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과 객체에 대한 관점을 바꾸면 된다고?!: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과 티모시 모턴의 『하이퍼객체』에 대한 단상

기술철학 교양 수업에서 다루어야 하는 주제 때문에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을 오랜만에 다시 보고 있습니다. 베넷은 물질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바뀌게 되면, (특별히, 동물과 식물뿐만 아니라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나 무기물까지도 행위자로서 고려할 수 있게 되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환경 문제를 현재보다도 더욱 급진적으로 다루기 위한 전략을 구상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세우는 것으로 보여요. 말하자면, 물질성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통해 거대한 실천의 변화까지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죠.

"이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건, 환경주의와 생기적 유물론이 각각 서로 다른 정동을 불러내고, 서로 다른 활용의 역사를 가져온다는 점 그리고 그로 인해 서로 다른 공중을 촉발하리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환경주의를 통해 모인 공중에게 비인간은 이미 수동적인 환경이나 인간의 행위를 제한하고 그에 저항하는 맥락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들이 동물, 식물, 무기물을 참된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그에 비해 더 유물론적인 공중은 더 많은 지구의 존재들을 행위소의 무리에 포함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환경주의자가 자신을 지구 위에 사는 존재로 여긴다면, 생기적 유물론자들은 자신을 지구로서,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라 말할 수 있는 다양한 물질들의 역량과 한계('특징적 인상'jizz)에 주의를 기울이는 존재로서 여긴다. 환경주의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생태계 보호와 그에 대한 현명한 관리를 요청한다면, 생기적 유물론자는 우리 자신이라 할 수 있는 강력한 물질성이 행위적 배치 내에서 우리와 부딪히고 대립한다는 이유를 들며 그러한 물질성에 전략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문성재 옮김, 현실문화, 2020, 272-273쪽.

"예를 들어, 내 팔꿈치 안쪽은 "최소 여섯 종류 이상의 박테리아가 거주하는 특별한 생태계이자 풍부한 서식처다. (…) 그들은 피부에서 만들어지는 날것 그대로의 지방질을 처리하면서 피부에 수분이 공급될 수 있도록 한다. (…) 인간의 미생물군 유전체에 잇는 박테리아는 인간 게놈에 있는 2만개 정도의 유전자보다 최소 100배나 많은 유전자를 집단적으로 가진다." 그것이 중심을 수로 압도하는 것이다. 생동하는 물질의 세계에서는 단지 우리가 '체화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신체들의 배열이며, 중첩된 일련의 미생물군 유전체에 있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신체들이다. 만약 더 많은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더 자주 인식한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필연적인 이질성에 주목하게 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와 같이 무분별한 생산과 소비를 지속할 수 있을까?"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문성재 옮김, 현실문화, 2020, 276쪽.

그렇지만 저는 환경 문제 같이 정치-경제-기술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거대한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단순히 '관점'의 변화를 강조하는 베넷의 입장이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피상적이라고 여겨져요. 애초에 베넷이 제시하고 있는 '생기적 유물론'이라는 관점이 딱히 대단히 새로워 보이지도 않고요. 이미 1962년에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이라는 유명한 환경학 고전을 쓴 이후로, 생태계가 대단히 복잡한 그물망으로 얽혀 있어서 인간이 '신의 관점'에서 생태계를 손쉽게 조작할 수 없다는 생각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되었죠. 인간을 중심으로 생태계를 완벽하게 조작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생물학자, 환경학자, 철학자가 도대체 누가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로요. 그런데도 환경 문제가 카슨 이후로 60년이 더 지난 오늘날까지도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성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복잡하게 얽힌 현실의 이해 관계와 권력 관계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지 않은가 합니다. 베넷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필연적인 이질성에 주목하게 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와 같이 무분별한 생산과 소비를 지속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하였지만, 저는 아주 심드렁하게 "얼마든지 지속할 걸요?"라고 대답하고 싶네요.

티모시 모턴의 『하이퍼객체』도 베넷과 비슷한 종류의 입장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나마 이 책은 적어도 철학사의 관점에서는 몇 가지 흥미로운 주장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네요. 사변적 실재론, 신유물론, 객체지향 존재론의 대표 인물들이 주로 후설과 하이데거를 '상관주의'와 '인간중심주의'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비난하는 것과 달리, 모턴은 후설의 현상학이 제시한 '음영(Abschattung)' 개념이나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에 나타나는 '마지막 신'에 대한 사유로부터 객체성에 대한 강조점을 읽어내고자 하거든요. 또, (다소 과장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오로지 현존재가 있는 한에서 존재가 '있다'gibt es"라는 하이데거의 구절이 자칫 인간중심주의로 해석될 수 있는 우려가 있다는 점을 꽤나 정당하게 지적하면서도, 하이데거가 단순히 '상관주의'라는 용어로만 규정되기는 어렵다는 것도 인정하고요.

"현상학자 후설의 획기적인 발견을 차용한 하이데거는 이 문제를 푸는 데 가장 근접했던 철학자로 보인다. 하이데거는 실체라는 컵케이크와 우연이라는 [컵케이크에] 뿌린 설탕가루가 (인간) 존재 혹은 그가 말한 현존재 내의 혼란이 빚은 '객관적 현존'의 산물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현존재 없이는 사물의 진실을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상관주의자며, 그에게 존재란 바로 현존재의 실존을 의미한다. "오로지 현존재가 있는 한에서 존재가 '있다'. … 존재자는 있다 혹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연 얼마나 더 많은 상관주의자가 필요할까? 램프는커녕 냉장고 그 자체가 오직 내가 문을 열 때만 존재한다는 식이다. 이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라는 버클리의 철학과 꼭 같지는 않지만 꽤 근사하다. 하이데거는 상관주의 내부에서 빠져나와 매우 깊은 곳까지 내려온 철학자다. 그렇지만 인간-세계 상관관계 밖으로는 나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철학적 핵심은 실재론이 아니라 관념론이다."

티모시 모턴, 『하이퍼객체』, 김지연 옮김, 현실문화, 2024, 33쪽.

하지만 저는 모턴의 입장도 결국 베넷과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턴은 '하이퍼객체' 같은 새롭고 화려한 용어를 사용해서 실체를 규정하려고 하고, '하먼'이나, '베넷'이나, '메이야수'나, '브라이언트' 등 2010년대 이후 철학계 스타들의 이름을 끊임없이 거론하고는 있지만, 주장하는 내용 자체는 철학적 '관점'을 변화시켜서 실천적 문제까지도 해결하겠다는 식의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 것 같아서요. 또 모턴이 전기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내용에도 전형적인 오해가 들어 있다고 보입니다. (a) 인간과의 관계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사물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이데거의 논제가 반드시 (b) '실재'란 인간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는 인간중심주의의 논제를 함의하는 것까지는 아니니까요. 하이데거도 그렇고, 그 후계자들도 그렇고, '사물 자체'와 '실재'를 결코 동일시한 적이 없는데, 모턴을 비롯해서 사변적 실재론, 신유물론, 객체지향 존재론 같은 진영의 철학자들은 둘을 너무 자주 혼동하는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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