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런 글이 별로 안 올라오는 것 같아 오랜만에 올려 봅니다. 플라톤의 『국가』를 저희 학교 학과 내에서 읽는 중에 뒤쳐진 진도를 따라잡고자 스스로 요약한 글입니다. 번역본은 이번에 나온 정암학당 판본을 기준으로 읽었습니다.
1. 나라 전체의 행복을 위한 나라 세우기(419a~421c)
수호자의 사유재산과 거처에 관한 논의가 끝나자마자, 아데이만토스는 글라우콘과 소크라테스의 대화에 끼어들어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만일 수호자의 삶이 이렇게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없고 거처 또한 좋지 않다면, 이렇게 세워지는 나라가 이 사람들을 그다지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지 않겠냐는 의혹이 제기되리라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우리는 우리 안의 어떤 한 집단이 특별히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최대한 행복해지도록 나라를 세우고 있다”고 답변한다. 한 부분에만 집중하여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색채화를 그리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특정한 집단만을 행복하게 만든다면 (농부가 농부가 아니게 되고 도공이 도공이 아니게 되는 것처럼) 그 어느 나라 구성원도 나라를 구성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그래도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서 구두 수선공이 실제로는 형편없더라도 나라에 끔찍한 일은 아니지만 법과 나라의 수호자들이 사실은 수호자가 아니면서 보기에만 그런 것이라면 나라 전체를 철저히 파괴해 버리리라고 말한다. 게다가 나라를 잘 경영하고 행복하게 할 기회는 수호자들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2. 부와 가난 (421c~423d)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와 ‘짝을 이루는’ 문제로서 무엇이 장인들을 망치고, 나쁜 장인이 되게까지 하는지를 고찰하고자 하지만, 그는 이미 그것이 “부와 가난” 때문이라고 명명한다. 그는 도공은 부자가 되고 나서는 그 기술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어하지 않게 되어 나태해지고, 다른 한편 가난 때문에 필요한 장비 등을 갖출 수 없으면 일을 더 형편없게 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가난과 부 이것 양쪽 다에 의해서 기술의 결과물도 더 나빠지고 그 자신도 더 나빠진다.
[하나의 나라와 수많은 나라들] 아데이만토스는 우리의 나라에 재물이 없다면 크고 부유한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해야 할 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그런[크고 부유한] 나라 하나를 상대한다면 어렵지만, 두 나라를 상대하는 건 더 쉬울 것이 분명하다”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답한다. 우리 나라의 사람들은 전쟁 기술의 선수인 반면, 부자들은 그런 기술에 대한 앎이 적기에 우리의 수호자들은 자신들보다 두세 배 많은 수의 부유한 사람들과도 쉽게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나라가 두 나라 중 하나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많은 동맹군과 적은 적을 갖게 되리라고 그는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나라들은 [...] 각기 수많은 나라들이지 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이때 ‘다른’ 나라로 무엇을 지시하는지 잘 모르겠다. 또한 그는 “어떤 나라든 서로 적대적인 두 개의 나라가 있고, 그것은 가난한 자들의 나라와 부유한 자들의 나라”라고 말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소크라테스는 절제 있게 운영되는 나라가 가장 큰 나라라고 말하면서, “나라를 키우더라도 하나일 수 있는 정도까지만 키우자”고 제안한다. 즉 하나이면서도 충분한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 그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런 나라 세우는 일을 ‘시시한’ 일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의 함의는 잘알지 못하겠다.)
3. 교육과 양육 (423d~427c)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교육과 양육’이라는 논의가 이어진다. 이때이 나라에서 교육과 양육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잘 출발하기만 하면 선순환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유용한 양육과 교육이 보존되면 좋은 본성을 만들어 내고, 다시 또 유용한 본성이 그런 교육을 받으면 [...] 자손의 출산과 관련해서도 이전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법제화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그런데 어떤 관습들은 법으로 정하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은 것으로 비추어진다. 연장자 앞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적절하게 말을 삼가는 것, 자리를 양보하는 것, 부모를 모시는 것 등이 그러하다. 이것들은 “말이나 글로 법제화한다고 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고, 지속되지도 않을 것”이기에, 그저 교육을 통해 방향을 잡게 하여 뒤따르는 것들 역시 올바르게 하는 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법제화의 형식이 되면 나라의 사람들은 최선의 것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법규들을 끊임없이 만들고 고쳐 가며 살 것이다. (여기에서 병과 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소크라테스가 “나라가 잘못 다스려지고 있는데도 나라의 체제 전체를 흔드는 자는 사형에 처해질 테니 그런 행위를 하지 말라고 시민들에게 공표하는 나라들은” [...] “그 누구보다도 싫은 사람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426d~e에서 “대중에게 칭송받고 거기에 속아 자신들이 진실로 정치를 잘한다고 믿는 자들”에 관한 논의도 생각해 볼 만하다.)
