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행동주의란 심적 상태가 일련의 행동 성향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가령 "나는 고통을 느낀다"라는 명제가 있다면 여기에 대응하는 일련의 행동들의 목록이 있고 이것들이 고통이라는 심적 상태에 규칙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2) 방법론적 행동주의를 서술하시오.
방법론적 행동주의란 관찰 불가능한 심적 상태를 언급하지 않고 관찰 가능한 행위들로 심적 상태에 기반한 행위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일종의 방법론적 규제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3) 검증주의 의미 이론은 무엇이며, 이 이론이 어떻게 철학적 행동주의를 지지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가?
검증주의 의미 이론이란 한 명제의 의미란 검증 가능성으로부터 나오며, 여기서 검증이란 감각을 통한 관찰과 필요충분조건이다. 이 검증주의 의미론을 받아들인다면 심적 상태를 관찰가능한 외적 행위에 대응시켜야 한다는 철학적 행동주의의 아이디어를 지지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4) 엄청난 초금욕주의자의 예와 완벽한 연기자 사례를 서술하시오. 이 예들이 어떻게 철학적 행동주의에 대한 반론을 형성하는지 설명하시오.
엄청난 초금욕주의자 예시란 고통을 느끼더라도 특정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교육받는 공동체의 일원이 있을 경우, 행동 성향은 고통의 필요조건이 아니게 된다는 행동주의에 대한 반대 예시다. 그리고 완벽한 연기자 사례란 전혀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보고 고통이 일어날만한 상황에 고통에 대응하는 행동 성향을 보일 경우를 의미한다. 이 경우 행동 성향은 고통의 충분조건도 아니게 된다. 즉 심적 상태를 행동 성향과 일정하게 대응 시켜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규명하고자 했던 철학적 행동주의의 기획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5) 과학은 관찰 불가능한 것을 가정하지 말아야 하는가?
과학은 관찰 가능한 것만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관찰 불가능하지만 예측 가능하고 실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정될 수 있다. 가령 전자는 관찰 불가능하지만 과학에서 존재한다고 가정된 상태이다.
(6) 그림(또는 그림과 더불어 관람자의 이전 경험)이 관람자로 하여금 '와우!'라고 말하게 할만한 성향을 틀림없이 갖고 있다고 하면 무언가 잘못된 것인가?
설사 그런 설명을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그 설명이 받아들여져야 할지에 대해 나는 부정적이다. 가령 같은 그림을 보고도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각자의 지난 경험들이 각자 다른 행동 연쇄를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각 경험이 어떤 방식으로 다른 경험을 불러일으켰는지에 관한 끝없는 설명을 부가해야 하고, 이는 무한퇴행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될 뿐이다.
(7) 본유 지식이 존재한다면 방법론적 행동주의가 어떻게 곤란에 처할 것인가?
우리가 외부에 반응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경험에 의해 결정된다고 방법론적 행동주의는 가정한다. 그러나 본유 지식 내지는 선험적 지식이 존재할 경우 이 가정이 무너지게 되므로 관찰가능한, 경험 가능한 대상만 다루어야 한다는 방법론적 행동주의가 성립하지 않게 된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초금욕주의자’와 '완벽한 연기자’가 행동주의에 대한 반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결국 그 사람들이 '초금욕주의자’이고 '연기자’라는 사실조차 그 사람들이 한 행동을 통해 폭로되는 거니까요. 즉, t1 시점에서 초금욕주의(혹은 연기)를 감당하다가 t2 시점에서 그 행동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하면, 우리는 그때 "저 사람은 '초금욕주의자(혹은 연기자)'였구나!"하고 깨닫는 거죠. 만약 그 사실이 행동으로 폭로되는 시점 tn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초금욕주의자’가 아니라 그냥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일 뿐이고, '연기자’가 아니라 그냥 고통을 느끼는 사람일 뿐인 거고요.
