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논쟁의 지형도

자유의지 논쟁의 지형도

우리는 자유의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자유의지를 이해할 때 차용하는, 혹은 선취하는 시선과 기준에 따라서 한 사태를 두고도 우리는 행위자의 자유로움에 대해 다르게 판단한다. 뿐만 아니라 자유의지를 평가하는 시선들과 기준들 사이의 우열을 직관적으로 나누어서, 어떤 선택이 더 자유로운지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학자들마다 분류하고 평가하는 방법이 달라서 도저히 합의되기 어려운, 그렇지만 각자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복잡한 사상의 지형이 형성된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다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이나 행위의 근원이 되는 능력을 행위자가 가지고 있을 경우, 그 행위자가 자유롭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 두 능력은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서로 모순적인 관계에 놓여 충돌하기도 한다.
프랭크퍼트의 유명한 예시를 살펴보면 이런 관계를 좀 더 명확히 볼 수 있다. X라는 미친 과학자가 LEE의 머리 속에 조작 기계를 LEE도 모르는 사이에 주입했다고 해보자. LEE가 티베트 독립을 지지하려고 하면, 이 조작 기계는 은밀하게 작동하여 LEE가 티베트의 독립에 반대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LEE의 티베트 독립에 대한 반대는 자기 자신에게서 근원한다. 따라서 LEE의 머리 속에 있는 이 조작 기계는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
이 경우 LEE는 다르게 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 LEE가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대안을 선택하려고 하면, 곧바로 조작 기계가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LEE는 자신이 조작당했다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 없이 티베트의 독립을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예시에서, 이런 조작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분명 LEE는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발휘하여 티베트의 독립을 반대하고 있다. 이런 예시를 두고, 많은 학자들은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일군의 학자들은 LEE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며, 다른 학자들은 LEE가 여전히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주장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런 의견의 불일치는 다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자유의지에 있어서 필수적인 기준으로 삼는지에 대한 입장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 다르게 할 능력이 자유의지에 있어서 필수적이지 않다고 보는 이들은 흔히 다르게 할 능력을 붙잡고 있는 이들이 선택지의 양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사실 선택지의 존재는 진정한 자유의지와 별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백화점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들의 종류가 많다고 해서, 나의 쇼핑이 더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오히려 선택이 행위자에게 비롯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LEE가 티베트의 독립을 이성적 숙고를 통해서, 혹은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신념에 의해서 반대하고 있다면, 다르게 할 수 없었음에도 그녀는 자유롭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런 비판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의심스럽다. 먼저 다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자유의지에 있어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그들의 주장에는 별 근거가 없다. 기껏해야 프랭크퍼트 사례에서 LEE가 다르게 할 수 없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는 직관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이 직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런 설명은 애초에 설득력이 없다. 전혀 다른 직관, 즉 다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자유의지에 필수적이라는 직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LEE는 자유롭지 않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혹은 다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강화된다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설명은 적어도 자유에 관한 우리의 일상적인 용법의 일부를 잘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은 다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그를 자유롭다고 직관적으로 평가하며, 다르게 할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나면 더 자유롭다고 직관적으로 평가한다. 이 직관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메타적인 접근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프랭크퍼트 사례로부터 LEE가 자유롭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다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자유의지에 있어 필수적이지 않다는 직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즉 부분적으로만 설득력이 있다.
