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아르, 베유, 머독
이하영 선생님의 『선의 캐리커처』을 읽었습니다. 책을 구매한 것은 작년이었는데, 그동안 제 학위논문을 작성하느라 이제야 이 책을 제대로 완독하였네요. 윤리의 근거를 인간의 실존적 선택으로부터 정초하고자 하는 보부아르(S. de Beauvoir)의 '선택의 윤리학'과 세계의 신비적 실재로부터 정초하고자 하는 베유(S. Weil)의 '시선의 윤리학'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그 두 입장을 중재할 수 있는 길이 없는지를 찾는 내용입니다. 이하영 선생님은 그 두 입장 사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로 머독(I. Murdoch)을 내세우면서도, 머독조차 '선택'과 '시선'의 딜레마를 완벽하게 극복할 수는 없다고 지적하면서, 인간이 선의 내재성과 선의 초월성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길을 찾아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네요. 마치 에덴 이후의 인간이 '원죄'를 경험하고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신화와 유사하게도, 정답 없는 세상에서 선을 추구하려 하는 인간은 일종의 '원죄'처럼 자신의 무능력을 자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지만, 그 상황에서도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미약하더라도 선의 가능성이 주어질 것이라는 희망이 이 책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윤리학에서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혹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문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이 책을 매우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각각의 입장들은 이 책에서 제시되는 '선택의 윤리학'과 '시선의 윤리학' 혹은 '선의 내재성'과 '선의 초월성'이라는 개념에 거의 대응하니까요. 물론, '선택'과 '시선'이라는 개념은 서로 완전히 배제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들을 단순히 대립쌍으로만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또한, 둔스 스코투스와 플라톤, 키르케고르와 칸트, 사르트르와 레비나스처럼 각각의 진영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물들 역시 상대편 진영이 지닌 고민을 완전히 무시하지만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을 단순히 갈등하는 관계로만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다만, 넓은 틀에서 보자면,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폭넓게 공감될 수 있을 만합니다. '보부아르', '베유', '머독'이라는 이름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고 하더라도, 윤리학의 고전적 문제를 발판으로 삼아 그 인물들의 논의로까지 사유의 지평을 넓혀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선의 내재성과 선의 초월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상황을 이 책이 '신 없는 원죄'의 상황이라고 표현한 점이 공감되었습니다. 저는 윤리학이 이러한 '원죄'의 상황에 잘 주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평소에 종종 의심하였거든요. 가령, 저는 트롤리 딜레마 같은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 어떠한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문제들에 대해 '더 나은 선택'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도 무척 회의적입니다. 대부분의 윤리학은 딜레마 상황에서 어느 쪽을 구하는 것이 더욱 정당성을 지닌 선택인지를 이론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지만, 저에게는 그 딜레마 상황이 우리가 종종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죄'나 '악'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기도 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입니다. 우리의 선택이 '최악'이 아닌 '차악'이라고 해서 그 선택을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면, 우리는 그 딜레마 상황에서 "나는 그래도 좀 더 윤리적으로 나은 선택을 했다."라고 안도하기보다는 단순히 "나는 악한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이 최악이 아닌 차악이라고 해서 내 선택이 합리화되지는 않는다."라고 고백하는 편이 더욱 정직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악'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윤리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그 상황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우리가 '차악'을 마치 '선'인 것처럼 위선적으로 포장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로마서 7:24)라는 사도 바울의 탄식이 무척 진실되게 느껴집니다. (물론, 엄격하게 신약성서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구절이 무슨 윤리적 딜레마 상황 앞에서의 탄식은 아니긴 하지만 말입니다.)
다만, 저는 보부아르, 베유, 머독이 선의 내재성과 선의 초월성에 대한 논의를 풀어가는 방식에 완전히 공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적어도 저의 관점에서, 그 인물들의 논의는 지나치게 '직관'에 호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베유와 머독이 선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방식은 저로서는 거의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보부아르처럼 선을 단순히 인간의 실존적 선택으로 환원하고자 할 경우, 인간이 자신의 자의적 선택을 합리화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그들의 지적 자체는 정당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합리화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선'이 마치 저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비적 '실재'인 것처럼, 그리고 인간에게는 그 실재를 자각할 수 있는 일종의 '직관'이 존재하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상정합니다. 가령, "머독에게 실재는 베유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기획 이전에도 이미 규범적으로 울퉁불퉁[하다]."(이하영, 2025: 142)라는 말이 정확히 어떠한 의미인지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 자유는 존재론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선악을 이미 품고 있는 실재를 향한 침착한 주의를 통해 획득됩니다."(이하영, 2025: 148)라는 말도 의문스럽습니다. 도대체 실재가 어떻게 그 자체로 '규범적으로 울퉁불퉁'할 수 있고 '선악을 이미 품고' 있을 수 있을까요?
저는 베유나 머독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분석철학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사실/가치'의 이분법 같은 문제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재가 규범적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만 하는 입장은 적어도 저에게는 거의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동안 아무런 규범도 없는 순수한 '사실'이라고 상정한 대상들 속에 얼마나 우리의 '태도', '맥락', '지평'이 깊이 개입하고 있는지를 논증할 때에야 비로소 그 모든 사실이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깊이 관여된 '규범적 사실'이었다는 점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이러한 논증이 셀라스나, 데이비슨이나, 퍼트남이나, 맥도웰이나, 브랜덤 등 '후기 분석철학(post-analytic philosophy)'의 윤리학에서 강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인물들은 "실재는 규범적이다."라고 전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인 상태로부터 논의를 시작하기보다는, "실재는 규범적이지 않다."라는 전제를 철저하게 무너뜨린 상태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니까요. 순수한 사실, 순수한 법칙, 순수한 인과만으로 구성된 무균상태의 세계란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여, 우리가 그동안 '세계'라고 이해한 영역이 언제나 '규범'의 질서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니 말입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저는 베유나 머독이 그 자체로 틀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신비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 다소 불만을 느낍니다. 실재가 규범적이라는 베유와 머독의 매우 따뜻한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도, 그 주장의 아래에는 '사실/가치'의 이분법에 대한 후기 분석철학의 매우 차가운 개념적 분석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