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관심을 갖고 있는 인구 윤리(Population Ethics)라는 분야를 대략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써본 글입니다.
대략적인 큰 그림을 파악해볼 겸 이 주제를 쉬운 말로 소개를 해봐도 좋겠다 싶어 무계획적으로 쓴 글이라 여러 입장을 소개하는 데 있어 엄밀함이 좀 떨어질 수 있지만,
피드백을 주시면 추후에 더 좋은 글로 다듬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규범 윤리학
규범 윤리학은 일차적으로 행위의 도덕적 지위, 이를테면 의무, 허용, 옳음, 그름 등에 관심을 가진다. 규범 윤리학 이론은 행위의 도덕적 지위가 무엇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고전적 공리주의를 비롯한 결과주의 이론은 어떤 행위의 도덕적 지위가 그 행위 및 다른 대안들이 가져올 결과에 관한 사실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는 체계를 제시한다. 이와 달리 의무론을 비롯한 비결과주의적 이론의 경우 행위를 이끈 의도의 내용이나 그 행위가 해악(harm)에 해당하는지를 중요한 결정 요소로 제시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복지주의 윤리학(welfarist ethics)을 상정하고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어떤 도덕 이론이 복지주의적이라면, 그 이론은 행위의 도덕적 지위가 그 행위의 영향을 받는 피동자(patient)의 복지에 관한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결과주의와 비결과주의 윤리 이론 모두 복지주의 윤리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소개할 인구 윤리의 문제가 비단 복지주의 윤리학에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복지가 도덕적 지위를 결정하는데 부분적으로 역할을 한다면,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이는 어떤 이론도 이 문제를 간단히 회피할 수는 없다.
인구 윤리의 관심사는 우리의 행위가 존재하게 될 사람의 수, 동일성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 그 행위의 도덕적 지위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라는 질문으로 거칠게 요약해볼 수 있겠다. 즉, 우리의 선택을 통해 누가 존재하게 되는지, 얼마나 존재하게 되는지가 달라진다고 할 때, 그 선택지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논의라 할 수 있다.
- 동일한 사람, 동일한 수(Same Person, Same Number)
내가 강당에 100명을 모아두고 강의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이 때 특정 시점에서 나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해보자. 하나는 이 사람들을 앞에 두고 갑자기 욕을 퍼붓는 것(a)이고, 다른 하나는 그저 하던대로 강의를 계속하는 것(b)이다.
다른 현실적인 요소를 무시하면, 이 상황에서 내 선택지의 도덕적 지위는 전적으로 강당에 있는 100명에 관한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어쨌든 a와 b는 모두 강당에 있는 100명에 대한 행위이다. 즉, 행위의 도덕적 지위를 결정하는 복지 주체의 수와 동일성이 보장되는 상황인 것이다.
행위에 영향 받는 집단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유의미한 차이는 없다. 예를 들어 c 행위가 40명에게, d 행위가 그들과 다른 60명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두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일단 행위 시점에서 존재한다면, 우리는 이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하고 윤리 이론을 적용할 수 있다.
- 다른 사람 문제 혹은 비동일성 문제(Different Person or Non-Identity Problem)
이제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 만일 c 행위를 했을 때 존재하게 될 집단과 d 행위를 했을 때 존재하게 될 집단이 서로 다르다면 어떨까? 고전적인 예시는 아래와 같다.
한 여성이 임신을 계획하고 있다. 그런데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갔을 때, 의사는 이 여성에게 몸에 이상이 있으므로 지금 아이를 갖게 되면 경미한 장애를 안고 태어날 것이지만, 6개월 동안 적절한 치료를 받고 그 후에 아이를 갖게 되면 아주 건강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에게 두 가지 선택지, 지금 아이를 갖는 것과 6개월 후에 아이를 갖는 것이 있다고 할 때, 어떤 선택지가 그른가?
만일 현재 시점에서 강력한 환경 정책을 시행하면 200년 후에 존재하게 될 사람들은 매우 높은 복지수준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이대로 살게 되면 200년 후에 존재하게 될 사람들은 나쁘지는 않지만 썩 좋지는 않은 복지수준을 누릴 것이다. 환경 정책에 영향을 받을 현재 존재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일단 제외하고 본다면 어떤 선택지가 그른가?
이런저런 복잡한 세팅 때문에 판단에 방해가 된다면 아래와 같이 단순화할 수도 있다. (cf. Pummer 2024, "Future Suffering and the Non-Identity Problem")
당신 앞에 버튼이 두 개 있다. 왼쪽 버튼을 누르면 가람이가 뿅하고 존재하기 시작해서 40만큼의 복지 수준을 누리는 삶을 산다. 오른쪽 버튼을 누르면 누림이가 뿅하고 존재하기 시작해서 60만큼의 복지 수준을 누리는 삶을 산다. 어떤 버튼을 누르는 것이 그른가?
반대 의견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 아이를 갖는 것, 환경 정책을 시행하지 않고 현상유지하는 것, 왼쪽 버튼을 눌러 가람이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직관적인 판단으로 수용된다. 문제는 왜 그르냐는 것이다.
2.1 공리주의와 난점
총합 공리주의(Total Utilitarianism)에 따르면 가람이를 존재하게 하는 것("가람-선택")이 누림이를 존재하게 하는 것("누림-선택")보다 적은 복지를 가져오므로 그른 행위이다. 오히려 이 견해에 따르면 누림-선택은 단순히 허용되는 게 아니라 도덕적 의무가 된다.
그런데 이 같은 설명에는 치명적인 난점이 있다.
하나는 '당혹스러운 결론'(The Repugnant Conclusion)이라는 이름이 붙은 함축을 갖는다는 것이다.