조금 다른 시각에서 프랭크퍼트의 사례를 살펴보자. 프랭크퍼트 예시가 반드시 다르게 할 능력의 자유와 행위에 대한 근원성으로서의 자유의 대결로 읽혀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꽤나 다른 시각에서, 자유의지에 관한 서로 다른 직관을 조명한다; 자유의지가 행위자로부터 근원한다는 좀 더 작은 범위 내에서도, 서로 다른 직관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해보자. 즉 우리는 프랭크퍼트의 예시가 선택과 관련된 인간의 고유한 특징과 자유로움이 연결되는 방식에 대한 직관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이해해볼 수 있다. 이를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선택과 관련된 고유한 특징에 대한 제약이 없을 때 그 행위자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이들은 인간의 선택과 관련된 고유한 특징으로부터 어떤 행위가 촉발되면 그 행위자를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나는 전자를 외연 중심적 접근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내연 중심적 접근이라고 부르기를 제안한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부분적으로 손상한 소프트웨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소프트웨어는 부분적으로 손상된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소프트웨어가 한 기능을, 예를 들어서 지뢰찾기 게임, 우연히 작동 시킬 수 있었다고 해보자. 누군가 이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지뢰찾기 게임을 실행한 경우, 이 소프트웨어는 분명 어떤 의미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프트웨어의 일부가 작동한다고 해서 이 소프트웨어에 손상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프랭크퍼트의 사례에 등장하는 LEE의 경우도 이 손상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지뢰찾기 게임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떤 이들은 조작 기계가 삽입되어 있으므르, LEE의 선택을 촉발하는 고유한 특징에 분명 손상이 있다고 판단한다. 선택과 관련된 LEE의 고유한 특징의 외연에 속하는 어떤 요소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LEE는 자유롭지 않다. 반면 어떤 이들은 LEE의 선택하는 능력이 비록 손상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마치 지뢰찾기 게임이 이 프로그램에 의해 작동한 것을 부정할 수 없듯, LEE의 고유한 능력이 발화된 결과임에 주목한다. 선택과 관련된 LEE의 고유한 특징의 내연에 속하는 어떤 요소가 문제없이 작동했기 때문에 LEE는 자유롭다. 같은 사례를 두고도 자유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극명하게 갈리는 것은 하나의 관점선취(외연 중심적 접근, 내연 중심적 접근)로 인해 비롯된다.
외연 중심적 접근과 내연 중심적 접근은 다르게 할 능력과 어떤 행위의 근원이 되는 능력을 평가할 때 각각 적용될 수 있으므로, 다르게 할 자유와 근원성으로서의 자유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묻는 것과 분리될 수 있다. 즉 어떤 행위의 근원이 되는 능력의 일부가 손상되었지만, 여전히 그 능력으로부터 어떤 선택을 해낸 경우, 그 행위자를 자유롭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직관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니코틴에 중독된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중독 증상을 겪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중독을 질병으로 인정한다면, 그는 온전히 자신의 행위의 근원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니코틴에 대한 욕구를 긍정하면서 자발적으로 흡연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 사람은 자유로운가? 이 경우에 어떤 접근을 중시할 것이냐에 따라서 그가 자유롭다고 평가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아주 보수적으로 말해도, 하나의 사태를 자유롭다고 평가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은 최소한 4가지이다. 다르게 할 능력에 대해 외연 중심적으로 접근할 것이냐? 내연 중심적으로 접근할 것이냐? 어떤 행위에 근원이 되는 능력에 대해 외연 중심적으로 접근할 것이냐? 내연 중심적으로 접근할 것이냐?
정리하자면, 다르게 할 능력이 없어도, 선택이 행위자로부터 근원하면 자유롭다고 평가할 수도 있고, 반대로 다르게 할 능력이 없으면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나아가 외연 중심적 접근과 내연 중심적 접근 중에 무엇이 더 적절한 방법인가에 대해서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선택하는 능력이 온전하지 않으면 자유롭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능력이 일부 발화되면 자유로운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 4가지 입장 중 하나를 선택하고 고정한 뒤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여러 특성들 중, 어떤 특성이 인간이 더 자유롭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다르게 등급을 매길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이는 어떤 선택이 행위자의 욕구에 따르는 경우도 자유롭다고 할 수 있지만, 그 행위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신념에 따라 욕구를 극복하여 선택할 경우 더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혹은 욕구에 대한 욕구, 즉 2차 욕구에 따라 선택할 수 있어야만 자유롭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자유의 질에 대한 입장 차이는 인간의 다양한 특성 중에 어떤 특성이 인간을 더욱 자유롭게 만드는지에 대한, 철학자의 고유한 인간관에 따라 거의 무한하게 달라진다.
이상의 논의들을 종합해볼 때, 자유롭다는 의미를 결정하고 평가하기 위해선, 자유로움에 대한 기준과 시선과 또 그들 사이의 우열에 대한 직관이 먼저 요구되고, 나아가 어떤 인간의 특성이 자유로움과 더 밀접한지에 대한 직관도 먼저 요구된다. 결국 구조적으로 이 문제는 서로 다른 직관 간의 논쟁이 붙을 때 끊임없는 순환논증에 빠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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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무엇을 자유롭다고 볼 것인지에 대한 기준과 시선이 전제될 때에야 비로소 자유의지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가 가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는 이 논의가 일종의 세계관(worldview) 만들기 작업이라고 봐요. 자유의지가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발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어떻게 믿고 있는지에 대한 일종의 '신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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