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일 수 없다는 논증에 대한 베나타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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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것이 해악일 수 없다는 논증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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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것이 누군가에게 해악이 되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처지를 더 나쁘게 만들어야 한다.

(2) 그 '더 나쁜' 관계는 두 상태 사이의 관계다.

(3) 따라서 누군가가 어떤 상태에서 처지가 더 나빠지려면, 그 어떤 상태와 비교되는 대안적 상태는 그 누군가를 덜 나쁘게 하는 상태여야 한다.

(4) 그러나 비존재는 그 누구도 처할 수 있는 특정한 종류의 상태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와 비교될 수 없다.

(5) 따라서 존재하게 되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는 것보다 더 못할 수 없다.

(6) 따라서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해악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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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증에 대해 베나타는 두 가지 방식의 대응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전제 (1)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베나타에 따르면 대안이 나쁘지 않고, 어떤 상태가 그 사람에게 나쁘기만 하면 충분히 해악이라고 할 수 있다. 살 가치가 없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해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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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대응(주1)은 (4)를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삶을 살 가치가 없다고 여겨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존재하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할 수 있다. 즉, 존재하지 않기를 살아가기보다 선호할 수 있다. 삶이 너무 나빠 존재하기를 중지하는 것이 선호할만하듯, 삶이 너무 나빠서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이 더 선호할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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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대응은 모두 '존재한 적 없음은 존재와 비교될 수 없으므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해악일 수 없다'는 논증에 대한 적절한 반박이다. 첫 번째 대응에 따르면 해악은 반드시 더 나은 대안 상태와의 비교를 요구하지 않으며, 그 상태 자체가 그 사람에게 나쁘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해악이다. 두 번째 대응에 따르면 우리는 삶이 너무 나쁠 때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쪽을 선호할 수 있듯이 존재한 적 없기를 선호할 수도 있으며, 이는 비존재가 존재와 비교될 수 없다는 전제를 흔든다. 따라서 이 논증이 비교 불가능성에 기대어 존재의 해악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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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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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확히는 조엘 파인버그(Joel Feinberg)를 베나타가 인용한 것이다.
7개의 좋아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i) 베나타의 첫번째 대응에서 해악이 대안과 '비교함 없이' 그 자체로 해악일 수 있다면, 애당초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그의 결론적 주장에도 이러한 원칙은 적용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존재(태어남)와 비존재(태어나지 않음)를 '비교함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삶이 너무 나쁠 때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쪽을 선호할 수 있듯이 존재한 적 없기를 선호할 수도 있으며, 이는 비존재가 존재와 비교될 수 없다는 전제를 흔든다.

(ii) 그리고 두번째 대응에 대한 위의 구절에서 베나타는 우리가 삶이 너무 나쁠 때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쪽을 선호하는 경우와 애초에 태어나지 않은 경우의 질적 차이 및 논리 구조의 차이를 무시하는 오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비존재로 나아가는 것과,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베나타의 반출생주의 주장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인데, 이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선택을 한 경우를 근거로 들어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 베나타의 두번째 대응에 의해 존재와 비존재를 비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의해 자동적으로 '출생하지 않은 것이 더 선호할 것'이라는 주장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iii) 결론적으로 베나타의 주장은 일관되지 않은 점들이 있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