4. 네 가지 덕목들 (427d~444a)
이제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는 “도대체 정의가 어디에 있고, 부정의는 또 어디에 있을지, 그것들 서로의 차이는 또 무엇인지”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제2권의 ‘보이기’를 떼어 내는 문제와 관련해서 보면 “모든 신들과 인간들에게 알려지든 알려지지 않든 행복하게 될 사람은 둘 중 어느 것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우리가 볼 수 있을지를” 탐구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때 ‘완벽하게 좋은’ 잘 세워진 나라는 “지혜롭고 용감하며 절제 있고 정의롭다”고 말하면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네 가지 덕목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네 가지라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시작한다. 아무튼 이런 네 가지 중에서 셋을 먼저 찾아내면, 우리가 찾고 있던 것이 남으리라는 전략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앞의 세 가지 덕목들을 차근차근 살펴보기 시작한다.
A. 지혜 (428b~429a)
첫 번째로 논의되는 덕목은 지혜이다. 이것에는 “뭔가 이상한 것이 있는 것같다”면서 소크라테스가 시작하는 논의는 앎의 종류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논의하고 세운 나라는 숙고를 잘하기에 지혜로운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 잘 숙고함이야말로 일종의 앎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온갖 종류의 많은 앎”이 있다. 그리고 나라가 지혜롭게 되는 앎은 목수의 앎도 도공의 앎도 농사꾼의 앎도 아닌 “수호하는 앎”이다. 이 수호하는 앎에 의해서 나라는 잘 숙고하는 지혜로운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수호자들보다 대장장이들이 더 많다. 그그리고 수호자들의 수가 이 중에서 가장 적다. 그렇다면 자연적 성향에 따라 세워진 이 나라는 “자신의 가장 작은 집단이자 가장 적은 부분 때문에 [...] 전체가 지혜로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수호자의 앎이야말로 “앎들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지혜라 불러 마땅한 앎”이다.
B. 용기 (429a~430d)
용기는 나라를 용감하다고 불리게 하는 부분인데, 이는 나라를 위해 싸우고 군인으로서 복무하는 부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집단이나 사람들은 그들이 비겁하든 용기 있든 그 나라가 비겁한지 용기 있는지에 대해 결정적인 역할을 못할 것이다. 즉, 나라는 자신의 특정한 부분 때문에 용기가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때 “용기는 일존의 보전”이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법과 교육을 통해 생겨난 믿음의 보전”이고, 무서운 것이 무엇이며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이것은 괴로움이나 즐거움이나 욕구나 공포 속에서도 믿음을 내내 보전하고 내버리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무서운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한 올바르고 적법한 믿음을 어떤 상황에서도 보전하는 힘을 용기라고 부르며 그렇게 규정”한다. (이는 『프로타고라스』359a~360e를 떠올리게 하는 듯 하다.) 글라우콘은 이에 덧붙여서 “올바른 믿음일지라도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생긴 믿음인 짐승들과 노예들의 믿음은 그다지 지속적이지도 않고 용기와는 다른 무엇으로 불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노예의 거짓된 용기와 대조적으로 위에서 말한 나라의 용기는 ‘시민적 용기’라고 불린다.
C. 절제 (430d~432c)
이어서는 세 번째로 ‘절제(sophrosyne)’가 중심이 된다. 절제는 앞의 두 가지보다 일종의 화합과 조화를 닮은 것으로 이야기된다. 소크라테스는 “절제가 일종의 질서이며 어떤 즐거움과 욕구들의 제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시작하여 논변을 이어나간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이런 규정이 ‘자기 자신보다 강하다’고 이야기되는 생각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면서 글라우콘을 이해시키려 한다. 즉 절제는 자기 자신보다 강해서 어떤 것을 제어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보다 강하다는 말은 우습게 들린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보다 강한 사람은 자보다 약하기도 할 것이고,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는 ‘자기 자신’을 동일한 한 사람으로 이해했을 때 생기는 모순이지, 소크라테스는 이런 것을 뜻한 것이 아니었다고 부연한다. 그에 따르면 “영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는 뭔가 더 나은 부분도 있고 더 못한 부분도 있으며, 본성상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제어하는 경우에, 그걸 두고 자기 자신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서는 다종다양한 많은 욕구들과 쾌락과 고통이 나타나지만, “자연적 성향에 맞춰 가장 잘 자라고 가장 잘 교육받은 소수의 사람들 안에서는 [...] 지성과 올바른 믿음을 동반하고 추론에 의해 인도되는 단순하고도 균형 잡힌 욕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431e에서 “만약에 누가 다스려야 하는지와 관련하여 다스리는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자들이 똑같은 믿음을 가진 나라가 있다면 그런 나라가 절제 있는 나라일 것”이라는 언급도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절제함은 다스리는 자들과 다스림 받는 자들 양쪽 다에 있다. 그래서 절제는 일종의 조화를 닮았다고 이야기된다. “용기와 지혜는 제각기 어느 한 부분에 있는 [...] 반면, 절제는 그렇지 않고 그야말로 나라 전체에 걸쳐 있으면서 [...] 다 같이 전 음계에 걸쳐서 같은 노래를 부르게” 한다. 이런 “생각의 일치”가 바로 절제이다.
