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낸다고?: 토마슨의 『쉽게 이해하는 존재론』 제10장

10. 어려운 존재론적 물음들은 존재론어에서 되살아날 수 있는가?

토마슨은 ‘존재론에 대한 쉬운 접근법(easy approach to ontology)’이야말로 최근의 메타존재론 논쟁에서 옹호될 만한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입장을 제시한다고 논증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이 주류 형이상학의 ‘신콰인주의적’ 관점과는 달리 ‘카르납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카르납주의적 관점은 (a) 존재 물음들이 단순히 경험적이거나 개념적인 수단을 통해 대답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또한 (b) 형이상학은 존재 물음들에 대답할 만한 아무런 여지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즉, 이러한 접근법에 따르면, 우리는 굳이 존재 물음을 탐구하기 위해 형이상학의 방법을 따로 다듬어야 할 필요가 없다. K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K”라는 용어를 위한 적용 조건이 만족되는지를 통해 대답되어야 한다. 대상에 대한 관찰이나 의미에 대한 분석을 통해 “K”라는 용어를 위한 적용 조건이 만족된 것으로 드러나면 K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K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종류의 ‘적용 조건(application condition)’이 과연 만족되는지에 대한 대한 경험적이거나 개념적인 논의인 것이지, 단일한 종류의 ‘존재의 실질적 기준(substantive criterion of existence)’이 무엇인지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이 아니다.

10. 1. 존재론어에서의 존재 물음

쉬운 접근법을 의심하는 몇몇 존재론자들은 ‘존재론어(Ontologese)’라는 특수한 언어에 호소하여 반론을 제기한다. 그들은 한국어나 영어에서 존재 물음이 손쉽게 대답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존재론어에서까지 그 물음이 손쉽게 대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논증한다. 즉, 사이더에 따르면, 한국어나 영어에서 “존재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아원자적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테이블은 존재하는가?”라는 존재 물음에 대해 “테이블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물리학적 맥락에서 대답할 수도 있고, “테이블은 존재한다.”라고 일상적 맥락에서 대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존재론 논쟁에 개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존재한다”라는 말을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는 “존재한다”라는 말이 ‘자연의 이음매(joints of nature)’를 올바르게 갈라내는 경우, 그리고 그 경우에만 그 말을 근본적 양화사로서 인정하고자 해야 한다. “존재한다”라는 말이 한국어나 영어에서 지니고 있는 애매성에 구애받지 않기 위해서는, 그 말의 의미를 가장 근본적 층위에서 규정하고 있는 존재론어를 사용하여, 무엇이 정말로 자연에서 존재하는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존재론 논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론어에 호소하는 철학자들은 근본적 양화사가 ‘자연의 이음매’에 대응한다고 생각한다. “어류” 같은 자연종 명사가 무엇을 지시하는지는 단순히 우리의 언어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하는 것처럼, “존재한다”라는 양화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우리의 언어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이음매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가령, 우리가 고래를 종종 “어류”라고 부른다고 하더라도, 고래는 어류가 아니라 포유류라는 점에서, “고래는 어류이다.”라는 우리의 주장은 거짓이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고래의 자연종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고래의 자연종이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결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국어나 영어에서 테이블이 “존재한다”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자연에서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 아원자적 입자일 뿐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가정한다면, “테이블은 존재한다.”라는 우리의 주장은 거짓이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존재하는지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결정해야 한다.

이제 토마슨은 존재론어에 대한 사이더의 입장이 쉬운 접근법을 약화시키지 못한다고 논증하고자 한다. 사이더는 마치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는 것과 유사하게 자연의 이음매가 양화사나 논리적 연결사와 같은 논리적 용어들을 끌어당겨 “존재한다”라는 말이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되어야만 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상정하지만, 토마슨은 자연의 이음매가 일종의 자석처럼 작용한다는 생각이 애초에 말이나 되는지에 대해 의심한다. 다만, 그는 사이더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제시하고 있다고 곧바로 일축하려 하기보다는, 그가 받아들이고 있는 논리적 용어들에 대한 가정을 공격하고자 한다. 즉, 토마슨에 따르면, (a) 사이더는 논리적 용어들의 기능에 대한 오해로부터 그 용어들이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b) 쉬운 접근법은 애초에 ‘자연의 이음매’를 상정하지 않고서도 논리적 용어들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논리적 용어들의 기능에 대한 오해를 벗어나 쉬운 접근법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논리적 용어들이 ‘자연의 이음매’라는 자석에 끌어당겨지고 있다는 (얼핏 말이 되는지조차 매우 불분명한) 입장에 굳이 개입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애미 토마슨

10. 2. 그저 또 하나의 형이상학일 뿐인가?

