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넥톰, 뇌의 지도] 승현준, 김영사 (난잡함, 극히 일부 내용)

[~] : 직접인용이다. 이런 식으로 표기한 것 이외에도 표기되지 않은 직접인용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표기된 직접인용은 필자가 생각하기로 의미상 중요한 것 같아서 인용하고 따로 표기한 것이다. 아니면 이해가 안 가거나 하여 지엔에서 언급하려고 그리 한 것이다.

기울어진 글씨: 원문, 책에서 강조 표시가 되어있는 부분이다.

지엔:~ : 필자의 생각, 대게는 의문들. "의문:~" 이라 하면, 의문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부적절한데, "생각:~" 라 하니 그것도 좀 이상한 것 같아서, 그냥 아는 캐릭터 이름을 따 온 것이다.

"...": 점 새 개로 문단 나누기 비슷한 것을 한 것은, 지엔과 요약을 나눈 것으로서, 지엔에 관심이 없다면 그 점을 바로 넘어가서 다음 단락을 읽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요약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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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엔
지엔
지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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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글"

이런 식이다.

  • 커넥톰 책의 437페이지 중 초반 극 일부 페이지 정도만을 다루고 있다. 여담으로 나에게는 책을 찍먹하기만을 반복하는 안 좋은 습관이 있다. 만일 내가 조금이라도 이것을 더 붙잡고 있게 된다면, 후속 글이 게시될 것이다.

이 글을 학원 자습실에서, 밑에 수학 교제와 영단어 프린트를 깔고 쓰고 있는데, 아무래도 좋은 학생이나 학자가 될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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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엔: 이 책을 알게 된 경위는 부친이고, 읽게 된 이유는 자아와 인간 정신의 작동원리에 대한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활용가능하고 유용한 지식을 얻고자함(또 그 지식을 구하게 된 경위는, 그닥 없다. 그저 많은 것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이다.)과 동시에 그런 "수단적 지식"의 습득(어떤 활용이나 작럽를 위한 도구로서 지식을 필요로 함) 이전의 인간 정신과 우리가 사용하는 관념의 구성과정 차원의 연결, 그 외의 내가 떠올리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연관성에 대한 궁금증이다. 후설이 비판한 심리학주의적 관점과도 연관이 있다. 소소하게는 하던 게임에서 뇌, 자아, 기억소거, 존재 동일성과 연속성 등이 나와서 더 궁금해진 것도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음으로서 내가 인간 정신과 관념의 구성, 관념적 사고의 특징에 대한 뇌과학 언어로의 환원, 자아에 대한 물리적 환원가능성 등을 알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는 철학적으로도 자아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 제시일 것이며, 설령 그것이 후설이 비판한 대로 순환적 설명의 문제를 띄게 되더라도, 철학적 탐구를 포함한 다양한 인간 정신 활동과 관념에 대한 규범적 조언의 단초가 될 것이다.(라는 희망사항이 존재하며 그렇게 믿는다.) 나는 이것이 사회, 소통, 언어, 정신 등에 대해 관념적 모델링을 중심으로 하는 철학에게 실증적 토대를 일부 제공할 것이라 생각하며, 특히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변이나 하버마스의 상호주관성 등에 대한 어떤 영감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철학적 용어나 이론, 도식화된 관념적 모델링 체계와 그 체계가 포착하는 현상에 대해 그들을 물리학이나 신경과학 같은 실증적 학문을 이용해 번역하고 활용에 더 용이한 형태로 환원하는 것은 꽤 괜찮은, 아니 아주 좋은 학제간 연구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이 글을 읽는 과학 세계와 인문학 사회에 대해 모욕적이거나 멍청한 소리로 들리자 않기를 바란다. 나는 철학이 그 직관을 모델링하고, 관념과 경계를 설정하고, 범주화하고, 도식화하는 것에서 가장 최고의 학문이라 생각하며, 그런 정교화된 직관을 관점 삼아 실증적인 연구를 진행해보는 것은 유용하리라 생각한다. 다만 그 관념적 모델이 틀려서 연구에 혼선이 생기거나 할 수도 있지만. 직접 연구를 안 해봐서 더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 기대가 있을 뿐이다.

