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데이비슨인가?: 주장과 의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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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1학년생 시절에 도널드 데이비슨의 『진리와 해석에 관한 탐구』를 처음으로 접하였다. 그 당시에는 정말 이 책에 수록된 논문을 하나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학부생 시절 내내 하이데거와 가다머 같은 20세기의 대륙철학자들에 대해서만 공부한 학생이었다. 대학원도 철학적 해석학을 전공할 계획으로 입학한 것이었다 보니, 데이비슨 같은 분석철학자의 글을 읽기 쉽지 않았던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특히, 데이비슨은 분석철학자 중에서도 글을 난해하게 쓰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의 논문들은 프레게나 콰인에 대한 배경 지식을 전제한 채 주장을 전개할 뿐만 아니라, 내용을 항목별로 정리해 주지 않은 채 대개 하나의 통글 형태로 쓰여 있기도 하다. 입문자가 읽기에는 진입 장벽이 상당히 높은 것이다.

올해 초까지도 데이비슨의 글을 이해하기란 너무 어려웠다. 그동안 내 철학적 성향이 크게 바뀌어서 대륙철학보다는 분석철학을 더 많이 공부하게 되었는데도, 그래서 크립키, 퍼트남, 로티, 맥도웰, 브랜덤 같은 인물들의 논의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데이비슨의 글만큼은 읽을 때마다 머리를 싸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데이비슨의 「진리와 의미」와 「형이상학에서의 진리의 방법」을 다시 공부하다 보니 불분명하던 내용들이 갑자기 선명하게 파악되기 시작했다. 특히, 오늘 「진리와 의미」를 읽다가 이전까지 데이비슨의 언어철학에 대해 파편적으로 이해했던 내용들이 한 번에 짜 맞춰지게 되어서 굉장히 기뻤다. 그동안 일어난 작은 발전(?)을 기념하기 위해 데이비슨의 언어철학을 개략적으로 해설하고 그의 철학이 지닌 의의를 간략히 제시해보고자 한다.

  1. 진리론과 의미론

언어철학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의미론의 성립이다. 다시 말해, 언어와 언어가 표현하는 대상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데이비슨은 폴란드의 논리학자 타르스키가 제시한 소위 '규약 T(convention T)'라는 진리 조건을 바탕으로 의미론을 구성하고자 한다. 기본 아이디어는 매우 간단하다. 언어 L을 해명하는 의미론이란 바로 언어 L의 모든 문장이 언제 '참'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이론이다. 언어의 의미에 대한 이해와 언어가 참이 되는 조건에 대한 이해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가령, "Snow is white."라는 영어 문장의 의미가 무엇인가? "Snow is white."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곧 이 문장을 우리 한국어 문장으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이 문장이 언제 '참'이 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즉, "Snow is white"는 눈이 흴 경우 그리고 그 경우에만 참이다. "Snow is white"와 짝지어질 수 있는 우리말 문장은 "눈은 희다."이다. 따라서 의미론이란 특정한 문장 s가 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 p가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구조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구조를 일반화할 경우 우리는 소위 '규약 T'라고 일컬어지는 다음과 같은 형식을 도출할 수 있다.

  • s는 p일 경우 그리고 그 경우에만 참이다.

즉, s의 자리에는 우리가 의미를 묻고 있는 언어 L의 모든 문장이 들어간다. p의 자리에는 s를 참으로 만들어주는 조건이 들어간다. 가령, 우리는 p의 자리에 s 자체를 직접 집어넣어서 s에 대한 회귀적 정의를 만들 수 있고("Snow is white"는 snow is white일 경우 그리고 그 경우에만 참이다.), 혹은 s의 번역문을 집어넣어서 s에 대한 명시적 정의를 만들 수도 있다("Snow is white"는 눈이 흴 경우 그리고 그 경우에만 참이다.). 중요한 것은, 대상이 되는 언어 s가 참인 상황에 대해 공외연적(coextensive)인 p를 제시하는 작업이다.

