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은 결과논변으로부터 자유의지를 구하는데 실패했는가?

도널드 데이비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이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양립가능성을 부정하는 결과논변에 대한 하나의 반박으로 인정돼야하지만, 그 반박이 성공적이지는 않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거칠게 요약하고 제 나름대로 비판한 글입니다. 읽고 피드백해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 텍스트 : 홍지호. (2005). ‘결과논변’과 무법칙적 일원론. 철학적분석, (11), 33-60.

결과논변이란 결정론이 참이라면 우리의 행위들은 과거의 사건들과 자연법칙에 따른 결과물이므로 자유의지란 성립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를 논리적 필연성 기호라고 하고, 행위자가 존재하기 전의 특정한 시간의 세계 상태를 P, 그리고 L을 자연법칙들의 연접이라고 하고 그 시각 이후의 또 다른 특정 시각에서 참인 임의의 명제를 F라고 하고, N(x)를 "X는 참이고, 모두가 X가 참이라는데에 자유롭지 않다"를 나타내는 기호라고 하며 N(x)와 □(x ⊃ y)로부터 N(y)를 도출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가정하는 베타규칙을 상정하면 다음과 같은 논증이 성립한다.

P1. □[(P&L) ⊃ F] (결정론 전제)

P2. N(P&L) (과거 및 법칙 고정성 전제)

C1. NF (P1과 P2, 그리고 베타규칙)

이 논변을 풀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P1은 P와 L이 동시에 참이고, F가 둘이 동시에 참일 때 참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다. 그리고 P2는 N&L이 모든 사람에게 참이라는 것이고, 그에 따라 나온 결론이 F는 모든 사람에게 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데이비슨은 무법칙적 일원론으로 대항한다. 무법칙적 일원론은 세 가지 전제를 조화시킨다.

(1) 어떤 정신적 사건들은 물리적 사건들과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한다.

(2) 인과성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

(3) 정신적 사건들을 예측하고 설명하는 엄밀한 결정론적 법칙은 없다.

이 세 가지를 조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법칙이 사건 기술들 사이의 관계라는 것을 포착하는 것이다. 사건을 기술하는 방식에 따라 그 사건이 법칙에 포함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정신적 용어로 기술된 사건은 법칙에 포섭될 수 없지만 그것을 물리적 용어로 재기술하면 법칙에 포섭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할 경우 실체이원론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정신적 사건의 무법칙성을 지킬 수 있다.

이 무법칙적 일원론이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정신적 사건들은 법칙과 과거 사건에 포섭되는 사건들이 아니기에 자유의지도 이런 정신적 사건 중 하나로서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주장할 경우 다음과 같은 반박이 제기될 수 있다. 데이비슨의 논변을 따르면 데이비슨은 정신적 사건에 대한 결정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즉, 데이비슨은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없다는 양립불가론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데이비슨은 정신적 사건이 물리적 사건으로 재기술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고 반박할 경우, 다시 그 재기술된 물리적 사건은 결과논변에 포섭된다는 점에서 데이비슨은 결정론과 자유의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데 실패하게 된다.

그런데 이 반박은 "재기술"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재기술이 환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데이비슨은 분명 정신적 사건, 정신적 속성 언어를 활용하여 기술된 사건이 결정론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물리적 사건으로 재기술되고, 그 두 사건은 물리적 차원에서는 동일하지만 속성적 차원에서는 동일하지 않다. 그렇기에 정신적 사건이 물리적 사건으로 재기술 된다는 것이 곧바로 정신적 사건이 결과논변에 포섭된다는 주장은 데이비슨의 논지에 대한 왜곡 내지는 은폐를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물리적 사건들로 재기술 가능한 정신적 사건들이 바로 자유의지가 성립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통해 문제가 전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주장할 경우 정신적 사건이 물리적 사건과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전제 자체가 의심스러워질 수 있다. 정신적 사건이 물리적 사건에 영향을 주고 정신적 사건을 배제할 경우 물리적 사건의 결과가 달라졌을지에 대해서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면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다시 데이비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이 일종의 부수현상론이 아니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4개의 좋아요

물리적 사건을 정신적 사건으로 재기술할 수 있거나 그 반대의 경우라고 할지라도 양자가 동일하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 근거하여 여전히 우리가 어떤 정신현상들을 두고 자유의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씀 같습니다. 동의가 되네요.
다만 어떤 특징을 가진 정신현상을 두고 자유의지라고 부르는지에 대한 의견이 궁금하며, 만약 그런 적극적 설명을 제시할 때 그 설명을 지지할 수 있는 방법도 같이 제시될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2개의 좋아요

잘 읽었습니다. 최근에 저도 "Mental Events"를 가지고 세미나를 했어서 반갑네요.

그냥 짧게 두 가지 정도만 의견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1. 데이빗슨의 주장에서 "속성적 차원"이 언급될 여지는 없어보입니다. 아시다시피, 데이빗슨과 김재권의 사건론의 차이는 데이빗슨이 사건을 단칭 인과에 의해 개별화되는 개별자(particular)로 보는 반면에 김재권은 대상, 속성, 시간의 삼중체(3-tuple, <a, F, t>)로 구성된다고 봅니다. 정신적 사건이 무엇이냐에 대해 데이빗슨은 어떤 사건이 정신적 기술(description)을 가진다고 답하는 반면에 김재권은 정신적 속성이 예화된 것이라고 답을 할 테죠. 이 점에서 데이빗슨이 사건에 관해 얘기할 때 속성이라는 것은 무대에 등장하지 않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데이빗슨도 원치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2. 제가 데이빗슨의 논문을 읽고 든 생각은, "한 줄로 요약하면 사건들을 지배하는 건 물리 법칙이긴 하지만 한 사건에 대한 물리적 기술이 주어져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정신적 기술을 결정할 수 없다는 거네"였습니다. 제가 맞게 요약했다면, "정신적 사건들이 바로 자유의지가 성립하는 지점"이라고 하신 부분은 저에게 잘 이해가 안 되네요. 어떤 사건에 대한 단순히 정신적 술어를 통한 언어적 기술이 있다는 게 왜 자유의지가 성립하는 지점이 되는 건가요? ("지점"이라는 표현도 분명히 해주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네요 ㅎㅎ)