지엔: 관련된 논의들에 대해, 내가 알고 있고 생각하는 것들을 먼저 적어보도록 하겠다. 그러나 잘 아는 것은 절대 아니고, 필자는 철학적 탐구 능력이 매우 아주, 정말로 끔찍한 수준이며 필력과 논리적 사고력 역시 지극히 열등한 수준이라는 것을 부디 양해해주길 바란다. 그러니 이에 대한 비판과 조언은 모두 꼼꼼히 읽고 수용하도록 하겠다.

  1. 테세우스의 배와 동일한 개인 문제에 대해서 나는 어떤 예시를 들고자 한다. 배경적 자아(그 자체는 어떤 실채가 있어서 변하지 않는 경험하는 주체로서 존재하는 무언가 라고 알고 있음)로서 존재하고, 어떤 신기하고 불변하는 - 영혼과 같은 것을 상정하지 않을 때,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뻔하고 지루한 말을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인간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에서나(물리적 연장으로서의 정신) 판타 레이라는 말에 부합하는 상태에 있다.(상태에 있다는 말은 뭔가 조심스러운데, 마치 그것은 또 어떤 경험하는 배경적 주체 또는 무언가를 상정하고 - 변화 속에서도 그것을 그것이라 부를 수 있게 하는 실재적인 심지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서술해서 그것 자체가 논쟁이 되는 이 지점에서는 사용하는 것이 적합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적절한 대체 단어를 찾지 못했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를 분리해서 물을 수 있어 보인다.(진짜 둘이 분리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질문을 보면 느끼겠지만, 우리가 첫 번째 질문이 말하는 활동을 할 때 그 행동이란 것이 두 번째 질문을 하는 것을 아주 자주 또는 팔수적으로 포함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첫째는, "무언가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때 실제로 그 발화는 어떤 맥락들에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는가?(우리는 같은 사람이라 할 때 그 같다는 것을 어떤 의미"들"로 쓰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는 무엇을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언제(좋다는 것이 항상 어떤 목적 같은 맥락 속에 있다면) 좋은가?(무엇을 동일하다고 여겨야 하는가?)" 이다. 솔직히 나는 이 두 질문의 답을 모른다. 항상 뻔한 답만 생각나는데, 그 뻔한 답들이란 "동일하다고 여기는 것이 유용하다. 인상과 성질의 유지가 동일하다고 말해지는 조건이다. 물리적 신체와 어떤 정신적이 것이 바뀌었어도, 중요하다 느껴지는 무언가가 바뀌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렇게 느껴지면 그렇게 말해지기도 한다. 관습적인 것이다.." 이딴 것들이다. 하나같이 뻔하고 고루하기 그지없는 답들이다. 이딴 답을 내 입으로 내뱉을 때 내게 철학적 재능이 없음을 깊이 통감해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2. 빨간색과 감각질에 대한 유명한 사고실험에서, 나는 빨간색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빨간색을 실제로 보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빨간색, 감각경험이란 것은 물리적으로 환원 불가능하다는 것이 뭔가 이해가 안 갔다. 빨간색을 환원 가능하다 주장하는 = 감각질을 반대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빨간색을 볼 때의 그 느낌이 물리적 작용들로 완전히 환원 가능하다는 것이지 그것이 의식적인 어떤 지식으로 환원 가능하단 것이 아니다. 진짜 예를 들려면, 뇌에 전극이라도 붙여서 그들이 생각하는 빨간색을 보았을 때 활성화되는 시냅스 같은 것들을 인위적으로 켰을 때 그들이 실재로 빨간색을 볼 때와 같은 느낌을 받는지와 비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이 이런 것을 모를 것 같지는 않은데, 아마 내가 뭔가를 단단히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지식의 정의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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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중심 테제는 "자아는 커넥톰이다([당신은 당신 뉴런의 활동들이기 때문이다.])." 라는 것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적어도 앞 부분에서 자아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변이나 정의를 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모든 의식작용과 정신적인 특성을 커넥톰이라는 것으로 설명하고 환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느낌만은 알 것 같다. 여기서 커넥톰(connectome, 연결체)란, 뉴런 노드 간의 연결인 시냅스, 그 시냅스 연결의 *[총체]*를 말한다. 1000억 개에 달하는 뉴런들의 복잡한 연결망의 전체가 곧 커넥톰인 것이다. [시냅스를 통해 하나의 뉴런이 다른 뉴런에게 메세지를 보낸다.] 그 거대한 통신망, [배선도]가 바로 커넥톰이다. [이 용어는 게놈이란 용어처럼 완전성을 함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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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엔: [이 용어는 게놈이란 용어처럼 완전성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완전성이란 것은 전체성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문을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앞에서 커넥톰이란 것이 연결들의 총체를 의미한단 것을 말했고, 요약문에서는 생략했지만 게놈이란 것을 설명할 때에도 비슷한 뉘앙스를 풍겼다. [게놈과 마찬가지로, 커넥톰은 신경계에 있는 뉴런들 사이의 연결 전체를 일컫는다.] 요약하자면 뉴런 연결 총체가 커넥톰이란 것이다.

