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결'?

사이더는 Writing the Book of the World에서 형이상학이 'carve reality at its joints'하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이때 'carve reality at its joints'는 흔히 '실재의 결을 따라 자르다' 와 같이 번역됩니다. 하지만 전 (1) '실재의 결을 따라 자르다'는 명백한 오역일 뿐 아니라 (2) 철학적으로 misleading하다고 주장하겠습니다.

  1. '실재의 결을 따라 자르다'가 명백한 오역인 이유

'Carve reality at its joints'는 도축 관련 비유입니다. 도축을 할 때 도축업자와 독립적으로 구조를 갖고 있는 동물 사체가 있고, 그 동물 사체를 도축을 할 때 그 구조 (관절) 를 따라 도축을 하지요. 이 도축 행위를 형이상학에 비유를 하면서 사이더는 다음을 설명하고 싶어하는 겁니다: 우리의 철학적 행위와 독립적으로 구조를 갖고 있는 실재가 있고, 이런 구조를 따라 실재를 '도축'하는 것이 형이상학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깐 'carve reality at its joints'는 '실재의 관절을 따라 도축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관절을 따라 도축하는 행위는 결을 따라 자르는 행위와 다릅니다. 관절을 따라 도축하는 행위는 동물 사체를 도축하는 것이고, 결을 따라 자르는 행위는 주로 살코기를 자르는 행위지요. '실재의 결을 따라 자르다'라고 번역되는 영어 구절은 'cutting reality along the grain'이지, 'carving reality at its joints'가 아닙니다.

  1. '결을 따라 자르다'가 철학적으로 misleading 한 이유

앞서 보였듯이 '실재의 결을 따라 자르다'는 오역입니다. 하지만 단순 오역이라면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 '실재의 결을 따라 자르다'는 오역일 뿐 아니라 사이더의 중요한 통찰을 놓치고 있고 철학적으로 misleading하다고 주장하겠습니다.

2-1 독립성

도축 관련 비유를 하면서 사이더가 전하고 싶은 통찰은: 실재가 우리의 생각과 독립적이라는 것입니다. 동물 사체는 도축업자의 도축 행위가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연 그 자체죠. 이런 자연 그 자체의 것을 도축업자가 도축함에 있어서 자연 그 자체에 있는 구조를 따라 도축한다는 것이 사이더가 전하고 싶은 통찰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결을 따라 자른다' 라는 비유를 쓰게 되면 이 통찰을 놓치게 됩니다. 왜냐면 우리가 '결을 자른다' 하면 동물 사체를 자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도축업자가 도축한 고기를 요리사가 요리한 후 내어준 고기 덩어리의 결을 자른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니깐 형이상학이 결을 따라 자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면 실재가 이미 인간에 의해 매개됐다고 생각할 여지를 줍니다.

2-2 degree of freedom

도축업자가 도축을 할 때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미 동물 사체는 어깨, 무릎, 다리, 등으로 나눠져있고, 도축업자는 그대로 나누면 됩니다. 도축업자는 degree of freedom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이더가 보는 형이상학도 실재를 도축할 때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미 실재의 구조는 규정적으로 주어져있고, 그대로 나누면 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사이더가 전하고자 하는 통찰은 근본적인 언어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실재론적 통찰입니다.

하지만 '결을 따라 자른다'라고 번역을 하면 이런 실재론적 통찰을 놓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고기의 결을 따라 자르는 방법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을 따라 자른다' 라는 번역을 채택하게 되면 마치 실재를 도축하는 근본적 언어가 여러 개가 있다는 반실재론적인 테제를 개진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세게 말하면, 형이상학을 실재의 결을 따라 자른다는 행위라고 생각을 한다면 형이상학이 실재의 관절을 도축하는 행위라는 비유가 틀리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결론

전 'carve reality at its joints'를 '실재의 결을 따라 자르다' 로 번역하는 것이 명백한 오역일 뿐 아니라 철학적으로 misleading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제가 맞다면, '실재의 결을 다라 자르다'라고 번역을 하게 되면 사이더의 독립성과 연관된 통찰을 놓칠 뿐 아니라, 사이더의 비유가 반실재론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번역을 할 때 기존 번역을 따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번역이 '자연의 결을 따라 자르다'라면 그 번역을 채택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맞다면 새 번역을 찾는 것을 고려해봐야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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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마디'나 '자연의 관절'이 좀 더 좋을까요? '마디' 정도면 joint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원래 느낌을 좀 더 잘 살릴 수 있겠네요. ('관절'은 너무 직역인 것 같아서요;;) 하지만 사실, 저는 '자연의 결'이 딱히 나쁘지는 않은 번역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처음 이 번역어를 들었을 때 떠올렸던 이미지는 《장자》 내편 〈양생주(養生主)〉의 '포정해우(庖丁解牛)' 고사였거든요.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만 보여 손을 댈 수 없었으나, 3년이 지나자 어느새 소의 온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神)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다. 그러면 천리(天理)를 따라 쇠가죽과 고기, 살과 뼈사이의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의 몸이 생긴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 한 번도 칼질을 실수하여 살이나 뼈를 다친 적이 없습니다. 솜씨 좋은 소잡이가 1년 만에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보통 소잡이는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 칼은 19년이나 되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저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움직이는 데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9년이 되었어도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근육과 뼈가 엉긴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그 일의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하여 경계하며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칼의 움직임을 아주 미묘하게 합니다. 살이 뼈에서 털썩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칼을 든 채 일어나서 둘레를 살펴보며 머뭇거리다가 흐뭇해져 칼을 씻어 챙겨 넣습니다."