D. 정의 (432b~434d)
제시된 네 덕목들 중 앞의 세 가지는 “목격이 되었”기에 이제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남게 된다.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이제 “사냥꾼들처럼 덤불을 빙 둘러서서 정의가 어디론가 달아나 숨어 버려 보이지 않게 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집중”하고자 한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의 ‘발자국’을 찾은 것 같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우리 발 앞에 뒹굴고 있던, 생각보다 가까이 있던 것이었으나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즉, 둘은 “아까부터 그것[정의]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고 듣기도 했으면서도 우리 자신이 어떤 식으론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는 말인데, 이는 곧 정의라는 것이 하나의 부분 개념이 아님을 함축한다. **정의(dikaiosyne)란 “각각의 사람이 나라와 관련된 일들 중 저마다 타고난 자연적 성향에 가장 적절한 한 가지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것을 함’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정의는 (1) 앞에서 본 지혜, 용기, 절제 모두가 나라에 생겨날 수 있도록 힘(dynamis)을 주는 역할도 하고, (2) 저것들이 생겨났을 때 보전될 수 있게도 해 준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는 433d에서 이 정의가 앞의 셋에 ‘필적한다’고 말한다.) 이 나라에서 다스리는 자들이 재판을 하면 각자가 남의 것을 갖지도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도 않게 할 것이고 이것이 정의롭다는 이유로 그럴 것이다. 따라서 “자신에게 속한 자신의 것을 가짐과 함”이 정의라는 점이 동의된다. (이때 플라톤이 개인의 소유에 관해서만 정의를 규정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조금 의문스럽다.) 그런데 이때 생산자들 간의 직업의 이동은 나라에 큰 해를 끼치지는 않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즉 목수가 구두장이의 일을 하든 반대로 하든 그것은 나라에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장인이 전사의 부류에 들어가려 하거나, 전사가 수호하는 사람의 부류에 들어가려 하거나,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동시에 하려는 경우에는 나라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즉, 계층 간의 이동은 나라에 큰 해악이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세 부류 상호 간의 참견과 변화는 나라에 가장 큰 해악이며 아울러 최대의 악행”**이라고 비판한다.
5. 나라의 덕에서 개인의 덕으로 (434d~443b)
먼저 소크라테스는 앞의 2권에서부터 지금까지 논의된 과정을 짧게 요약한다. 소크라테스가 먼저 한 나라 안에서 정의를 관찰하고자 한 이유는 더 큰 무언가에서 그것을 관찰하면 더 작은 한 사람 안에서의 동일한 것을 더 쉽게 관찰할 수 있으리라는 (큰 글자 비유에서 암시된) 추론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드러난 것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용해 보고, 잘 들어맞으면 잘 된 일이지만 만약 다른 뭔가가 나타난다면, 나라로 다시 돌아가 검사해 보는 [...]” 그런 ‘교차검증’이 시도된다. 어떤 것들이 크든 작든 동일한 이름으로 불린다면, 동일한 이름으로 불린다는 바로 그 측면에서 그것들은 닮은 것이라는 점이 합의된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사람도 정의라는 특성(eidos) 자체에서 보면 정의로운 나라와 전혀 다르지 않고, 정의로운 나라를 닮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자연적 성향이 다른 세 집단이 있어서 각자가 자신의 것을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경우에도 동일한 부류를 가질 것임이 추론된다. 만일 이 사람이 나라 안의 그것들과 상태가 동일하다(정의롭다)면, 바로 그 점에서 그 나라와 동일한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제 문제가 되는 물음은 “영혼 안에 세 가지 부류가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것이다. 나라에 있는 것과 똑같은 품성과 성품이 개개인들에게 있다는 것은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자명하다. 왜냐하면 나라의 한 특성은 “개개인들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면, 그건 우스운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플라톤이 국가가 개인에 선행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 결코 아님이 드러난다. 그런데 개개인 각각이 여러 행위들을 동일한 것으로[을 통해] 행하는지 각기 다른 것으로[을 통해] 행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즉 화내는 것과 배우는 것과 영양 섭취하는 것이 과연 동일한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다른 것들인지 하는 문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다음의 논변 원칙을 제시한다. “동일한 것이 동일한 측면에서 동일한 것에 관련해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거나 겪을 수는 없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것이다. 예컨대 동일한 것이 동일한 측면에서 동시에 정지해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멈춰서 있는 사람이 손을 움직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일부는 정지해 있지만 일부는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이어서 팽이의 수직인 측면과 원둘레의 측면에서의 운동과 정지를 구별한다. 이때 이 ‘측면’ 은 물리적 부분이 아니라 추상적 분리인 것으로 보이니 이런 것은 물리적 부분에만 한정되지 않는 것 같다.) 아무튼 긍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 갈망하기와 거부하기, 끌어당김과 밀쳐냄 등은 서로서로 반대되는 것들이다.
