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와 위대한 철학자들 - 스피노자 편 일부] 스티븐 리치 엮음, 필로소픽

이 책은 음

쉬운 대중서일 줄 알았는데요

전혀 아닌 거 같습니다.

제가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3가지입니다.

  1. 이런 식으로 읽는 게 맞나? 너무 안 읽히는데..

  2. 내가 이해력이 생각보다 안 좋나?

  3. 이 이해가 맞나?

에 대한 조언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 이 글의 전부는 아닙니다. 초반 읽고 쓴 것입니다.

[~] : 직접인용이다. 이런 식으로 표기한 것 이외에도 표기되지 않은 직접인용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표기된 직접인용은 필자가 생각하기로 의미상 중요한 것 같아서 인용하고 따로 표기한 것이다. 아니면 이해가 안 가거나 하여 지엔에서 언급하려고 그리 한 것이다.

~: 원문, 책에서 강조 표시가 되어있는 부분이다.

지엔:~ : 필자의 생각, 대게는 의문들. "의문:~" 이라 하면, 의문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부적절한데, "생각:~" 라 하니 그것도 좀 이상한 것 같아서, 그냥 아는 캐릭터 이름을 따 온 것이다.

"...": 점 새 개로 문단 나누기 비슷한 것을 한 것은, 지엔과 요약을 나눈 것으로서, 지엔에 관심이 없다면 그 점을 바로 넘어가서 다음 단락을 읽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요약글
.
.
.
지엔
지엔
지엔
.
.
.
요약글"

이런 식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스피노자와 삶의 의미

제니비브 로이드(Genevieve Lloyd)

지엔: 내가 이 글을 읽는 이유는, 요즘 내 삶의 주요한 화두가 된 강한 결정론 - 양자역학의 무작위성을 수용하지만 자유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양립불가론, 결정론이라 표현하면 어폐가 있긴 해 보이는 것 - 세계관 속 개인의 삶의 태도에 대한 단서나 조언을 얻기 위해서이다. 스피노자는 전통적인 결정론자이자 양립불가론자로서 나의 이런 사상적 상태에 대해 유효한 조언을 줄 것이라 기대한다. 다만, 사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결정론적 세계관이든 무엇이든 일단 삶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몸의 건강이나 안정적인 인간관계와 같은 요소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이 글은 내 상태의 "개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다만,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
.
.
논의에 앞서 스피노자는 이런 질문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의 그(스피노자)의 말들은 오히러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와 괴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다만, 그럼에도 그의 것들 중 몇몇은 이런 논의에 어울리는 통찰이다.
.
.
.
지엔: 일단 여기까지도 뭔지 잘 모르겠다. "괴리"란 것이, 스피노자가 그런 류의 실존적인 주제를 탐구하지 않았어서 마치 과학자에게 법조문 쓰는 법을 알려달라 묻는 것과 같은 타입이 어긋나는 질문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그런 질문들이 적절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어서, 그 질문 자체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졌어서, 그런 말을 한 사람에게 이런 질문(삶의 의미)을 묻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
.
.
우선 스피노자 사상 하에서 세계는 자애로운 신과 그가 하사한 아름다운 의미의 낙원과는 거리가 멀고, 세계는 우울하게도 [그 밖에도 안에도 목적이 없는 곳]이다. 그의 세계에서 자연을 초월한 상태로 의미를 주는 외적 존재는 없다. [그는 자유의지와 그 안에 담긴 목적성의 내포를 논박한다.] [대신 그는 인간의 삶을 모양 짓는 것으로서의 욕망이라는 풍요로운 개념을 반대급부로 제공한다. 그리고 기쁨은 그의 핵심 개념인 코나투스, 즉 계속 존재하고 하는 분투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
.
.
지엔: "[그 밖에도 안에도 목적이 없는 곳]"이란 말은 무슨 의미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 같은 것으로서, 세계가 어떤 정해진 목적과 그를 향한 의지를 지니지 않는다는 의미일까? 그런 의미라면 도대체 그것이 왜 나쁜 일인가? 세계에 그 목적의식이 있는지와 없는지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닥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계가 파멸(엔트로피 증가로 인한 빅 프리즈 같은 우주 종말 시나리오)을 목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해도, 인간은 그 안에서, 그 세계의 목적의식이 어떤 전략적 변수로서 고려될 순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떤 다른 자신만의 목적이나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사실 모든 삶의 의미라 할 것이 그래 보이기(어떤 우주의 목적 같은 것과는 그닥 관련없게) 때문이다.

