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백도형의 "4차원 개별자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나는 4차원 개별론의 귀결들은 동의가 되지만 4차월 개별자론이라는 형이상학 자체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데이비슨이 "개념적 도식에 대하여"에서 개념적 도식과 경험/실재의 이원론을 비판할 때 염두에 둔 것은 언어적 차원과 별개로 성립하는 존재론적 차원이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강한 실재론이 통약 불가능한 실재를 개념적인 것의 토대가 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불합리하다면, 4차원 개별자론은 실재, 개별자가 언어와 상관이 없다는 일종의 회의주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애초에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개별자들에 대해 성립하는 인과성의 언어라는 개념 자체는 상당히 회의주의적이다.
백도형은 자신의 저서 『심신 문제』에서 4차원 개별자론의 의의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는데 하나는 4차원 개별자론을 통해 완전한 반실재론, 형이상학의 제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소 존재론으로서 4차원 개별자를 제시함으로써 우리의 논의 영역은 실재 자체가 아니라 언어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을 보자.
4차원 개별자론은 인식의 다원성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더라도 세계의 존재 자체에 대해 나름대로 최소 존재론, 최소 실재론을 제시함으로써 극단적인 허무주의, 반실재론, 상대주의가 아닌 건전한 다원주의를 옹호할 수 있는 길을 제공했다. 실재하는 세계 자체의 존재를 최소한이나마 인정함으로써 술어화, 이론화를 통한 다양한 과학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무제한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토대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백도형. (2014). 심신문제. 서울시:아카넷. 405
4차원개별자론은 기존의 문제에 대해 별 설명력을 갖고 있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4차원 개별자 자체가 무규정적이고 술어화 불가능한 데다 '기존의 문제'라는 것이 특정한 배경지식을 전제로 구성도니 것인데, 그러한 전제들에서 최대한 거리를 두려는 것이 4차원 개별자론이기 때문이다. 물론 4차원 개별자론은 최소 존재론, 최소 실재론의 입장으로서 그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설명력을 추구하지 않는다. 설명을 위해서는 설명의 대상을 우선 문화적인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상정해야 하는 등 언어적`문화적 구성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4차원 개별자론은 이러한 설명 작업의 다양한 틀에 바탕이 되지만, 그 자체는 어떠한 설명력도 지니지 않는다.
같은 책, 407
백도형의 주장대로라면 4차원 개별자는 그 자체로는 어떠한 설명력을 가지지 않는 최소 존재자로서 반실재론상대주의의 길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문화적
언어적 작업의 틀의 배경이 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백도형 본인이 비판했던 환원주의자들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으로 보인다. 백도형은 환원주의자들이 보편자로서의 속성이 실재한다고 가정한 후 최종 과학이 실체와 속성의 관계를 드러낼 것이라는 기대감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나는 백도형의 지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런데 백도형의 4차원 개별자론도 마찬가지의 문제에 봉착해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도형은 '상대주의, 반실재론'에 빠지면 안된다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요청, 형이상학이 무용한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요청으로서 4차원 개별자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4차원 개별자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설명력이 없지만 인간의 언어적인 인식적 작업의 배경이 된다고 주장한다.
결국 백도형도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요청에 의해 4차원 개별자를 상정하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환원주의자들은 최종과학의 성과라는 구체적인 미래에라도 기대고 있는데 백도형의 형이상학은 그저 "세계가 실재한다"는 명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4차원 개별자를 상정하지 않으면 저 명제가 유지될 수 없다는 존재론적 불안에 자신의 주장을 전개할 뿐이다. 4차원 개별자가 설명력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에, 이런 비판은 피할 수 없다.