2개의 좋아요

댓글 감사합니다.
일단 저는 자유의지에 의거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의 두 가지 조건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1) 심적 사건이 인과력을 지닐 것 (2) 정신적 사건이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었음"이라는 두 가지 조건입니다. 그리고 이 조건은 제가 임의적으로 정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에서 논의되는 두 조건들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야구장을 가기로 결단했다"와 같은 정신적 사건이 있고 "나는 야구장에 갔다"라는 물리적 사건이 있으면 "나는 야구장을 가기로 결단했다"라는 정신적 사건이 "나는 야구장에 갔다"라는 물리적 사건을 야기했지만 "나는 야구장을 가기로 결단했다"라는 정신적 사건이 사실이 아닐 수 있었음을 제시하는 것이죠.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논증은 본향을 찾아 떠나는 철학쟁이 나그네 : 네이버 블로그 에서 홍지호씨가 잘 논증했으니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제 블로그 글에도 나와있듯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다고 해서 무법칙적 일원론이 곧바로 옹호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법칙적 일원론에 반대하는 환원주의도 저 조건을 만족시키거든요. 이에 대한 논의는 제 공부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1개의 좋아요
  1. 정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종왕(2004)도 데이비슨주의자들은 속성이원론을 차용하지만 데이비슨 본인은 속성이라는 개념을 활용하지 않고, 오히려 '특성'(character)라는 단어를 더 선호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도, 이종왕의 의견도 데이비슨의 속성제거론은 상당히 문제가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데이비슨이 정신적 속성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 맞다면, 그는 물리적 속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지 아니면 정신적 속성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것인지에 대해 답을 해야할 것입니다. 물리적 속성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데이비슨은 물리적 속성들이 보편자이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당히 곤란한 수준의 주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정신적 속성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결국 데이비슨은 정신사건이 부수현상이라고는 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물리적 속성은 존재하지만 정신적 속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거주의 내지는 정신적 속성은 부수현상에 불과하다는 '정신속성부수현상론자'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데이비슨의 주장을 그대로 옹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 일단 제가 글을 상당히 거칠게 쓴 관계로, 문제를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1) 자연주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강한 결정론을 어떻게 반대할 것인가 (2) 정신적 사건이 물리적 사건으로 환원되는가

강한 결정론을 거부하는 것은 김재권의 환원주의나 데이비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이나 공통적으로 가능한 작업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논증을 홍지호(2010)씨가 제시해주셨고, 저도 나름대로 요약했습니다. 본향을 찾아 떠나는 철학쟁이 나그네 : 네이버 블로그

하지만 환원주의는 말 그대로 정신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이 속성적 차원에서 동일하다는 것이고, 데이비슨이 주장하는 것은 사건의 차원에서 동일할 뿐 심리적 개념과 물리적 개념은 서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여기서 제시하는 것은 사실 (1)보다는 (2)에 더 부합할 것 같습니다. 데이비슨은 <<주관, 상호주관, 객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심적 개념의 규범적 속성들과 인과적 속성들은 연결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심리적 설명으로부터 규범적 측면을 누락시키려 든다면, 심리적 설명은 더 이상 그것이 달성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않을 것이다. 주체의 행위의 이유 그리고 주체의 믿음의 변화에 관해서 우리는 물리학의 법칙에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만들어질 수 없는 설명까지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간절한 관심을 가진다. 반면에 물리학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완전하고 정밀하게 만들 수 있는 법칙을 목표로 삼는데, 이는 심적 개념의 설명 목표와는 다른 목표이다. 심적 개념에서의 인과적 요소는 그 개념들이 결여하는 정밀성을 보충한다. 의도적 행위가 믿음과 욕구에 의해서 야기되고 설명된다는 것은 의도적 행위의 개념의 부분이다."(도널드 데이비슨(2018) 『주관, 상호주관, 객관』(김동현 역). 느린생각. (2001). 414)

환원주의의 주장대로 물리적 사건과 정신적 사건의 동일성이 속성적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이라면 심적 개념의 규범적 특성은 도외시되고, 인간의 의사소통 전반의 문제는 가리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는 물리적 기술이 주어져있다고 해서 정신적 기술을 결정할 수 없는 것이 정확히 말하면 "강한 결정론을 거부하는 근거로서의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성립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올린 글을 보고 제가 댓글에서 정리한 내용을 유추할 수 없었습니다. 글이 부정확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주제를 가지고 공부중이고, 계속 문제를 세부화하고 해결책을 계속 정리중에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댓글 주시면 제 정신적 성장과 공부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1개의 좋아요

챠머스가 그런 얘길 했다니 재밌네요 ㅋㅋㅋ 뭐 결국은 심신론에서 김재권의 최종적인 입장은 환원적 물리주의긴 했지만요

심적 사건의 인과적 힘을 부정한다는 건 "나는 창문을 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창문을 열었다"처럼 우리의 마음 상태와 행위 사이에 인과적 연결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종종 철학적 직관이라는 것이 의심스러울 때가 있지만 적어도 이런 사실은 일반적인 수준에서 쉽게 부정하기 어려워보이고 이를 깨기 위한 입증의 부담은 부수현상론이 참이라고 주장하는 쪽에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