'결'이라는 게 반드시 이미 썰어둔 고기 덩어리의 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육과 뼈 사이의 자연스러운 틈을 의미할 수도 있는 단어이다 보니, 저는 '결'이라고 해도 의미가 크게 왜곡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물론, 더 좋은 번역어가 있다면 그쪽을 선택하는 게 필요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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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 고사에 근거해 ‘결’로 옮기는 게 자연스럽다고—‘이’라는 건 어떤 것에 새겨진 결을 의미하지, 분절을 의미하지 않다보니—판단하고 그렇게 쓰는 중이에요. ‘마디’나 ‘관절’이 한국어에서는 어색함이 있다보니…. 마땅한 좋은 말이 없어서 아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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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야기지만,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The time is out of joints"도 한국어 번역에서 논란거리가 자주 되죠. 특히,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이 구절을 엄청 중요하게 인용하는데, 국역에는 joint를 '이음매'로 번역하였더라고요. (하지만 저 구절에서는 joint뿐만 아니라 time도 '시간'이라고 해야 하는지 '시대'라고 해야 하는지가 논란거리라는 게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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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나 실재에 '관절'이란 단어를 쓰는 게 어색하다고 느껴지실 수 있겠지만, 영어로 표현해도 그 어색함이 덜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사이더가 이런 어색함을 이용해서 rhetorical force 를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 어색하다는 이유만으로 의역을 하게 되면 사이더의 rhetoric이 전달이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디' 는 조금 모호하다고 생각합니다. '마디'는 손가락 마디라던가 하는 곳들에 자주 쓰이니깐요. 애초에 동물 사체의 마디가 정확히 뭔지도 모르겠습니다. '관절'과 비교했을 때 모호한 감이 있습니다.

근데 장자 단락은 잘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저 단락에서는 '결을 따라 자른다' 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아서요. 또,

라고 하셨는데, 일단 '결을 따라 자른다'의 모호성은 드러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비유가 의미하는 바가 관절을 따라 도축을 한다는 것인데, 근육과 뼈 사이를 자른다고 해석을 하면 잘못된 해석을 하는 것 아닌가요? 관절 도축의 비유를 뼈/근육 비유로 바꾼다면 비유가 제대로 적용이 안 되는 메타형이상학적 관점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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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맞는 말이긴 합니다. 한 가지, 이것도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joints of nature"는 사이더의 표현이라기보다는 플라톤의 표현으로 알고 있어요. 플라톤이 『파이드로스』에서 아마 저 표현을 사용할 거예요.

‘천리에 따라’의 ‘천리’가 지금 말로는 ‘자연의 이치’ 내지는 ‘자연의 결’에 해당하니 (‘천운’이나 ‘천재지변’과 같이 ‘천’의 의미가 후대의 번역어 ‘자연’에 상응하는 용법이 있죠) 저기에서 ‘천리’가 곧 플라톤 비유의 ‘joint of the nature’와 맞닿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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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보니 필요하다면 ‘절리’(마딧결?) 따위를 쓰는 것도 가능할 것 같네요. 다만 절리…라고 하면 주상절리만 연상되긴 해요:joy:

'천리'가 '자연의 결'에 해당하고 '천리'가 사이더의 비유와 맞닿는다고 해도 제 주장은 유지가 됩니다. 왜냐면 결국 이 둘은 다른 비유를 통해 같은 주장을 하려는 것 뿐이지, 같은 비유를 하는 것이 아니니깐요. 단순히 같은 주장을 하기 때문에 사이더의 비유를 장자의 그것으로 번역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포스팅에서도 주장했듯이, 애초에 결을 따라 자른다는 것은 관절을 따라 도축하는 것과 엄연히 다른 행위고 '결을 따라 자른다'라는 번역은 다른 직관을 줄 수 있습니다. 모호하기도 하고요. 단순히 '관절' 이란 단어를 쓰기 어색하다는 이유로 '관절' 이란 번역을 피해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어색한 건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이 어색함을 사이더가 의도한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에요.