사이더는 쉬운 접근법을 받아들이는 축소주의자들조차 형이상학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또 하나의 형이상학을 옹호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존재론자들이 자연의 이음매가 존재한다는 논제에 개입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축소주의자들도 자연의 이음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질적 형이상학의 논제(substantive metaphysical thesis)에 개입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두 입장은 모두 자연의 이음매에 대한 인식적으로 형이상학적인 존재 주장을 하고 있고, 그 입장 중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결국 존재론 논쟁을 통해 밝혀져야 한다는 것이 사이더의 관점이다. 그가 자신의 관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하는 논증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논증: 쉬운 접근법을 받아들이는 축소주의자들은 그들의 접근법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도 실질적 형이상학의 논제에 개입해야 한다. 가령, “n이 Q라면, n은 Q임을 속성으로 지니고, 그래서 속성은 존재한다.”라는 주장은, “n이 Q이다.”라는 문장의 정의로부터 “속성은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얼핏 손쉬운 추론에 따라 도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특정한 정의만으로 우리가 반드시 참인 주장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 외부에서 주어지는 ‘형이상학적 압력’을 가정할 경우, 언어의 정의로부터 우리가 도출한 문장이 참이 아닐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즉, 우리가 “n이 Q이다.”라는 주장을 일상적 언어에서 받아들이고 있고, 그 주장으로부터 “속성은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도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속성은 존재한다.”라는 주장이 참일 것이라고 섣부르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속성은 존재한다”라는 주장이 정말로 자연의 이음매를 제대로 갈라내는 주장인지에 대한 존재론 논쟁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축소주의자들은 이러한 여지 자체를 없애기 위해 자연의 이음매에 대한 실질적 형이상학의 논제를 적극적으로 거부해야 한다. 자연의 이음매가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가정하는 입장에 대항하여, 자연의 이음매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입장에 그들이 개입하지 않는 이상, 언어의 정의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손쉬운 추론에 따라 참인 주장을 도출하고자 하는 쉬운 접근법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논증: 축소주의자들의 입장 존재론어의 가능성을 없애지 못한다. 한국어나 영어 같은 일상적 언어에서는 우리가 “n이 Q이다.”라는 문장의 정의로부터 “속성은 존재한다.”라는 참인 주장을 손쉬운 추론에 따라 도출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양화사만을 허용하는 존재론어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축소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손쉬운 추론이 일상적 언어에서 옳다는 사실만으로 존재론 논쟁이 곧바로 요점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일상적 언어를 버리고 존재론어를 사용하는 상황에서는 “존재한다”라는 말에 대응하는 실재의 구조가 무엇인지에 대한 존재론 논쟁이 여전히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일상적 언어에서 존재 물음에 대한 손쉬운 추론을 제시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는, 모든 존재론 논쟁을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낼 수 없다. 축소주의자들은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양화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갈 때에야 비로소 모든 존재론 논쟁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그들은 세계에는 필연적 구조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옹호하면서, 어떠한 양화사도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실질적 형이상학의 논제에 개입해야 한다. 축소주의자들이 존재론어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자들이 실질적 형이상학의 논제를 받아들이는 것만큼이나, 축소주의자들 역시 또 다른 종류의 실질적 형이상학의 논제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역설에 빠지는 것이다.


