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얼마 전부터 철학사가들은 독일어권의 포스트칸트 철학을 우리가 각각 독일 전통과 오스트리아 전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서로 구별되는 두 전통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을 점차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전통의 주된 계보는 칸트, 피히테, 헤겔, 셸링으로 시작하여 하이데거, 아도르노, 블로흐로 끝나는 인물들의 목록으로 이루어진다. 두 번째 전통의 주된 계보 역시 이와 유사하게, 볼차노, 마흐, 마이농으로 시작하여 비트겐슈타인, 노이라트, 포퍼로 끝나는 목록을 통해 가려낼 수 있다.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오늘날 영미권 철학적 사유의 주류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오스트리아 전통이다. 물론 엄밀철학 또는 분석철학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독일 사상가들도 존재하지만, 그러한 사상가들은 독일 고유의 철학문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주변인이었으며, 실제로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바로 빈에서 철학적 고향을 찾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오스트리아 계보의 영향을 살펴보면, 우리는 최근 분석철학의 특징적 관심사들과 이어지는 익숙하거나 낯선 일련의 연관들을 만나게 된다. 마이클 더밋이 『분석철학의 기원』에서 지적하듯, 분석철학을 ‘영미 철학’이라고 부르는 최근의 유행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심각한 역사적 왜곡”이다. 그에 따르면 분석철학이 발전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철학은 “적어도 그만큼 정당하게 ‘영국-오스트리아 철학’이라고 불릴 수 있다”(1988, p. 7).
후설과 비트겐슈타인, 마흐와 빈학단의 사유에 관해서는 많은 가치 있는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앞으로 내가 보여주고자 하듯 브렌타노와 그의 학파의 작업으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 철학의 중심축은 여전히 충분히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철학자들이 수행하는 마이농이나 트바르도프스키 연구는 여전히 흔히 맥락에서 떼어낸 몇몇 선호되는 명제들을 단순화하고 종종 혼동되게 제시한 것에 의존한다. 원전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오스트리아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어떤 문제들에 몰두했는지를 확립하려는 노력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인지과학 분야의 문제들에 대한 철학자들의 관심이 오늘날 급증하면서 바로 그 문제들 가운데 많은 것이 다시 중요해졌음에도 그러하다.
‘오스트리아 철학’이라는 개념을 순전히 지리적 용어로 정의하는 것도 가능하다. 곧 현대 오스트리아가 발전해 나온 합스부르크제국의 경계 안에서 태어났거나 그곳에 정착했던 중요한 철학자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다. 그러한 목록은 빈, 그라츠, 인스브루크의 철학자들뿐 아니라 프라하, 크라쿠프, 르보프/렘베르크의 철학자들까지 포함하며, 적어도 볼차노, 마흐, 브렌타노, 트바르도프스키, 마이농, 에렌펠스, 후설, 말리, 비트겐슈타인, 노이라트, 카르납, 슐리크, 바이스만, 구스타프 베르크만, 괴델, 포퍼를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더 야심차게는 이 목록에 든 사상가들에게 특징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특정한 철학 수행 방식의 표지나 특징을 제시하려 할 수도 있으며, 관련 철학사 문헌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런 방향을 취해왔다. 이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철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i) 경험과학, 심리학을 포함한 경험과학에서 영감을 받거나 그것과 긴밀하게 연결된 방식으로 철학을 수행하려는 시도. 이 시도는 과학의 통일성에 대한 관심과도 결부되어 있다. 빈의 일부 실증주의자들의 작업에서 그것은 물리주의적 또는 현상주의적 환원주의라는 극단적 형태로 나타난다. 브렌타노와 그의 추종자들의 작업에서는 오히려 철학과 다른 학문들 사이의 방법적 통일성과 관련된다.
(ii) 영국 경험론 철학에 대한 호감, 그리고 많은 경우 그것에 뿌리를 두고 있음. 이는 개별 사례들을 세밀하게 검토하는 데 기초하여 ‘아래로부터’ 철학을 발전시키려는 관심이다.
(iii) 철학의 언어에 대한 관심. 이것은 때로 언어비판을 하나의 도구나 방법으로 이해하는 데 이르고, 때로는 논리적 이상언어를 구성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많은 경우 그것은 철학적 표현을 위해 의식적으로 명료하고 간결한 언어를 사용하려는 태도와, 특정한 종류의 철학에 특징적인 언어 사용과 오용의 특수한 성질에 대한 민감성으로 나타난다.
(iv) 칸트적 혁명과 그것의 여파로 나타난 여러 형태의 상대주의와 역사주의에 대한 거부. 그 대신 우리는 논리학, 가치론 및 그 밖의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의 실재론과 ‘객관주의’를 발견한다. 이는 볼차노의 즉자적 명제 개념과 포퍼의 ‘제3세계’ 이론에서 예시된다.
(v) 선험적인 것과의 특별한 관계. 그러나 이것은 칸트적 용어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이 표현했듯 “논리학과 물리학의 중간”에 있는 현상학과 게슈탈트이론 같은 학문들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선험주의가 어떻게 경험과학에 대한 존중과 양립할 수 있는지는 아래에서 다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vi)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관심, 특히 사물의 부분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구조화된 전체를 이루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관심.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여러 과학이 우리에게 드러내는 존재자들 사이의 존재론적 층위 차이를 인정하는 것과, 그 결과 실재의 일정한 층화구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포함한다.