+) 'carve reality at its joints'를 '실재의 결을 따라 자른다'라고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은 단락을 번역할 수 없게 됩니다:

Ontological realism states that there is the fundamental language. Analogically put, the realist metaphysics posits that reality has a structure prior to our philosophical activities (i.e. it has joints), and the task of metaphysics is carve reality at its joints. A version of ontological anti-realism states that there are multiple fundamental languages. Analogically put, the anti-realist metaphysics posits that reality has a 'grain' and that the task of metaphysics is to cut reality along its grain. In other words, there are multiple ways of cutting reality along the grain, and these ways of cutting reality along the grain are more privileged than other ways of cutting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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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비유가 유래한 《파이드로스》의 김주일 선생님 번역본에서는 "본래의 뼈마디에 맞게 가를 수 있는 것"(265e)으로 옮겨졌네요.

제가 고기 손질에 관해서 잘 몰랐던 터라 관절과 결의 차이는 잘 몰랐습니다. 다만 저는 상기된 예시처럼 joint와 grain을 굳이 문자적으로 구분하려는 용례를 굳이 번역해야한다면 고민해보겠지만, "결"이라는 한국어 일상 용어 자체는 인간 종속적이라는 반실재론적 함의가 딱히 없는 것 같아 굳이 번역어를 바꿀 이유까지 있을까..? 하는 느낌이기는 합니다.

"뼈마디"라고 번역이 되는 건 저도 찬성입니다.

전 다음 케이스들이 생각나네요:

  1. 앞서 말한 반실재론 (e.g. 찰머스가 "Ontological Anti-realism"에서 제시한 반실재론) 에 대한 비유를 할 때
  2. 장자와 사이더의 비유를 비교할 때
  3. 사이더의 비유의 어색함이 주는 rhetorical force를 논할 때
  4. 실재의 관절 (혹은 뼈마디) 에 대해서 논할 때 (Writing the Book of the World pp. 35; pp. 63)
  5. 실재의 관절 (혹은 뼈마디) 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 다룰 때 (예를 들어, 누군가는 실재의 관절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실재의 구조를 관절로써 비유를 할 때 이미 우리는 이 직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또, '결을 따라 자르는 행위'는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앞서 윤님께서 말하셨듯이, 살코기를 결을 따라 자를 수도, 근육과 뼈를 결을 따라 자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전 '결을 따라 자른다'는 살코기에 적용되는 것밖에 들어본 적이 없지만 -- 그래서 반실재론적 함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 제가 틀린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윤님이 맞다고 해보겠습니다.) (또, 근육과 뼈를 결을 따라 자른다고 해도 자르는 것이 더 쉬운지는 모르겠습니다. 특히 생고기의 경우에는 뼈에 근육이나 살코기가 워낙 단단히 붙어있어서, 오히려 뼈에서 근육을 자를 때가 더 힘이 들 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갈비찜을 먹을 때 살코기가 뼈에 붙어서 안 떨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지 않나요?) 그래서 이 번역을 쓰게 된다면 원래 비유에서는 없었던 모호성이 생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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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에 McDaniel의 The Fragmentation of Being을 읽다가 다음 구절이 나와서 공유해봅니다:

For the Heideggerian, these [restricted] quantifiers are more natural than the existential quantifier. On this view, it would be metaphysically better to speak one of those languages than the languages we actually speak. Modes of being are ontological joints, and a language is metaphysically better to the extent that its primitive notions correspond to real distinctions (55).

이는 앞서 제가 말했던

의 경우입니다. 만일 "carve reality at its joints"를 "결을 따라 자르다" 라고 번역을 한다면 "modes of being are ontological joints"를 번역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예를 들어 "존재 양태들은 존재론적 결이다"라고 번역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여기서 요지는 존재 양태들이 결이라는 것이 아니라 결을 형성하는 관절들 혹은 뼈마디라는 것이니깐요. "Ontological joints"를 "존재론적 결"이라고 생각하면 철학적으로 다른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렇다면 "존재 양태들은 결을 형성하는 존재론적 요소들이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결을 형성하는 요소가 정확히 알기 무엇인지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결을 형성하는 요소"라고 하면 동물의 운동 방식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만일 "결" 번역을 지속한다면 "joints" 각 결을 이루는 살코기 조직등을 의미해야겠지요). 의역이 너무 심해지는 것도 문제고요. 이 문제는 "ontological joints"를 "존재론적 뼈마디"나 "존재론적 관절"로 번역할 경우 해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