4차원 개별자, 최소 존재론으로서 형이상학을 요청하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반실재론, 상대주의, 나아가 유아론에 빠지게 되는가? 내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지식만으로도 유아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과학적 탐구를 통해 인간이 살지 않던 시기에도 생명체들이 존재했음을 알고 있고, 지구 밖에 지구 따위는 하나의 먼지만도 못하게 만드는 광활한 우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을 넘어선, 주관성과 대비되는 객관적 세계와 지식에 대한 필요성을 우리의 언어와 경험 속에서 배운 바 있다. 다만 그 객관성이 우리의 언어를 벗어나 특수한 존재자를 상정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할 뿐이다.
데이비슨은 자신의 삼각측량 논증을 통해 주관성, 상호주관성, 객관성 이 세 가지 모두가 인간의 지식의 필수요건이며 이 세 요소들은 서로 상호의존적이면서도 계층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였다. 그리고 이를 밝혀내는데는 비언어적인 형이상학이 전혀 요청되지 않는다. 우리는 주어진 언어만으로 우리 자신을 넘어선 존재들이 있고, 객관적 자연과 타인의 마음을 구분해낼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왜 우리의 성공적인 인식활동과 언어적 활동을 규정하는 "설명력 없는 존재자"를 상정해야 하는지 납득하기가 어렵다.
물론 백도형은 이런 지적에 대해서도 염두를 두고 반박을 한다. 다음의 인용을 보라.
관념론이나 반실재론의 경우처럼 인식론을 넘는 존재론이나 형이상학이 무의미해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 논의는 세계를 포괄적으로 보는 이론을 구성`완결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초기 작업이나 마무리 작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형이상학은 탐구 초기 작업으로서도 필요하고, 또 과학이나 과학 탐구 성과들에 관한 일관적인 해석과 이해를 위한 마무리 작업으로서도 필요하다. 양자 역학에 관한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ㅎ과학의 논의조차도 우리의 직관과 완전히 조화하면서 일관성을 갖춘 해석을 제시하는 데에 아직 충분히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현대 과학의 성과를 이끌어내고 재해석하는 형이상학의 사변적 작업은 과학적 세계관의 구성에 중요한 기여가 된다고 생각한다. 4차원 개별자론이 비록 최소 존재론이기는 하지만 그런 점에서 중요한 의미와 시사를 줄 수 있는 형이상학이 될 수 있다.
같은책, 404-405
결국 백도형은 형이상학이 세계에 대한 포괄적 이론을 구성하는 구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지키기 위해 형이상학을 지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속성 보편자 유명론을 전개하는 백도형이 이런 형이상학을 수호하고자 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4차원 개별자론은 개별자 그 자체로는 아무런 설명력을 가지지 않고 인간의 언어적 인식활동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언어적 전회를 꾀한다. 결국 백도형의 형이상학은 일종의 구성적 형이상학이라기 보다는 비트겐슈타인, 맥도웰의 침묵주의, 치유적 철학에 더 잘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굳이 4차원 개별자라는 존재자를 상정하고 요청할 필요 없이, 언어를 넘어선/언어에 포섭되지 않는 실재를 가정하는 속성 실재론자들에게 입증 책임을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세계를 포섭하는 형이상학적 이론을 구축할 수 있다는 야심을 버리면 우리는 진정으로 각 개별 학문들의 논의로 전향할 수 있다. 물론 그러면 상대주의에 빠지고 과학이 무한히 늘어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애초에 4차원 개별자론도 그런 무한히 과학의 수가 늘어나고 학문의 수가 늘어나는걸 방지할 수단이 없다. 왜냐하면 4차원 개별자 자체는 아무런 설명력도 없기에, 당연히 학문의 기준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말해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보편자로서의 속성 실재론, 그리고 김재권/암스트롱의 환원론과 제거주의에 대한 백도형의 비판이 모두 성공했다고 가정하면 결국 심리철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부당한 존재론적 가정에 서서 논의가 전개됐다는 것을 폭로하게 된다. 많은 학자들에게 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고, 또한 심리철학의 전제가 되는 형이상학의 거부가 진리에 대한 포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것들이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말마따나 "철학적 불안"의 증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