지엔: [그는 자유의지와 그 안에 담긴 목적성의 내포를 논박한다.] 라는 것은 또 도대체 무엇인가? 자유의지를 논박하는 것은 상상이 가지만, "자유의지와 그 안에 담긴 목적성의 내포"라는 것은 또 무엇이고 그것을 논박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엔: [인간의 삶을 모양 짓는 것으로서의 욕망이라는 풍요로운 개념]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을 모양짓는단 것은, 인간의 삶의 형성하고 이끌어가는 어떤 원동력이나 근본적인 원리로서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욕망]이란 무엇인가? [욕망]이 이 글에서 말해지듯 어떤 형성하는 것이라면, 형성하는 것이 삶의 이야기와 어떤 행동을 결정하고 일어나게 하는 원초적인 힘이자 경향성이란 의미라면, [욕망] 역시 그런 의미인가? 예를 들어, 식욕이라는 욕망이 그 원초적인 원인으로서 떡볶이를 먹는다는 삶의 사건을 "형성"하는 것과 같은 것인가?
.
.
.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에 대한 답변으로 적절한 것은 "잘 사는 것은 이것이다"로는 부족한 것이다. [의미있게 사는 방법에 관한 처방을 제공하면서 삶의 의미라는 생각을 통째로 거부하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예를 들면, 삶의 의미는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넓은 의미의 실존주의적 접근]인 대중적인 격언처럼 말이다. 진정한 답변이란, [인간 현존]에 대한 [일반적 진리]로서, 동기를 부여하고([아니 어쨌든 그런 방식을 모양 지어가는 것이자]), 희망을 주는 답변이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그것은 자유의지를 설정한 다른 답변들과는 다른 것일 것이다.
.
.
.
지엔: [의미있게 사는 방법에 관한 처방을 제공하면서 삶의 의미라는 생각을 통째로 거부하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에서 해고되는 삶의 의미라는 것은 어떤 외적 존재, 인격신으로 대유되는 초자연적 존재로부터 주어지는 삶의 의미로 보인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자, 어떤 발굴되거나 발견되는 것에 가까운 것으로서,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로서 주어진 삶의 의미를 의미하는 듯 한데, 그게 해고되지 않는 실존적 의미로서의 삶의 의미와 어떤 차이가 - 그 의미의 내용적인 것에서 -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성격 탓에 외부 존재를 베재하고 삶의 의미를 논하고자 이런 대목을 추가한 것 같다.

지엔: [인간 현존]에 대한 [일반적 진리]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특히 실존이 아니라 [현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면에서 그러하다. 현존과 실존의 구체적 차이는 잘 모르겠고, 원문이 없어서 대조는 못 했지만, 번역 실수일 수도 있지만 좀 걸린다. 다만 앞에서 인간 실존에 대해 언급하며 [넓은 의미의 실존주의적 접근]이라고 말했는데, 내가 알기로는 실존주의는 어떤 개별적이고 주관적이고 시적인 진리같은 것을 중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일반적 진리]라는 것이 어떻게 병치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쓰다보니, 현존이라는 단어 선택이 그런 모순을 회피하기 위한 단어 선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엔: 저자는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도출하는 작업에서 그 결과물이, 저렴한 비유지만, 어떤 동기부여 명언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
.
.
그런 답변에는 초자연적인 것을 상정하는 것과 아닌 것이 있는데, 초자연적 [틀]을 사용한 경우, [인간 삶 너머의 무언가를 분명히 가리킨다.] 신의 명령, 내세 등등이다. 그게 아니라 [집단적인 세속의 목표를 향해 진보한다는 서사]일 수도 있다. [인간 종이 완벽해질 가능성에 대한 발상들도] [지금의 현실을 이상화된 미래 속에 포섭시킬 수 있다.] (이 뒤에는 노직의 이야기가 나오며,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에 대한 삶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다만, 모르겠다.)
.
.
.
지엔: [틀] 이란 무엇인가? 틀이라는 단어를 이용한 것은 앞의 [아니 어쨌든 그런 방식을 모양 지어가는 것이자]의 연장으로 보인다. 모양을 빗어내는 것이 [틀] 이니 말이다. [모양 지어가는]과 [틀], 이것이 그저 저자 특유의 비유인지, 진짜 스피노자의 핵심적인 워딩인지는 모른다. 다만, 저 비유같은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데미우르고스 같은 것일까?

지엔: [인간 삶 너머의 무언가를 분명히 가리킨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일단 [인간 삶 너머의 무언가]란 무엇인지, [가리킨다]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인간 삶의 의미를... 형성하는 틀이, [인간 삶 너머]의 범주 외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무엇일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여담

중2였나, 중3이었나 여기 처음 왔는데
어느덧... 고2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입시의 길은 답이 없군요.

