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텍스트 : 홍지호. (2015). 무법칙적 일원론은 결과논변에 대응할 수 있는가?. 논리연구 , 18 (3), 359-387.
우리는 앞서 정신적 사건들은 엄밀한 물리적 법칙에 포섭되지 않아 자유롭지만, 물리적 사건으로 재기술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양립가능성을 보여준다는 논지를 펼친 바가 있다.(본향을 찾아 떠나는 철학쟁이 나그네 : 네이버 블로그 참조) 그런데 홍지호는 이것이 행위의 자유를 확보하는데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데이비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은 결과논변으로부터 자유의지를 구하는데 실패했는가?
참고 텍스트 : 홍지호. (2005). ‘결과논변’과 무법칙적 일원론. 철학적분석, (11), 33-60. 결과논변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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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의 물음은 이렇다. 무법칙적 일원론이 확보한 정신적 사건의 자율성은 행위의 자유를 위해 충분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물음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리기는 힘들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정신적 용어로 기술된 사건이 엄밀한 결정론적 법칙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건 자체가 결정론의 영향에 벗어나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 e에 대한 정신적 사건 기술구 M과 물리적 사건 기술구 P가 있다고 할 때, M을 통해서는 e의 발생 여부를 법칙적으로 예측할 수 없지만 P를 통해서는 할 수 있다고 한다면, e는 법칙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무법칙적 일원론에 따르면 법칙성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 기술구들의 관계이다. 그런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건 e의 자율성은 실질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적/기술적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자율성이 행위의 자유를 보장해준다고 보기는 힘들다. 어떠한 정신적 사건이나 행위를 그 자체로는 법칙적으로 설명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고 해도 사실상 그것을 재기술할 경우에는 결정론에 포섭된다.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홍지호(2014), 381-382.
무법칙적 일원론은 대안적 가능성을 확보해주는 이론이 아니다. 특정 사건이 다른 것으로 기술가능하다고 해서 달리 행할 있음 또는 대안적 가능성 조건이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법칙적 일원론이 대안적 가능성을 해명했다는데 근거하여 인식적/기술적 차원의 자율성을 가지고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 스스로의 마음에 대한 생각이 오류 가능하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바다. 우리는 스스로를 결단의 주체로 경험하지만 그러한 경험은 환상일 수 있다. 인식적/기술적 차원에서 확보한 자유는 그만큼 약한 것이다. 물론 자유에 대한 인식은 자유의 필요조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적/기술적 차원의 자유만을 확보한 무법칙적 일원론은 그렇나 인식이 참이라는 것을 보이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홍지호(2014), 382-383.
홍지호의 논변을 요약하고 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1) 무법칙적 일원론은 과거 사실의 대안적 행동 가능성을 제시하지 않는다.
(2) 무법칙적 일원론은 인식적/기술적 차원의 자유만 확보했다.
(3) 자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오류가능하며 환상일 가능성이 있다.
(4) (3)이 참이라면, 우리의 인식/기술은 자유의지가 참이라는 근거일 수 없다.
(5) (1)-(4)에 의해 무법칙적 일원론은 진정한 자유의지의 해명에 실패했다.
홍지호의 논변 중 (4)를 주목해보자. 이 전제 (4)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가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인식적/기술적 차원과 다른 실재의 차원이 있고 그 실재의 차원에서 행위의 자유가 해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재의 차원에서는 과학적 설명이 특권을 지니고 있다. 홍지호가 이런 형이상학적 가정을 하고 있다는 것은 다음의 문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무법칙적 일원론에 따르면 법칙성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 기술구들의 관계이다. 그런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건 e의 자율성은 실질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적/기술적 차원이라는 것이다."
무법칙적 일원론은 사건이 정신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이 혼재된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엄밀한 법칙성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 기술구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서, 정신적 속성에 대해서는 정신 사건의 기술구를 적용하므로 엄밀한 법칙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홍지호는 이런 무법칙적 일원론의 설명을 직접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무법칙적 일원론에 따르면 무법칙적 일원론이 확보한 자유는 기술적/인식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는 두 가지 주장을 함축하고 있는데, 하나는 위에서 언급했듯 기술적/인식적 차원과 구분되는 실재의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엄밀한 과학적 법칙은 양측 모두에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함축이 있다고 하는 이유는 홍지호의 주장이 단순히 "법칙성은 사건 기술구들의 관계"라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무법칙적 일원론 뿐만 아니라 엄밀한 과학적 법칙도 동시에 괄호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홍지호가 일종의 형이상학적 배경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경우 입증책임은 무법칙적 일원론이 아닌 홍지호에게 넘어가게 된다. 무법칙적 일원론은 강한 자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실체일원론을 지지한다. 다만 무법칙적 일원론은 사건들이 다양하게 기술될 수 있으며, 그 기술 중에는 정신적 속성에 의거한 정신적 사건 기술구들도 존재하며, 그 기술구들은 물리적 사건으로 재기술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법칙적으로 포섭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모든 정신적 속성과 정신사건 기술구들이 환원되어야 한다는 환원주의 내지는 그런 용어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제거주의적 입장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무법칙적 일원론이 인식적/기술적 차원에서의 자유를 확보했다는 것은 타당하다. 그리고 홍지호 본인도 그것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홍지호는 더 나아가 과학적 법칙이 설명적 특권을 가지고 있는 실재 세계를 가정한다. 이 가정에 의거한다면 결과논변이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양립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데 성공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적 설명, 과학적 법칙이 설명적 특권을 지니는 실재 세계에서 자유의지를 해명하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컴의 면도날 원리에 의거해 이런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거나 설명력이 더 높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하면 무법칙적 일원론이 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게 된다. 왜냐하면 강한 자연주의와 무법칙적 일원론은 대부분의 요소들을 공유하지만 강한 자연주의만 특별한 실재 세계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강한 자연주의자들은 과학적 법칙의 성공 사례 및 성공 가능성과 인간이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실재 세계에 대한 경험을 가졌다면 이런 특권적인 실재 세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응수할 것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의지와 정신적 사건을 옹호하는 경험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애초에 그런 경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법과 정치, 도덕이 성립할 수 있었을리가 없다. 더 나아가 무법칙적 일원론을 수용한다고 해서 과학적 법칙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과학적 법칙은 사건들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강력한 도구로서 인정받아야 하고, 또 정신적 사건을 재기술하는 도구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 그것을 넘어 실재세계에 대한 특권을 주장하려고 할 경우, 강한 자연주의는 독단적인 형이상학 체계를 구축하고 그것을 입증해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입증하는 것의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