저도 이런 연기자나 초금욕자 사례는 행동주의에 대한 결정적 반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그런 소위 "튀는 사례들"이 발생한다고 해도 행동주의 측에서는 검증체계를 보완하면 그만이라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행동주의를 이런 사례들로 반박하는 것보다는 (6)번에서 제기한 행동주의가 야기하는 검증과 설명의 무한퇴행, (7)에서 나온 경험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 선험적 지식에 대한 논의가 행동주의에 대한 더 직접적인 반박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적 행동주의에 따르면, 몸에 일정한 일이 벌어질 때 우리가 일정 방식으로 행위하려는 성향이 바로 고통이다.>
즉 심적 상태는 행동(검증가능하니까) 성향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컨대, 복부 고통이라는 심적 상태는 복부를 쥐어잡고, 제대로 걷지 못하는 등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의 관점이 철학적 행동주의에 대한 설명이 맞고, 이를 반박하려면,
'복부를 쥐어잡고, 제대로 걷지 못하는 등의 행동은 고통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라는 논증을 구성하면 철학적 행동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초금욕주의자가 반박의 사례로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초금욕자 사례는 고통이라는 심적 상태가 (64페이지 중간 단락에서 암시하듯) '욕망'이나 '신념'에도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니까요.
저는 초금욕자 사례가 정말 고통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 어떤 행동적 특성도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이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단서가 단 하나도 없지만, 오직 내적으로만 고통을 느낀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과연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초금욕자도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면, 우리는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는 내적 상태 내지는 개념, 사적 언어까지도 다 가능한 것이라고 허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전적으로 내적인 상태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런 개념을 상정한 비판이 적절하지 못하다라는 점을 지적했던겁니다.
저도 초금욕자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고통, 공포 등의 심적 상태를 갖는지 의심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사례에서 외과전문 의사선생님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사람 몸을 갈라서 나오는 것(그 빨갛고 움찔거리는 것)들에 대한 공포가 엄청 심하기 때문인데요. 저는 마치 외과전문 선생님들이 초금욕주의자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그것을 피하는 행동 성향을 보여야 할 것 같은데, 외과 선생님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외과선생님이 그와 같은 것에 대한 심적 상태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는 다양한 기준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가령 접근 의식과 같은 방법으로요. 물론, 그 심적 상태에 관한 확실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행동이 그 기준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점에서 행동주의가 단지 행동을 기준으로 심적 상태의 필요충분 조건을 구성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금 의아한 것이 그런 방식으로 초금욕자의 가능성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이미 행동주의를 전제하는 순환논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게 맞다면 초금욕자의 가능성을 허용하는 것은 사적언어를 허용하는게 아닌 독백을 허용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행동주의는 선험적 지식이나 관찰불가능한 대상을 가정할 수만 있어도 반박됩니다. 제가 초금욕자 사례를 사용하기 꺼린 이유는, 제가 봤을 때 초금욕자나 완벽한 연기자 사례는 행동적 관찰은 물론 언어적으로도 전혀 고통의 상태가 전달되지 않을 수 있는, 순수하게 내밀한 내적상태를 가정하는 것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물론 언어(개념)와 행위에 대한 보다 엄밀한 해석이 있어야겠지만, 제 소견으로는 행동주의와 초금욕자 사례 둘 다 고통의 통약가능성, 개념성에 대해서는 망각한 채 행동의 차원에만 매몰되어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관점을 유지하려는 행동주의자는 초금욕주의 논증을 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초금욕자라고 하는 사람은 고통을 가진 적이 없소. 그런 성향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오."라고 말하면 되고,
마찬가지로, 완벽한 연기자 논증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는 고통스러웠소. 그렇게 행동하는 성향이 바로 고통이기 때문이오."라고 말하면 그만이겠네요. 그들의 행동이 비록 욕망이나 신념에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겠네요.
결국 행동주의를 반박하기 위해서 초금욕주의자나 완벽한 연기자 논증을 펼치려면, 심적 상태에 관한 다른 전제가 먼저 필요하겠네요. 예컨대, "고통은 그렇게 행동하려는 성향이다."를 반박하는 주장에 서로가 동의한 후, 그 전제가 바탕이되어야만 초금욕자 혹은 완벽한 연기자 논증이 이에 대한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통은 그렇게 행동하려는 성향이다."라는 주장이 참이 아니라는 데 서로 동의한다면, 철학적 행동주의를 옹호할 이유도 없어지겠네요. 따라서, 철학적 행동주의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