테어도어 사이더

10. 3. 이음매를 갈라내는 양화사를 회피하기

사이더는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양화사’를 회피하고자 하는 축소주의자들이 ‘자연의 이음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질적 형이상학의 논제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몇 가지 신콰인주의적 가정으로부터 도출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신콰인주의적 가정에 따르면, (a) 자연의 이음매를 둘러싼 존재론 논쟁은 ‘실질적 논쟁’이고, (b) ‘존재론’을 확장해야 하는지 ‘이데올로기’를 확장해야 하는지는 자연의 이음매에 따라 평가되어야 하며, (c) 양화사가 우리의 이론에서 필수불가결하다는 사실은 양화사가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낸다는 주장을 위한 ‘최선의 논증’이다. 이러한 신콰인주의적 가정은 사이더가 자연종 명사뿐만 아니라 양화사도 자연의 이음매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양화사에 대한 논쟁이 자연의 이음매를 둘러싼 실질적 논쟁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축소주의자들도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양화사에 대한 주장에 개입하고 있는 이상, 그들도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자연의 이음매에 대한 실질적 논쟁에 개입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들이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양화사’를 회피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단순히 ‘양화사’를 거부하는 것을 넘어서 그 양화사에 대응하는 ‘자연의 이음매’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 사이더가 신콰인주의적 가정으로부터 도출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토마슨은 애초에 신콰인주의적 가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축소주의자들에게는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양화사’를 회피하는 다른 길이 열려 있다고 지적한다. 사이더는 축소주의자들이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양화사’를 거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옳지만, 그들이 그 양화사를 거부하기 위해 ‘자연의 이음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질적 형이상학의 논제를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옳지 않다. P라는 진술을 보장하기를 삼가는 태도가 반드시 P라는 진술을 부정하는 태도를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중립적 태도를 취한 상태에서 P라는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거나, P라는 진술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으로도 P라는 진술을 보장하기를 삼갈 수 있다. 축소주의자들이 양화사가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낸다는 실질적 형이상학의 논제를 보장하기를 삼가려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반드시 자연의 이음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종류의 실질적 형이상학의 논제를 보장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토마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진술을 보장하지 않는 데에도 한 가지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P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곧바로 그 부정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다른 태도들도 있다. 즉, 우리는 중립으로 남을 수도 있다. 가능한 한 가지 태도는, 양화 구조라는 관념이 구체적인 방식으로 더 명확하게 해명되기 전까지는, 또는 그러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 관념을 보장하지 않는 것이다.그렇게 되면, 분명히, 쉬운 존재론에 대한 잠재적 비판(정의적 제약을 압도하고 분석성에 대한 주장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양화 구조에 의해 끌어당겨질 수 있는 양화사의 의미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근거한 비판)이 차단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비판이 사용하는 핵심 관념들에 대한 추가적인 해명 없이는 쉬운 존재론을 반박하고자 하는 혐의가 확립되지도 않을 것이다. (Thomasson 2015, 306)

철학의 역사에는 실제로 이러한 방식으로 실질적 형이상학의 논제를 보장하기를 삼간 입장들이 존재한다. 가령, 토마슨에 따르면, 라일은 마음이 비물질적이라는 주장을 거부하기 위해 마음이 물질적이라는 주장을 옹호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마음이 ‘물질적’인지 ‘비물질적’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애초에 ‘범주의 오류’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그 논쟁을 무력화하고자 한다. 또한 후설 역시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거부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관념론을 옹호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두 입장에 대해 ‘판단중지’를 내린 상태에서 그 두 입장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마찬가지로, 비엔나 학파는 플라톤주의를 거부하기 위해 유명론을 옹호하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플라톤주의든지 유명론이든지 어떠한 형이상학의 논제도 사이비 진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자 한다. 따라서 토마슨이 제시하는 쉬운 접근법은 철학의 역사에 비추어 보더라도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미 받아들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토마슨의 입장이 라일이나, 후설이나, 비엔나 학파의 입장과 모든 측면에서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입장이 철학의 역사에서 고전적 전통을 통해 지지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토마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더 중요한 요점은, 설령 쉬운 존재론자가 더 나아가 실재가 양화 구조를 가진다는 주장을 거부하고자 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반드시 실재의 구조는 양화 구조를 결여하고 있다는 형이상학적 주장을 보장함으로써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어떠한 입장을 거부하는 데 있어서 그러한 방식만이 유일하게 이용 가능한 선택지는 아니라는 점을 보기 위해 철학적 논쟁의 역사를 살필 필요가 있다. […] 나는 [라일, 후설, 비엔나 학파의] 이러한 개별적인 입장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보증하려고 의도하지는 않고, 단지 어떤 철학적 입장을 거부하는 고전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는 그 입장의 부정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입장(그리고 아마도 그 부정 역시)이 제시되는 방식에 잘못된 점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자 할 뿐이다. 즉, 용어들이 무의미하거나, 잘못된 범주 체계를 도입하거나, 관련 용어들의 역할에 대해 오해를 포함하거나, 혹은 그와 유사한 종류의 문제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Thomasson 2015, 306-307)