지엔: 이 책에서 하는 주장을 이해함에 있어서 자아 개념을 엄밀하게 철학적으로 정의하는 과정이 필요할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이해함" 이라는 것도 굉장히 많은 "이해"의 경우들을 함축하는 만큼 그렇다. 필요에 따라 좋은 이해와 부족한 이해가 갈리지 않겠는가? 물론 이해의 정도라는 것이 모든 영역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어떤 선형적인 단일 지표라면(타입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말은 우습게 될지도 모르겠다. 많은 부분이 철학적 담화를 위해 이 글을 읽는 만큼, 이 책에서 자아를 어떤 식으로 쓰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은 필요해 보인다. 그러니 한번 정의를 해 보겠다. 완전히 틀려먹은 끔찍한 분석일 수도 있으니 이 부분은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길 권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자아는, (뉴런 연결이라는 게 몸 전체 뉴런을 말하는 것인지 뇌만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외부 자극에 있어서 한 개체의 모든 의식작용과 행동을 결정하는 중간 메게변수, 변환기 같은 것으로 보인다. 특정 외부 자극이 특정 반응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고유의 함수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예: 떡볶이 -> 자아 f(떡볶이 정보) -> 맛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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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뇌는 어떻게 이 놀라운 일을 수행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예쁜꼬마선충이란 300여개의 뉴런, 7000여 개의 연결을 지닌 생물의 배선도를 그려낸 적이 있다. 그들은 인간과 달리 모든 개체가 동일한 뉴런 배치를 지니고 있었다.(시냅스 연결까지 동일한지는 모르겠다.) 개인이 고유하다는 통념과 일맥상통하도록, 우리의 뇌는 그들과 달리 [규격화]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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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엔: "그들은 인간과 달리 모든 개체가 동일한 뉴런 배치를 지니고 있었다.(시냅스 연결까지 동일한지는 모르겠다.)" 유전자가 개체의 뉴런 위치 배열, 배선도를 강제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인간에게도 그런 면이 있을지 궁금하다. 비트겐슈타인이 후기에 말한 "삶의 양식"이라는 개념이 인간 유전자 속 뉴런 배치에 대한 국소적 강제성과 연관되지 않을까? 인간 뉴런 배치는 어느 정도 강제되어 있어서 그 보편적인 뉴런 배열 구조가 우리 소통의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될 것 같은 직감이 드는 망상이 떠올랐다. 시냅스 연결이란 것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언어적 사고나 발화, 개념 범주화 단위로 이어지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마치 컴퓨터를 보며 "와 이 작은 전기 회로들의 개별 부품들이 어떻게 유튜브를 틀어주는 거야?"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복잡계의 창발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럼 왜 인간은 유전적으로 뉴런 배열이 집단 단위에서 전체적으로 강제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진화론적인 이유가 보통 이런 의문에 대한 설명으로 제시되는 것 같은데, 한번 찾아봐야 할 것 같다. 뉴런의 배치 같은 것은 후생적으로 바뀔까? 이런 것도 궁금해진다. 다만 경험상 나는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찾아본 후, 바로 까먹는 경우가 많다. 좋지 않다.