  1. 원초적 해석과 자비의 원칙

이러한 의미론은 '원초적 해석(radical interpretation)'이라고 일컬어지는 과정에서 번역이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해명한다. 즉,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야생 부족과 만나 그 사람들의 언어를 해석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가령, 야생 부족이 토끼를 가리키면서 "가바가이"라고 외친다. "가바가이"라는 발화에 대한 해석이 도대체 어떻게 일어나겠는가? 첫째로, 우리는 "가바가이"가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들이 무엇인가 '참'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가바가이"는 참이다.). 둘째로, 우리는 "가바가이"가 참인 상황과 짝지어질 수 있는 한국어 문장을 발견하고자 해야 한다(p일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구체적으로 어떠한 한국어 문장이 "가바가이"가 참인 상황에 대응하는지는 논란이 있다. "가바가이"에 대응하는 정확한 번역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 곧 '번역불확정성(indeterminacy of translation)'이라고 알려진 논란은 결코 종결되지 않는다. 다만, 중요한 것은, 번역이란 "가바가이"가 참인 상황에 대응하는 한국어 문장 p를 어떻게든지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관용의 원칙(principle of charity)'이라고 일컬어지는 중요한 사실이 도출된다. 즉, 어떠한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든지, 우리는 그 문장 s가 한국어 문장 p와 짝지어질 수 있다고 기본적으로 가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s가 참이 되는 상황을 한국어 문장 p에서 발견해내고자 해야 한다. 이러한 가정이 없이는 애초에 s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시작될 수조차 없다. 상대편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상대편이 참이라고 말하는 내용이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내용과 짝지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요청된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편의 말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상대편이 우리의 언어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짝지어질 수 있는 내용을 발화하고 있다고 암묵적으로 믿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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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론서를 내도 좋을만한 퀄리티네요. 데이빗슨도 글을 이렇게 쓰면 참 좋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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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슨에 관심이 많았는데, 딱히 능력의 한계로 읽을 수 있는 자료가 없어 난감하던 중 오아시스를 만난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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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야생 부족과 만나 그 사람들의 언어를 해석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가령, 야생 부족이 토끼를 가리키면서 "가바가이"라고 외친다. "가바가이"라는 발화에 대한 해석이 도대체 어떻게 일어나겠는가? 첫째로, 우리는 "가바가이"가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들이 무엇인가 "참"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가바가이"는 참이다.). 둘째로, 우리는 "가바가이"가 참인 상황과 짝지어질 수 있는 한국어 문장을 발견하고자 해야 한다(p일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데이비슨은 잘모르지만 이 부분을 보니 <콰인과분석철학>에서 인용된 기억이납니다. 데이비슨이 콰인철학을 전제했다고 한게 이런것 때문인가봅니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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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대 신상규 교수님하고 다른 데이비슨으로 석사논문을 썼던 선배하고 저녁 식사를 하다가 데이비슨에 대해서 언급했던 기억이 납니다. 30년 전에 데이비슨 의미론 관련한 석사 논문을 받고 읽어보니 타르츠기를 인용해서 기호논리학적 부호가 잔뜩 나오고 자비이론을 언급하면서 그 유명한 "가바가이"로 인해서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약간은 비판적인 입장에서 의미론이나 사용론이나 현실적으로 무슨 유용성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신교수님 말씀은 이제 현대철학의 흐름은 그런 논의들이 히스토리가 되었고 인공지능 등 뭔가 다른 논의가 주류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서강대학교가 분석철학이 유명했다고 하는 마지막 시기에 학부를 다녔지만 당시에도 분석철학에 대해서 개괄하는 수업이 없었던게 매우 아쉬웠습니다. 이한조 선생님 같은 분은 개별 과목 언어철학, 과학철학에서 이것 저것 단편적인 말씀을 하셨지만 분석철학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없는 사람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어려웠습니다. 분석철학도 철학사처럼 전체적인 주장들에 대한 통시적 이해가 되고 나서 세부적인 논문들을 읽어도 이해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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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신상규 교수님이 인공지능쪽으로 관심이 많으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닌가 하네요. 사실, 요즘 분석철학 논의들을 보면 예전처럼 하나의 ‘주류’ 논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가령, 형이상학에서는 메타존재론이, 인식론에서는 합리성에 대한 논의나 지각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윤리학에서는 덕이나 성품의 문제가 많이 다루어지는 것 같은데, 이들 모두를 묶을 수 있는 ‘21세기의 분석철학의 흐름’은 저로서는 찾기 어렵더라고요. 다들 각자의 분야에서 각자의 담론을 만들어 가는 게 오늘날 철학의 모습이 아닌가 해요. 철학도 너무 세분화되어서, 조금만 특정 분야를 벗어나면 다른 분야에서는 무엇이 중요하게 논의되는지 알기 어려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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