토마슨은 자신의 입장을 구체화하기 위해 동물원에서 두 살짜리 아이와 대화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고 제안한다. 두 살짜리 아이는 “우리 지금 코끼리 보러 갈 수 있어요?”라고 묻고, 우리는 “있다가 볼 거야.”라고 대답한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 아이는 우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있다가라니! 나는 있다가를 보고 싶어요! 내가 있다가를 볼 수 있도록 좀 올려주세요!”라고 말한다. 우리가 그 아이의 오해를 교정해 주기 위해 “아냐, 내 말은, 우리가 있다가를 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어.”라고 대답한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 중에서 어떠한 것도 있다가가 아니야.”라는 실질적 생물학의 주장에 개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 생물학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생물을 조사하여 그 중에서 있다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내야 하지만, 있다가가 생물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우리가 생물에 대한 연구를 따로 수행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단지 아이가 “있다가”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과, “있다가라는 생물이 존재한다.”라는 진술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뿐이다.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양화사에 대한 축소주의자들의 거부도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 질 수 있다. 축소주의자들은 양화사에 대응하는 ‘자연의 이음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질적 형이상학의 논제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양화사’라는 관념이 정말로 말이 되는지에 대해 보장하기를 삼가는 태도만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10. 4. 이음매를 갈라내는 양화사를 문제시하기

토마슨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양화사가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낸다는 주장이 오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문제시한다. 그는 ‘언어에 대한 기능적 다원주의(functional pluralism about language)’를 바탕으로 서로 다른 종류의 언어가 서로 다른 종류의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지적한다. 즉, 토마슨에 따르면, 물리학과 생물학에서 사용되는 ‘자연종 명사’나 ‘술어’가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해서, ‘양화사’나 ‘논리적 연결사’ 같은 논리적 용어들까지도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기능을 수행할 것이라는 가정까지 반드시 정당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종 명사나 술어로부터 논리적 용어까지도 ‘자연의 이음매’를 기준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뿐이다. “실재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용어라는 관념은 (사이더도 충분히 인정하듯이) 자연종 용어, 곧 특정한 종류의 술어를 특징짓기 위해 도입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는 그 관념이 적절한 동기를 지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관념이 양화사와 같은 논리적 용어에까지 일반화될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Thomasson 2015, 309)

사이더는 ‘순수성’에 호소하여 양화사가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낸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고자 한다. 가령, 신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한다면, 도시, 미소, 사탕 따위를 자연의 근본적 요소로 두지는 않았을 것이니, 우리는 자연에 존재하는 근본적 요소만으로 근본적 진리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하고, 그 근본적 요소는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야 한다는 것이 사이더의 입장이다. 그러나, 토마슨에 따르면, (a) 근본적 진리 속 모든 관념들이 근본적이어야 한다는 ‘전면적 순수성(full-blown purity)’ 논제와 (b) 근본적 진리 속 모든 술어들이 근본적이어야 한다는 ‘제한된 순수성(restricted sort of purity)’ 논제는 서로 구분된다. 자연에 어떠한 근본적 요소가 존재하고, 근본적 진리가 근본적 요소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요소가 반드시 양화사에 대응하는 요소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는 ‘자연종 명사’나 ‘술어’가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낸다는 주장에는 동의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양화사’ 같은 논리적 용어들까지도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낸다는 주장에까지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순수성’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양화사가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낸다는 주장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다.

토마슨은 논리적 용어들이 ‘형식적(formal)’이고 ‘주제 중립적(topic-neutral)’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사이더의 입장을 비판하기도 한다. 논리적 용어들이 대상이나 분야에 상관없이 어떠한 주제에나 적용될 수 있는 순전히 형식적 언어라는 것은 논리학에 대한 고전적이고 중심적인 생각이다. 생물학적 용어들이나 물리학적 용어들는 특정한 사태를 기술하는 용어로서 내용을 지니지만, 논리적 용어들은 아무런 사태도 기술하지 않는다. 우리는 논리적 용어들을 내용을 지닌 다른 용어들에 적용하여 추론을 전개할 수 있을 뿐, 논리적 용어들만으로 세계를 기술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둔스 스코투스, 칸트, 로체, 프레게, 후설, 카르납, 드 모르간 등 철학의 역사에서 대다수의 인물들은 대체로 논리적 용어들이 세계를 기술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동의하였다. 따라서 논리적 용어들이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낸다는 사이더의 입장은 논리학에 대한 주류 이해에서 대단히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단순히 주류 이해와 다르다는 것만으로 사이더의 입장이 틀렸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논리적 용어들이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낸다는 주장이 결코 철학의 역사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오히려 주류 이해는 사이더의 입장과 달리 ‘자연의 이음매’를 도입하지 않고서도 논리적 용어들을 무리 없이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토마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러한 노선을 따르는 몇 가지 착상을 얻기 위해, 우리는 논리를 형식적인 것으로 다룬 역사를 다시 살필 수 있다. 논리를 형식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고전적 견해의 기본 착상은 논리가 주제 중립적이라는 착상, 혹은 사안에 대해 독립적이라는 착상이다(McFarlane 2000, 51). 하지만 논리가 주제 중립적이라면, 논리의 주제는 세계의 구조가 아니다. 논리는 생물학, 정치학, 물리학의 용어들과 달리, 실재의 개별적 부분이 지닌 구조를 지도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단 우리가 형식적/질료적이라는 구별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림을 제시할 수 있다. 즉, 어떠한 질료적 술어들은 세계를 (그 일부의) 이음매에 따라 갈라내도록, 특정한 구조를 지도화하도록 고안되었을 수 있다. 가령, 세계의 구조를 생물학적 혹은 물리학적 자연종의 구조 말이다. 하지만 논리적 용어의 뚜렷한 특징은, 그 용어들이 기술되는 대상이나 속성 사이의 구별이나 논의되는 영역 사이의 구별과는 독립적으로, 어떠한 종류의 질료적 용어들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Thomasson 2015, 312)