[욕구에 관한 논의들] 이제 소크라테스는 목마름의 욕구를 주제로 논변을 이어나간다. 목마름은 영혼 안에 있는 욕구로서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목마름은 목마름인 한에서 마실 것 이상의 것을 욕구하지 않는다. 만일 그 목마름이 따뜻한 마실 것에 대한 욕구이거나 차가운 마실 것에 대한 욕구 등이라면, 그것은 목말라함 자체 때문이 아니라 ‘따뜻함’이 추가로 있어서 그런 것이고, ‘차가움’이 추가로 있어서 그런 것이다. 반면에 “목말라함 그 자체는 그것의 본래 대상인 마실 거리 자체 이외의 다른 것에 대한 욕구가 결코 아니” 다. 이를 다시 정리해서 말하면 “**각각의 욕구 자체는 그것의 본래 대상만을 대상으로 하고, 특정한 종류의 이러저러한 것을 대상으로 할 때에는 추가된 것들이 있을 때”**라는 것이다. 이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누구나 이로운 것들을 욕구한다’는 소리를 하는 누구 때문에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없도록 하라며 초기 대화편의 소크라테스를 비꼰다. 왜냐하면 이로움은 욕구에 덧붙여진 것이지 본래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 모든 것 중 특정한 종류의 것들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 반면, 각각의 것들 자체는 각각의 것 자체와만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크거나 ‘더’ 작은 등의 비교급 표현에도 해당한다. 이를 앎의 경우에 적용해보면 “앎은 그 자체로 보면 배울 거리 자체와 관련해서 앎이고, 앎의 대상을 무엇으로 놓아야 하든 그 대상 자체와 관련해서 앎인 것”이다. 반면에 “어떤 앎, 즉 어떤 특정한 종류의 앎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된 것”이다. 건축술이 도자기 제작술과 다른 것은 이런 점에서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어떤 것이 자신이 관련된 것과 같은 성질을 갖는다는 말은 아니”라는 점이다. 병든 것에 대한 앎은 병든 것은 아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특정한 대상에 관한 앎은 단순한 앎 자체가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그래서 목마름은 그가 목말라하는 한에서 마시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목말라하는 영혼을 반대 방향으로 당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앞의 논의에 따라 목말라함을 끌고 가는 것 자체와는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욕구들을 막는 것은 계산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반면에 욕구의 대상들로 끌고가는 것은 그가 겪고 있는 일과 질병들에 의한 것이다. 이제 이를 정리하면 영혼 안에는 계산하는 ‘이성부분’과 욕구하는 ‘비이성적이며 욕구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 된다.
[기개는 어떤 것인가] 이제 소크라테스는 기개(thymos)가 과연 둘 중 하나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 번째 유형인지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기개[분노]는 분명 “욕구들과는 다른 것이고, 때때로 욕구들과 싸움을 벌인다.” 그리고 기개는 종종 이성의 동맹군이 되어 계산에 반하여 행동하라고 하는 욕구에 맞선다. 이런 기개는 (1) 자신이 부정의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어떤 굶주림이나 추위 등의 일을 겪더라도 정당하다 생각한다면 들고 일어나서 반항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2) 반대로 자신이 부정의한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그는 부아가 끓고 사나워져서 그가 정의롭다고 여기는 편과 동맹을 맺을 것이다. 이 두 경우 모두 그는 이성의 부름에 따라 이성의 동맹이 되어 행위한다. 기개적인 것은 욕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 안에 내분이 일어났을 때 이성적인 것을 편들어 무기를 든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이겅 자체와도 다른 것이기에, 기개는 제삼의 것임이 밝혀진다. (이때 글라우콘은 아이들이 아직 계산능력인 이성을 갖추지 못한 때에도 화로 가득 차 있음을 강조하고,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세 유형과 유비적으로 영혼 안에도 셋이 있어야 하기에 기개가 세 번째 것이리라고 추론한다.)