(vii) 거시현상, 예컨대 사회과학이나 윤리학의 현상과, 그 밑에 놓여 있거나 그것과 연관된 심적 경험 또는 다른 미시현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지배적인 관심. 이것이 복합적 전체를 그 구성부분이나 계기로 환원한다는 것을 반드시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환원주의는 확실히 마흐와 일부 빈 실증주의자들에게 나타나지만, 앞서 언급한 거의 모든 다른 사상가들은 그것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이 간략한 개관에는 가치 있는 점이 많다. 그러나 불행히도 앞서 제시된 모든 특징이 언급된 모든 사상가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 목록에 든 일부 철학자들은 오히려 위에서 말한 하나 이상의 특징에 반발한 방식으로 특징지어지며, 비트겐슈타인과 후설 같은 일부 철학자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특징들과 맺는 관계를 변화시켰다. 게다가 ‘오스트리아 철학’의 표지라고 주장되는 많은 특징들은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지리적 의미에서도 오스트리아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상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앞서 열거한 특징들을 넓은 의미에서 기준으로 삼아 정의된 ‘오스트리아 철학’을 하나의 단일하고 일관된 사상운동으로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철학적으로 유용하고 역사적으로 정당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 철학이 발전하는 전 기간에 걸쳐 결코 완전히 잊히지 않은 논쟁 상대의 역할을 했던 독일 철학을 다시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앞서 언급한 특징들이 독일 철학에서는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독일 철학의 연속된 세대들이 서로 매우 크게 달랐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엄청나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독일 철학은 무엇보다 인식론을 중심으로 방향 지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관심은 세계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향한다. 더구나 후자조차 실제로 획득된 지식이나 과학자들의 실천으로부터 대체로 추상된 방식으로 이해되며, 이것이 독일 고유의 과학철학 전통이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때때로 독일 철학의 낭만주의적 요소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도 연결된다. 세계의 궁극적 불가해성을 강조하는 이 사유방식은 종종 과학이론에 적대적이다.
따라서 포스트칸트 독일 철학에서 철학과 과학적으로 확립된 사실들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철학자의 세계는 실제로 일어나는 것과 성립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경험적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물론 바우흐, 나토르프, 카시러 같은 예외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예외들은 다시금 압도적으로 독일 철학의 주류 밖에 있는 사상가들이며, 이런 점에서 프레게와 힐베르트 같은 철학적 성향을 지닌 수학자들의 기여가 독일 철학자들이 아니라 영국이나 폴란드의 철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독일 철학의 주된 흐름은 철학에서 언어가 수행하는 역할에도 거의 민감하지 않았다. 그것은 철학적 깊이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종종 명료성을 희생하면서 그렇게 했다. 명료성은 사고의 피상성과 연관되었다. 이 점에서 칸트조차 후계자들의 특정한 문체적 과잉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비난받을 수 있으며, 칸트의 정신에 따라 과학적으로 지향된 철학을 발전시키려 했던 리케르트나 코헨 같은 신칸트주의자들도 볼차노나 브렌타노에게서 연상되는 언어의 명료성과 논증의 정밀성을 자신들의 저술에서 결코 달성하지 못했다.
19세기 독일 철학은 상당 부분 관념론 철학이었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내재주의적 변형의 관념론 철학이었다. 이는 의미, 진리, 가치, 때로는 세계 전체까지도 마음이나 자아에 내재하는 것, 곧 마음이나 자아의 실제 구성부분 또는 ‘내용’으로 간주하는 이론이다. 20세기로의 전환기 무렵, 이러한 내재주의적 철학 방식은 두 방향에서 공격받았다. 영미권에서는 무엇보다 러셀과 무어가 활동한 케임브리지에서, 오스트리아에서는 브렌타노 학파의 철학자들에 의해서였다. 바로 이 맥락에서 우리는 브렌타노와 그의 추종자들이 오스트리아 철학의 중심축을 이룬다는 주장을 정당화할 것이다. 이 주장은 합스부르크제국 전역의 대학에서 브렌타노와 그의 제자들이 행사한 개인적 지배력, 그리고 오스트리아 철학 전체의 특징으로 문헌에서 지목되어온 표지들을 가장 가까이 구현한 이들이 브렌타노와 그의 제자들이었다는 사실에만 근거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브렌타노 학파 철학자들이 철학에서 내재주의의 제약을 돌파하는 데 수행한 역할이다. 그 제약은 브렌타노 자신의 사유에도 영향을 미쳤다.
브렌타노 학파의 철학자들은 초월적 대상에 대한 정신의 지향을 엄밀하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법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유럽 대륙에서 엄밀철학 또는 분석철학이 초기에 발전하는 데 놀라울 정도로 생산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그것은 현상학과 게슈탈트심리학 같은 사상운동을 낳는 데에도 생산적이었다. 브렌타노 학파의 철학자들은 프레게와 그의 후계자들과 달리 자신들의 ‘대상이론’을 정교화하면서 심리학적 관심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의 존재론 연구는 언제나 상응하는 대상들이 경험되는 인지과정에 대한 연구와 나란히 진행되었다. 브렌타노 학파의 구성원들이 환원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론과 심리학 사이의 간극을 가로질렀다는 점에서, 그들은 현대 인지과학의 몇몇 결정적인 측면을 선취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