지엔: "[규격화]되어 있지 않다." 라는 것은 유전적인 요인으로 뉴런의 - 일부라도 - 배열이 집단 단위로 일치하는 현상이 없다는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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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의 게놈이라는 설명은 부족하다. 당신은 유아기에 학생 시절의 기억을 지니지 않지만 학생이 되어도 유아기의 게놈은 유지된다. 게놈만으론 이런 변화를 설명 불가능하다. 게놈은 임신 동시에 결정되며 변화하지 않지만 커넥톰은 다르다. 그것은 크게 4가지 방식으로 일생에 걸쳐서 변화된다. 신경과학자들은 그 기본 변화를 이미 유형화했다. 재가중(Reweightning), 재연결(Reconnection), 재배선(Rewiring), 재생(Regeneration)이 그것이다. 재가중, [뉴런들은 그들 간의 연결의 세기를 강화하거나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그 연결을 조정, 즉 '가중치를 변경'한다.] 재연결, [시냅스를 새로 만들거나 제거]한다. 재배선, [가지가 자라거나 축소됨으로서 재배선 된다.] 재생, [기존의 뉴런은 제거되고 완전히 새로운 뉴런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 네 변화는 유전자의 영향도 받는다. 뇌가 배선되는 유아기나 유년기에 특히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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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엔: 우리는 일생에서 많은 읽을 겪으며 살아간다. 목표 대학에 입학하거나, 연인을 사귄다든가, 사별이라거나, 군대라거나. 난 아직 하나도 겪어보지 않았으며, 몇 가지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하튼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믿던 것을 수정하기도 한다("뭐야 이거 좋은 건줄 알았는데 아닌듯"이런 층위의 수정). 다만 그 "수정"이라는 작업이 저 4R중 어떤 것으로 일어나는 것인지는 모른다. 저런 양식의 변화들 중 무언가가 일어나긴 하는데(몇 가지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게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동일하게 "신념 수정, 이별"이라 부르는 개별현상도 각기 다른 양식의 변화를 야기하는 현상일 수 있다. 그것은 외부 사건, 현상의 객관적 특성에 의해 보편적으로 도식화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개인차가 매우 큰 것일수도 있다. (두 사람이 같은 사건의 차원에서 같은 경험을 해도, 내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R이 생김. 심지어 둘이 같은 영화를 봐도 누군간 슬프고 누군간 짜증날 수도 있는데, 일어나는 변화의 양식은 같을 수도 있고...)만약 경험의 내용(관념적 언어로 표현되는 개인의 변화와느낀 점 등)에 따라서 일어나는 변화양식에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경험의 어떤 관념적으로 설명 가능한 특징에 따라서 규칙적으로 특정될 수 있고, 일어나는 뇌 차원의 변화양식의 차이가 개인의 인생에서 다른 방식으로 중요하게 하는 것이라면, 경험을 묘사하는 관념적 언어는 그 변화양식의 차이를 반영하는 묘사로 세분화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은 유용할 것인가? (예: 이 영화 너무 인상적이야 -> 이 영화가 내 무엇과 관련된 시냅스 연결을 재가중했어. / 만약 개인이 본인 안에서 무슨 R들이 발생하는지 인지 가능하다면)