[양산-선택] 오른쪽 버튼 옆에 버튼이 하나 더 있는데, 이 버튼을 누르면 1만큼의 복지를 누리는 10만 명이 뿅하고 존재하기 시작한다.
총합 공리주의는 가람-선택, 누림-선택, 양산-선택이 있을 때, 양산-선택이 도덕적으로 요구되는 행위이고 나머지 둘은 그른 행위라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귀결이다.
2.2 비공리주의적 답변과 난점
만일 다음과 같은 비공리주의적 원리를 받아들인다고 해보자.
(사실 이게 엄밀하게 복지주의적 원리인지는 약간 논란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행위로 인한 결과에 대해 어떤 사람이 자신의 복지의 측면에서 합리적인 불만(rational complaint)을 제기할 수 있다면, 그 행위는 그르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행위로 인해 내가 고통을 받는다면 나는 그 행위에 대해 합리적인 불만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고, 바로 이 사실이 그 사람의 행위를 그른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도 가람-선택이 그르다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원리에 따라 가람-선택이 그르다고 판정할 수 있으려면 가람-선택을 했을 때 합리적인 불만을 제기하는 이, 즉 누림이가 존재해야 하는데 가람-선택을 한 세계에서 누림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원리에 따라 가람-선택이 그르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2.3 평균 공리주의와 다른 수 선택(different number choice)
앞서 총합 공리주의의 양산-선택 문제를 보면, 어떤 선택지를 고르느냐에 따라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이 존재하게 될지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람-, 누림-선택은 1명을 존재하게 하지만, 양산-선택은 10만 명을 존재하게 하는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다른 수 선택의 경우 총합 공리주의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게 평균 공리주의(Average Utilitarianism)이다.
총합 공리주의와 평균 공리주의는 복지 주체의 수가 고정되어 있다면 하나의 이론으로 수렴한다. 하지만 복지 주체의 수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면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평균 공리주의에 따르면 가람-선택의 복지값은 40, 누림-선택은 60, 양산-선택은 1이므로 누림-선택을 제외한 나머지 두 선택지가 그르다라는 판단을 옳게 내릴 수 있다.
하지만 평균 공리주의는 다른 두 가지 난점에 부딪힌다.
[가학-선택] 이 버튼을 누르면 5명의 사람이 뿅하고 존재하는데, 그 중 네 명은 150의 복지수준을, 한 명은 -50의 복지수준을 누리게 된다.
가학-선택의 복지값은 110으로 누림-선택보다 높고, 따라서 평균 공리주의에 따르면 가학-선택을 제외한 나머지 선택지는 모두 그르다. 이 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운 귀결이다. (이를 "Sadistic Conclusion"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 난점은 평균 공리주의가 너무나도 자명하게 직관적인 판단과 충돌한다는 점이다.
100명이 100의 복지를 균일하게 누리는 상태와 거기에 80의 복지를 누리는 50명을 더한 상태 중 어떤 것이 더 좋은 상태인가?
직관적인 판단은 당연히 후자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평균 공리주의의 가치론에 따르면 후자는 평균 복지값이 저하된 상태이므로 전자가 더 좋다는 것이 함축된다. 불평등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한, 이런 귀결에는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다. (이를 '단순 합산 역설'(Mere Addition Paradox)이라고 한다.)
- 인구 가치론의 불가능성 정리
우선 한 가지 주목해볼 사실이 있다.
A: 100의 복지를 누리는 100명
B: 100의 복지를 누리는 100명 + 80의 복지를 누리는 50명
C: B의 평균 복지값 k만큼의 복지를 누리는 150명
단순 합산 역설을 피하려면 우리는 A보다 B가 낫다고 해야 한다.
B보다 C가 좋다는 것은 거의 거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총합이든 평균이든 복지수준이 동일한데다 심지어 분배도 평등하게 되어 있어서 정의의 원칙에도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x가 y보다 낫다'는 일반적으로 이행성(transitivity)이 성립하는 관계이므로,
A보다 C가 낫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그런데 이 작업을 반복함으로써 우리는 거의 0에 가까운 낮은 복지 수준을 누리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있는 상태가 A보다 더 낫다는 귀결, 즉 당혹스러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뭔가 곤혹스러운 상황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아마도 올바른 직감일 것이다.
스웨덴 철학자 구스타프 아레니어스(Gustaf Arrhenius)는 다음을 증명했다.
인구 가치론의 불가능성 정리
Repugnant Conclusion과 Sadistic Conclusion, Mere Addition Paradox를 모두 피하는 인구 가치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불가능성 정리의 내용은 위와 같은 귀결들을 피할 수 있도록 도입된 가치론적 원리와 몇 가지 합리적인 다른 원리들이 비일관적이라는 것이다. 증명에 대한 소개는 추후에 시도해보도록 하겠다)
- 정리
인구 윤리는 우리의 선택이 존재하게 될 사람의 동일성과 수에 차이를 만들 때 도덕적 지위가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관한 일반적인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이 논의의 핵에 있는 두 가지 문제를 꼽으라면 비동일성 문제와 불가능성 정리일 것이고 하나를 더 꼽자면 아래와 같은 출생 비대칭성(Procreation Asymmetry) 논제이다.
We are obliged not to create miserable people, but not obliged to create happy people.
혹은 비슷한 결로,
We are obliged to make people happy, but not obliged to make happy people.
사견으로, 이 분야의 논의는 매우 흥미롭다.
전통적인 규범 윤리학 이론들을 테스트하는 시험장일 뿐만 아니라
가치론적 원리들 간에 명시적인 긴장이 드러나 있는 전쟁터이고
산술적 테크닉과 직관적 판단이 손잡고 춤을 추는 영역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