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 에포케에 대한 반박 가능 여부 질문

​안녕하세요. 철학에 관심이 있는 고등학생입니다.
제 부족하고 정말 짧은 식견에도 불구하고, 질문 하나를 드리고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후설 & 하이데거: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박승억)을 읽으며
후설의 지향성, 에포케 등에 대한 신기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애포케에 대한 설명에서
그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인간은 항상 선입견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후설의 에포케는

"어떤 사건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 그것이 실재한다. 그것은 나쁜 것이다. 같은 식으로 - 판단하거나, 자신이 속한 맥락(역사, 문화, 기억과 기타 무언가들) 안에서 판단하지 아니하고 그런 생각들을 전부 중지시키는 것. 그럼으로서 내게 나타나는, 현상되는? 사건 자체에 집중하고 순수한 의식 같은 것으로 그것을 마주하는 것"

입니다. 이는 의식이 탈맥락적일 수 있다고, 아르키메데스 점 같은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 같은데, 제게는 그것이 가능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 판단한 이유는 몸과 뇌의 작동 방식입니다.

제가 초반만 읽고 구석에 미뤄둔 수많은 책 중 하나, 로버트 새폴스키의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Determined)]에 나오는 바에 따르면

2011년 다니엘 댄지거(Shai Danziger) 등 연구진이 이스라엘의 8개 가석방 위원회에서 10개월 동안 이루어진 약 1,100건의 판결을 분석한 결과, 식사 전에는 그 공복상태가 지속될수록 가석방 허가율이 떨어지다가 식사 직전에는 거의 0%에 수렴하고, 식사 후에는 65%까지 치솟았다고 합니다.

이에 저는 '우리는 일조량, 공복 혹은 포만, 편두통, 신경증 등 수많은 신체적 맥락에 속한 존재이고, 그 맥락으로부터 독립된 순수의식, 탈맥락 의식은 존재할 수 없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순수의식이 있고-> 그 위에 신체적 맥락이란 얼룩이 묻는 것' 인지
'순수의식이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없고, 공복과 포만이란 동등한 두 상태만이 존재하는 것인지(제가 설명을 잘 못 하기에 뭔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는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는 뇌의 작동 방식입니다.
한창 AI에 관심이 있던 시기에, 연결주의와 커넥톰으로서의 뇌라는 개념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제가 이해하기로, 학습과 의식작용은 구문론적인 내적 규칙에 의한 것이 아니고 여러 시냅스 연결 사이의, 복잡계 속 창발(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추가적으로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만 같습니다.), 기존에 존재하던 일상과 경험(신체적, 정신적 모두)의 시냅스 연결 사이에 맞물라도록 번역되고 끼워맞춰지는? 작용입니다.

즉, 기존에 존재하던 개념과 엉킨 복잡계 속 맥락에 맞게 가중치를 조절해 새로운 연결을 생성하는 것이 학습이고 이해인데, 이는 후설의 생각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말 미개하고 부족한 생각일 수 있으나
감히 여러분의 고견과 비판,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3개의 좋아요

실제로 철학자 폴 리쾨르는 후설의 판단중지를 재해석해 판단중지를 탈맥락적인 개념보다는 '거리두기'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자신이 속한 맥락에서 거리를 두고 사태를 해석하려는 노력이라는거죠. 리쾨르는 이런 판단중지(거리두기)가 맥락적 존재인 인간이 자기반성과 비판을 할 수 있는 거리를 얻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6개의 좋아요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에포케의 다음 단계인 환원(reduction)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The most important lesson which the reduction teaches us is the impossibility of a complete reduction. This is why Husserl is constantly re-examining the possibility of the reduction. If we were absolute mind, the reduction would present no problem. But since, on the contrary, we are in the world, since indeed our reflections are carried out in the temporal flux on which we are trying to seize (since they sich einströmen, as Husserl says), there is no thought which embraces all our thought.
(Merleau-Ponty 1962, xv)

환원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완전한 환원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라고 말한 메를로퐁티의 입장은 작성자님의 관점과도 유사해 보입니다. 우리가 절대적 의식(absolute mind)이라면 이러한 환원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 내 존재이며(we are in the world), 우리의 반성 자체도 우리가 붙잡고자 하는 시간적 흐름 속에서 수행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도 없어 철저한 환원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순수의식이 먼저 있고, 그 위에 신체적 맥락이라는 얼룩이 묻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후설 철학과 현상학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후설을 비판한 많은 현상학자들은(뮌헨 학파, 하이데거 등) 후설이 순수 의식 주장함으로써 결국 초월론적 주체철학으로 회귀한다고 비판했습니다. 다만 후설 자신도 『이념들 II』 등에서 촉각 경험을 예로 들며, 신체가 주체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도 저술 했기에, 후설에게 있어 의식과 신체성에 대한 물음에 대한 논의는 계속해서 연구가 필요한 주제입니다.

5개의 좋아요

이미 위에서 두 분이 좋은 설명들을 해주셨지만 몇 마디 추가 사항을 더 덧붙이자면, 후설의 '에포케' 개념이나 '순수 의식' 개념을 반박하는 작업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그 작업이 후대 현상학자들의 중심 논의 주제이기도 합니다만(심지어 제 박사학위논문에서 논의하는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만), 그 개념들을 몸과 뇌의 작동 방식에 대한 자연과학적 실험으로 반박하려는 시도는 다소 논점에서 어긋나 있습니다.

애초에 후설은 자연과학이 특정한 '작업 가설'이나 '조작적 정의' 같은 수많은 전제들 위에서 출발하는 학문이라 결코 그 자체만으로는 학문의 토대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자신의 현상학을 전개하였습니다. 자연과학적 실증주의로 학문을 정초하려는 시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가정들을 도입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후설의 이런 비판 자체를 거부하면서 "자연과학은 사실 전제 없는 학문이다."라는 극단적 주장을 옹호하려는 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후설의 현상학을 비판하려 해도 논점을 정확히 맞추어야 할 필요가 있겠죠. (a) 전제 없는 학문에서 출발하려는 후설의 현상학의 시도조차 사실 전제를 숨기고 있다고 비판할 수는 있지만, (b) 자연과학의 전제로 후설의 현상학의 전제를 비판하려는 시도는 성립할 수 없죠. 핵심은, "후설의 현상학이 과연 전제 없는 학문인가?"에 있는 것이지, "자연과학의 전제가 후설의 전제보다 더 설득력 있다."가 아니니까요.

3개의 좋아요

내용에 대한 코멘트는 다른 분들이 많이 해주셔서 건너뛰고... 저는 무엇보다 굉장히 잘 정돈된 논리적인 생각이라 고등학생이라 하시니 굉장히 놀랍네요.

2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