이', '원하는 주제의 강좌를', '원하는 시간만큼' 자유롭게 개설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기도 했죠. 이런 권한은 하버드 대학교에서도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은퇴 교수 5-6명에게만 부여한 권한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틸리히는 대중적으로도 막대한 영향력이 있던 인물이라, 미국의 유명 시사 주간지 「타임」에서는 창간 40주년 기념 강연회의 강사로 틸리히를 초청하기도 하였습니다. 틸리히가 사망했을 때는 「뉴욕타임즈」 전면에 부고가 실렸고요.
이런 틸리히의 사상적 입지는 종종 듀이, 화이트헤드, 러셀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윤리학자인 조지아 하크니스(Georgia Harkness)는 "미국 철학을 위해 화이트헤드가 있었다면 미국 신학을 위해 틸리히가 있다."라는 말을 했다고도 하죠.
틸리히가 제시한 신학 방법론인 '상관관계법(the method of correlation)'은 "철학이 질문하고 신학이 답한다."라는 모토 아래에 철학적 문제의식과 신학적 성찰을 매우 긴밀하게 연결시키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리스도교 내부를 넘어서 그리스도교 외부에도 많은 통찰을 던져줄 수 있다는 것이 틸리히의 주장이었습니다. 철학의 논의와 신학의 논의를 서로 관계지어서 '이성과 계시', '존재와 하나님', '실존과 그리스도', '생명과 성령', '역사와 하나님 나라'가 서로 어떻게 질문과 대답의 구조를 형성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틸리히가 수행한 신학적 작업이었던 것이죠. 특별히, 틸리히는 이러한 신학적 작업을 그가 살았던 당시의 최신 철학, 신학, 종교학, 정신분석학 이론을 총집결시켜 수행합니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론, 루돌프 오토의 종교현상학, 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 루돌프 불트만의 비신화화 이론, 칼 융의 분석심리학,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종교형태론 등이 한곳에 어우러져서 독특한 방식으로 융합된 형태가 바로 틸리히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틸리히의 철학적-신학적 사유를 대표하는 저서가 이번에 새로 출간된 『조직신학』입니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켜서, 책을 구매하려고 몰려든 학생들 때문에 당시 유니온 신학교 구내 서점에 소동이 일어났다는 일화가 전해지기까지 하죠.
사실, 틸리히의 『조직신학』은 이미 한국에서도 한들출판사에서 2001년에 다섯 권으로 분절되어 번역된 적이 있습니다. 다만, 국내에서는 이 책이 오랫동안 절판되어서, 신학생들 중에는 마치 드래곤볼을 모으는 것처럼 이 다섯 권을 모두 모으기 위해 중고서점을 뒤지는 모험을 한 분들이 수두룩했다고 합니다. 저도 대학교 초년생 때 『조직신학』 번역본을 구해보려고 한 적이 있는데, 도저히 매물이 없어서 그냥 포기하고 영어 원서를 구해 읽었죠.
새로운 번역본은 연세대에서 틸리히의 구원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으신 남성민 선생님이 신학 도서 전문 출판사인 새물결플러스를 통해 번역하셨다고 합니다. 새물결플러스는 국내에서 꽤나 입지가 있는 출판사인데, 이번에는 책이 절판되지 않고 오랫동안 유통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개인적으로, 틸리히는 제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에 신앙의 문제들을 고민하는 데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보니, 저에게는 항상 관심과 애착이 가는 사상가입니다. 지금의 저는 틸리히의 신학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이 있지만, 신학을 통해 철학에 대답하고자 한 그의 기획은 그리스도교 신앙인인 저에게는 여전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네요. 이번 번역본 출간이 더욱 많은 분들에게 틸리히의 신학이 소개되고 논의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저처럼 철학을 공부하면서 종교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신 분들에게는, 틸리히가 더욱 많이 알려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