우리는 실제로 자연의 이음매를 도입하지 않고서도 논리적 용어들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아무런 문제 없이 설명할 수 있다. 가령, “이다.”라는 용어는 주어와 술어로부터 판단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고, “그리고”나 “또는”이라는 용어는 판단으로부터 추론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한다. 논리적 용어들이 일종의 판단과 추론을 형성하는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이러한 입장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논리적 용어들이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이더의 입장을 우리가 옹호해야 하는 이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의 이음매’에 대한 가정은 논리적 용어들을 설명하는 작업에서 어떠한 자리도 차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자연의 이음매가 마치 자석처럼 논리적 용어들을 끌어당긴다는 생각이 말이나 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이상, 논리적 용어에 대한 더욱 손쉬운 설명을 놓아두고서 굳이 자연의 이음매에 호소하려는 비직관적이고 비주류적인 전략을 취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토마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양화사 및 논리적 연결사와 같은 논리적 용어들의 역할이 세계를 ‘논리적’ 구조의 이음매에 따라 갈라내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용어들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가? […] “이다”와 같은 용어는, “럭키 핏은 말이다.”라고 말할 때처럼, 우리가 이름과 술어를 하나의 판단으로 결합할 수 있도록 한다. 또 다른 용어들은 판단을 가지고 추론할 수 있게 하는데. 가령 “또는”은 우리가 “러키 핏은 말이이다. 또는 럭키 핏은 소이다.”라고 추론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의 사고와 언어에서 이러한 용어들의 역할과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 용어들이 특별한 종류의 논리적 구조를 지도화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으로 생각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 용어들의 역할은 구조를 추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때로는 구조를 추적하는 내용일 수도 있는) 질료적 내용을 포함하는 개념들을 가지고 추론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Thomasson 2015, 315)

따라서 토마슨은 우리가 실질적 형이상학의 논제에 개입하지 않고서도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양화사를 거부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양화사와 같은 논리적 용어들이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지 않는다는 축소주의자들의 입장이 자연의 이음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질적 형이상학의 논제에 반드시 개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축소주의자들은 양화사의 역할에 대한 ‘언어적 분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 뿐, 자연의 이음매에 대한 또 다른 ‘인식적으로 형이상학적인 존재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양화사가 실재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용어라는 생각을 언어적 분석에 근거하여, 곧 양화사는 그런 종류의 용어가 아니며, 그러한 기능이 양화사가 수행하려는 일도 아니라는 분석에 근거하여 거부한다.”(Thomasson 2015, 315-316) 즉, (a) 양화사와 같은 논리적 용어들이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낸다는 주장이 그다지 당연하지 않은 가정들에 근거하여 성립하고 있고, (b) 우리가 자연의 이음매를 도입하지 않고서도 양화사를 설명하는 다른 설득력 있는 입장도 알고 있는 이상, (c) 존재론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커다란 입증의 부담에 직면해야 한다. “철학의 역사 전반에 걸친 논리에 대한 사유에서 형식성이라는 관념이 지닌 온 우위성을 고려할 때, 입증의 부담은 그 관념을 거부하고 우리의 논리적 개념들에 대해 구조를 지도화하는 다른 기능을 제안하는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것처럼 보인다.”(Thomasson 2015, 316-317) 그 입증의 부담을 견뎌내고서 존재론자들이 축소주의자들에 대해 승리하기에는 전망이 그다지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참고

Thomasson, A. L. (2015) Ontology Made Eas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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