[나라와 사람의 정의로움] 그렇다면 결국 개인은 나라가 지혜로웠던 방식으로 그리고 바로 나라를 지혜롭게 했던 것에 의해서 지혜로운 것이고, 개인이 용기 있던 방식으로 그릭고 그것에 의해서 나라 역시 용기 있으며 사람 역시 나라가 정의로웠던 방식으로 정의로운 것이 된다. 그리고 나라의 정의는 세 부류가 각자 자기 것을 하는 데에 있었기에, 개인에게서의 정의는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이 각기 자신의 것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점에서 규정된다. 이는 이성부분이 다스리고 기개부분은 순종하고 동맹하는 것이라는생각으로 나타난다. 이것들은 욕구부분을 제어해서 “욕구부분이 강해져 자신의 것을 하지 않고 다른 둘을 다스리려 해서 모두의 삶 전체를 뒤집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A) 개개인은 그 사람 안에서 다스리며 지기하고 공동체 전체를 위한 이익에 대한 앎을 가짐으로써 정의롭고 (B) 개인은 두려운 것과 두렵지 않은 것이라고 이성이 지시한 바를 그의 기개부분이 괴로움이나 즐거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보존하는 경우에 용기 있고 (C) 개개인은 이 부분들의 우애와 화합에 의해 절제 있게 된다. (이때 그럼 욕구의 지위는 어디인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그리고 이렇게 셋이 각자의 일을 함으로써 개인은 정의로워진다.
6. 건강과 정의, 그리고 부정의 (443c~444a)
이제 부정의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며 제1권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제시된다. 일단 “사실 정의는 외적으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게 아니라 내적으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에게 속한 것들” 을 함을 의미한다. 이 세 부분이 조화를 이루게 해서 어떤 행동을 할 때든 그는 조화롭고 정의롭다. 그리고 이 상태를 보존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정의롭고 아름다운 행위이다. 또한 이 행위를 관장하는 앎은 지혜인 반면, 이 상태를 그때그때 와해시킬 수 있는 행위는 부정의한 행위이고 그것을 관장하는 앎은 무지이다. 결국 이로부터 부정의에 대한 하나의 규정이 따라 나온다. 부정의란 “이 세 부분들 간의 내분이자 참견이고, 남의 일에 대한 간섭이며 영혼 전체에 대한 일부의 반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부정의는 무지이자 악덕으로 불린다.
[영혼과 몸의 건강 논변]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부정의가 질병이라고까지 말하면서 그 의미를 확장시킨다. 그에 따르면 “영혼 안에서 하는 작용은 몸 안에서 하는 작용과 전혀 다르지 않기”에 그러하다. (1) 정의로운 행위는 정의를 생기게 하고, 부정의한 행위는 부정의를 생기게 하는데, (2) 건강을 생기게 함은 몸 안에 있는 것들이 본성에 맞게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도록 하는 것이고 병을 생기게 함은 본성에 어긋나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다스리거나 다스림 받는 것이다. 그리고 (3) 정의를 생기게 함은 영혼 안에 있는 것들을 본성에 맞게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게 확립하는 것이고 부정의는 본성에 어긋나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다스리거나 다스림 받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덕은 일종의 영혼의 건강이고 아름다움이며 좋은 상태인 반면, 악덕은 질병이고 추함이며 허약함이다.”
끝으로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부정의가 모두 밝혀진 지금 제2권의 물음으로 되돌아간다. 즉 “정의로운 사람인 것이 그가 그런 사람임을 남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이득이 되는지 아닌지” 하는 의문이다. 글라우콘은 이에 대해 확신을 갖고 대답한다. “모든 먹을 것과 부와 권력이 갖추어지더라도 우리 몸의 본성이 망가지면 살 가치가 없다.” 우리를 살아 있게 해주는 바로 그 본성이 망가진다면 살 가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이 기운을 잃지 말고 악덕에 얼마나 많은 유형이 있는지 보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이때 눈에 띄는 점은 “덕은 한 가지 유형이지만 악덕은 무한하며 그중 기억해 둘 만한 것들은 네 유형이라는 것”이다. 즉 정치체제는 다섯 종류고 그에 따라 영혼도 다섯 종류인데, 그중 정의로운 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논의는 제8권에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