지엔: 한 뉴런은 많은 연결에 동시에 속할 것 같은데, 떡볶이에 관한 연결에 해당하는 뉴런이 제거된다면 그 뉴런을 같이 쓰던 철학에 대한 연결도 변화하나? 즉, 완전히 무관해 보이는 두 가지가 개인 안에서 신경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상상하지도 못한 다른 영역에서의 격변이 일어나는 것도 가능한가? 두 완전히 무관해 보이는 연결이, 사용하는 뉴런의 겹침이 있다면 그것은 내용적으로 두 연결이 지칭하는 관념적 내용 간의 유관함을 의미할 수 있는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 개인 내에서 가지는 내용적인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이 가능한가?

지엔: 갑자기 든 생각인데, 새로 배운 지식이 시냅스 연결로 내부화(?)될 때 기존 시냅스 연결에 따라 구조화당해서 어떤 뉴런 쓸지 정해지는 거면 최초의 지식은 어떻게 자리잡는 거지? 그건 유전자 단계에서 주어진 선험적 연결이 있어서 그거 기반으로 들어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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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파트에서는 연결주의, 뇌 크기 등등에 대한 논변이 나온다. 특히 나는 내가 연결주의까지는 읽어봤으면 하는데, 내가 내 기대를 따라줄지는 모르겠다. 이 글이 유용하고, 영감을 주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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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입니다.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네요. 글이 좀 난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조언이나 비판 얼마든지 받겠습니다. 길고 난잡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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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질문을 던지면서 책을 읽고, 자신의 관점을 내용에 비추어 평가하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그래도 조금 더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주장해도 될 것 같네요. 너무 자기 자신의 지식이나 의견을 모질게 평가하진 마세요ㅎㅎ 특히 이 글에서는 "이해"가 단일한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는지, 뉴런의 시냅스 연결의 차이가 정말 질적인 차이와 변화를 동반하는지, 꽤 많은 부분에서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되고 있어서, 적어도 저는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각질에 대한 환원주의적 입장에서 겪으셨던 궁금증은 이렇게 얘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령, 빨간색인 무언가를 보았을 때, 내가 갖게 되는 그 '빨강'이라는 감각질이 물리적인 작용으로 환원될 수 있다면, 그것은 특정한 명제로 형식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빨강에 대한 감각질을 갖는다"라는 것은 "뉴런이 특정한 시냅스 연결 신호를 갖는다"라든지 또는 "특정한 신경 섬유가 특정한 방식으로 발화된다"라는 명제들로 말할 수 있다고 말이에요. 따라서 환원주의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빨강에 대한 감각질은 이론적인 지식으로 환원될 수 있다"라고 주장할거에요. 왜냐하면 보통 이론적인 지식들은 참과 거짓이 판명될 수 있는 문장인 명제들로 이루어지고, 이 경우 빨강에 대한 감각질은 명제로 환원될 수 있으니까요.

환원 불가능하다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그 이론적인 지식들이 실제 동일한 감각질 발생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죠. 그래서 글에 쓰셨던 것처럼,

이런 예시가

라는 주장을 뒷받침 하는 예시가 될 수도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내가 빨간색을 봤을 때 활성화되는 뉴런들이나 신경을 인위적으로 활성화시켰을 때, 내가 빨간색을 볼 때 갖는 감각질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겠죠. 그렇다면 "빨강에 대한 감각질을 갖는다"라는 것은 "뉴런이 특정한 시냅스 연결 신호를 갖는다"라든지 또는 "특정한 신경 섬유가 특정한 방식으로 발화된다"라는 명제들로 환원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제가 아는 한에서 이 정도 얘기를 했으니, 심리철학에 대해 저보다 더 잘 아시는 분들이 마저 댓글과 설명을 이어주실거라 믿겠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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