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일 수 없다는 논증에 대한 베나타의 대응

https://blog.naver.com/eric970/224392869371

존재하는 것이 해악일 수 없다는 논증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1) 어떤 것이 누군가에게 해악이 되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처지를 더 나쁘게 만들어야 한다.

(2) 그 '더 나쁜' 관계는 두 상태 사이의 관계다.

(3) 따라서 누군가가 어떤 상태에서 처지가 더 나빠지려면, 그 어떤 상태와 비교되는 대안적 상태는 그 누군가를 덜 나쁘게 하는 상태여야 한다.

(4) 그러나 비존재는 그 누구도 처할 수 있는 특정한 종류의 상태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와 비교될 수 없다.

(5) 따라서 존재하게 되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는 것보다 더 못할 수 없다.

(6) 따라서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해악일 수 없다.

이 논증에 대해 베나타는 두 가지 방식의 대응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전제 (1)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베나타에 따르면 대안이 나쁘지 않고, 어떤 상태가 그 사람에게 나쁘기만 하면 충분히 해악이라고 할 수 있다. 살 가치가 없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해악이다.

두 번째 대응(주1)은 (4)를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삶을 살 가치가 없다고 여겨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존재하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할 수 있다. 즉, 존재하지 않기를 살아가기보다 선호할 수 있다. 삶이 너무 나빠 존재하기를 중지하는 것이 선호할만하듯, 삶이 너무 나빠서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이 더 선호할만할 수 있다.

두 대응은 모두 '존재한 적 없음은 존재와 비교될 수 없으므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해악일 수 없다'는 논증에 대한 적절한 반박이다. 첫 번째 대응에 따르면 해악은 반드시 더 나은 대안 상태와의 비교를 요구하지 않으며, 그 상태 자체가 그 사람에게 나쁘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해악이다. 두 번째 대응에 따르면 우리는 삶이 너무 나쁠 때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쪽을 선호할 수 있듯이 존재한 적 없기를 선호할 수도 있으며, 이는 비존재가 존재와 비교될 수 없다는 전제를 흔든다. 따라서 이 논증이 비교 불가능성에 기대어 존재의 해악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1. 정확히는 조엘 파인버그(Joel Feinberg)를 베나타가 인용한 것이다.
7개의 좋아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i) 베나타의 첫번째 대응에서 해악이 대안과 '비교함 없이' 그 자체로 해악일 수 있다면, 애당초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그의 결론적 주장에도 이러한 원칙은 적용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존재(태어남)와 비존재(태어나지 않음)를 '비교함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삶이 너무 나쁠 때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쪽을 선호할 수 있듯이 존재한 적 없기를 선호할 수도 있으며, 이는 비존재가 존재와 비교될 수 없다는 전제를 흔든다.

(ii) 그리고 두번째 대응에 대한 위의 구절에서 베나타는 우리가 삶이 너무 나쁠 때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쪽을 선호하는 경우와 애초에 태어나지 않은 경우의 질적 차이 및 논리 구조의 차이를 무시하는 오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비존재로 나아가는 것과,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베나타의 반출생주의 주장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인데, 이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선택을 한 경우를 근거로 들어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 베나타의 두번째 대응에 의해 존재와 비존재를 비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의해 자동적으로 '출생하지 않은 것이 더 선호할 것'이라는 주장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iii) 결론적으로 베나타의 주장은 일관되지 않은 점들이 있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