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오타와대학교 철학과의 이자벨 토마스-포기엘(Isabelle Thomas-Fogiel) 교수가 쓴 글이 흥미로워서 여기도 올려봅니다. 현대철학의 경향을 ‘실재론‘으로 규정하면서, 실재론이 결국 자기지시성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미래가 없어 보인다고 논증하는 내용이네요. 그런데 이 글에서는 현상학(마리옹, 로마노)과 비트겐슈타인주의(트레비스, 다이아몬드)도 전통적 의미의 ‘실재론‘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들이 일종의 진리 대응설적 실재를 상정하는 것처럼 설명하는데, 제 관점에서는 다소 의아하네요. 오히려 현상학과 비트겐슈타인주의야말로 토마스-포기엘이 제시하는 실재론 비판을 선취한 철학들이라고 생각해서요. 만약 실재론에 미래가 없다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소위 ‘존재론적 전회‘를 주장하는 분석 형이상학이나 사변적 실재론에 미래는 없을지언정, ‘언어적 전회‘를 주장하는 현상학과 비트겐슈타인주의의 미래는 밝을 것 같은데요?
Thomas-Fogiel 교수의 저서 『Le Lieu de l'universel』(2015)을 찾아봤습니다. 프랑스어 책이라 서문, 결론, 일부 장만 LLM 번역으로 읽어서 이해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올려주신 글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리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말은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인데, 이 발화가 문제인 이유는 주장하는 행위가 주장하는 내용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즉 주장하는 행위는 주장하는 내용을 넘어서는 것을 함축합니다. 저자는 이런 자기지시의 문제를 반성하는 것이 철학 고유의 작업이라고 보는 듯합니다.
저자의 진단은 현대철학이 이 문제를 잊었다는 것입니다. 근대철학 주체가 세계 바깥에서 세계를 마주 본다고 봤습니다. 20세기 철학은 이를 비판하며 주체를 세계 안에 넣었습니다. 저자는 후자를 '실재론'이라 부르는데, 바깥의 관찰자를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은 이미 주어진 세계나 언어이고, 그것이 우리 말의 타당성을 보증하는 역할을 맡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입장은 앞서 말한 자기지시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le philosophe qui prétend qu'on est situé à une place précise dans le monde et qu'on ne peut sortir de cette perspective n'est pas, en disant cela et au moment même où il le dit, un sujet qui est situé à un point dans le monde mais un philosophe qui pose (idéalement ou imaginativement) l'ensemble du monde pour pouvoir dire qu'il se trouve situé à l'intérieur.
우리가 세계 속 특정한 자리에 있으며 그 관점을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는, 그 말을 하는 바로 그 순간에는 세계 속 한 점에 위치한 주체가 아니라, 자신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하기 위해 세계 전체를 (이념적으로 혹은 상상적으로) 상정하는 철학자다.
(Claude 번역)
Isabelle Thomas-Fogiel, Le Lieu de l'universel, Paris, Seuil, 2015, pp. 93–94.
다만 후설은 예외입니다. 후설은 경험적 자아와 현상학적 자아를 구분했는데, 저자는 자기지시 문제 때문에 이런 반성적 거리가 있어야 철학이 가능하다고봅니다. 비판 대상은 이 거리를 버린 하이데거 이후의 프랑스 현상학(마리옹, 로마노 등)입니다(저는 프랑스 현상학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긴 하지만요...).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는, 『철학적 탐구』에서 주체의 자리를 일상 언어라는 '우리'가 차지하면 그 언어를 분석하는 철학자는 다시 자기지시의 문제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관되게 가면 철학을 그만두는 수밖에 없는데, 저자는 이렇게 철학을 포기하는 것 자체가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저자의 대안은 세계 바깥도 안도 아닌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어떤 '여기'에서 출발하지만, 무언가를 참이라고 주장하려면 다른 여러 관점을 통합해가야 하고, 그러한 사유를 보여주는 것이 헤겔이라는 주장입니다.
(사실 고전적인 자기반박 논법을 이리저리 변형하는 것의 반복이라는 생각이 다소 드네요.)
미래가 없다기에는... 여전히 주류가 아닌가 싶기도요?
주류가 곧 진리라는 말은 아니지만, death of x라고 이름 붙이려면 연구 프로그램이 많이 죽었다던가, 아니면 지지자들이 신진박사들사이에서는 많이 사라졌다던가 해야할거 같은데, 둘다 아닌거 같긴하네요. (물론 시선을 끌기 위한 레토릭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