그냥...대학이든 뭐든 포기하겠습니다.

++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제가 펼쳐본 거의 모든 파트에서 "이 사상가는 이 질문을 직접적으로 다룬 적이 없다." 라고 밝힌다는 겁니다. 전문가라서 좋네요. 책을 사기 전 전문성이 걱정되어 클로드에게 저자 목록을 보내줬는데, 각 분야의 전문가 중 전문가가 붙었다고 합니다.

6개의 좋아요

일단 철학 서적을 읽는 방법은 맞는 것 같습니다. 읽으면서 책의 내용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부분에서 비판을 하기도 하고, 본인이 갖고 있는 주제에 연결지어서 생각을 하기도 하니깐요.

철학적인 내용 면에서 봤을 때도 흥미로운 지점들이 몇 개 보입니다. 특히 이 부분이 흥미로운데요:

스피노자의 <에티카> E1append (첫번째 파트가 끝나고 나오는 appendix란 뜻입니다) 를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세계에 목적이 없다는 것을 스피노자가 명시하지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세계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흥미로운 지점은: 세계 (혹은 신) 가 목적이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목적을 갖지 못한다는 말도 될까? 입니다. 이 부분이 스피노자 학계에서 많이 다뤄집니다. Lin, Being and Reason 정도가 생각나네요. 또, 이 책의 제목이 왜 "에티카" 인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결정론이 사실이고 자유의지가 결정론과 양립하지 않는다면 -- 다시 말하면 자유의지가 없다면 -- 왜 이 책은 "에티카" 일까요? 제가 이해하기로 스피노자는 우리가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이 확실한데,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과 자유 같은 것을 얻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1) 형이상학적 결론을 내고 (2) 그 형이상학적 결론 속에서 행복과 자유를 어떻게 얻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작업 정도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부분을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습니다만, 도움이 될 수 있을만한 걸 적자면: (1) 양자역학은 결정론과 양립 가능하다는 것 (다시 말하면 결정론의 진실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 (2) 양립불가론이란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불가능하다는 테제라는 것, (3) 강한 결정론이란 세상의 시작점이 필연적이고 법칙또한 필연적이라는 형태의 결정론입니다.

3개의 좋아요

고등학교 2학년 분이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셨다구요......? 저는 그때 피시방가서 라면먹으면서 게임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이 부분은 스피노자 체계의 핵심적인 전제가 담겨 있는 부분이라 저도 아는 만큼은 (혹은 제가 안다고 착각하는 만큼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싶어 변변치 못하게 몇 자 남겨보려 합니다. 다만 인용하신 단락들은 작성자분이 원저자분의 글을 발췌요약한 것이고, 저는 원저를 읽어보지 않았으므로, 이를 염두에 두고 다음의 글을 읽어주세요.

아마 저 "틀"이란 단어의 원어는 "frame" 혹은 "framework"일 것 같습니다. 보통 철학적 맥락에서 framework는 "한 철학자가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거든요. 고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 답변이 어떤 틀에 기반하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누군가는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구요. 누군가는 "없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구요.

잘 보셨듯, 스피노자는 목적론도, "초자연적 틀"도 모두 거부하는 철학자입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인간이 가진 삶의 의미든 무엇에 대해서든) 무언가를 물을 때 그 답변의 틀이 하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며, 그 틀은 절대로 자연을 넘어설 수, 즉 "초자연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의미가 신의 명령이든 내세든, 그것은 자연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자연을 넘어설 수 없는 게 어떻게 '신'의 명령이야"라는 생각이 바로 드셨다면 부디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해주세요) 고로 스피노자의 입장에서 우리의 어떤 질문이든 그 답변은 자연에 적용되는 설명틀과 동일한 설명틀을 공유합니다. "고양이는 어떻게 각운동량 보존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처럼 착지하는 거지"와 "아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일까"라는 의문은 모두 같은 설명틀 아래에서 답변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yhk9297님이 말씀해주신 <에티카> 1부 부록에 더불어 3부 서문을 참고해 보세요. 스피노자가 사람들이 감정의 문제를 마치 "제국 속의 제국처럼" 다룬다고 비판하는 것은 정확히 작성자분이 지금 고려하고 있는 의문에 대해 논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로 그 부분을 읽어보시면 아마 스피노자가 이 논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작성자분이 그런 스피노자의 논증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를 더 잘 정리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정말 중요하게도, "스피노자는 목적론을 거부했는가?"는 스피노자 주석에서 여전히 논쟁점이므로, 이 모든 것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한에서 가장 정석적인 독해를 말씀드리려 노력했습니다. 부디 재밌는 철학공부 되세요!

4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