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한 논문: 백도형. "심신 문제와 데카르트식 프레임." 인간. 환경. 미래 36 (2026): 3-33.
백도형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제거주의, 환원적 물리주의, 속성 이원론에 기반한 비환원적 물리주의 모두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답을 제시하는데 실패했다.
(2) 왜냐하면 첫 번째, 속성 실재론을 전제로 삼는 심신문제 논의자들은 정신과 미시적 물리 존재만을 논의 주제로 삼는데, 계층 존재론에 따르면 훨씬 더 많은 존재자들이 그 사이에 존재하고 이 존재자들은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에 대한 더 많은 설명, 그리고 그것들이 실재하는지의 여부를 설명해야 하기에 마이농주의의 문제에 빠지거나 임의성의 문제에 빶게 된다.
(3) 두 번째, 심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물리적인 것)에 대한 이원론적, 배타적 접근을 취하는 데카르트적 프레임에 여전히 사로잡혀있기 때문이다. 이 심신문제는 물리적 속성과 심적 속성이 각각 지시체를 가져야만 한다는 철학적 혼동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그 철학적 혼동은 데카르트적 프레임에서 비롯되었다.
(4) 이 두 가지 실패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속성 유명론을 기반으로 한 언어적 전환을 받아들여야 한다.
(5) 첫번째로, 속성 유명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존재하는 것은 오직 개별자뿐이고, 여러가지 계층 구분은 언어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수 있기에 다양한 계층 존재자들이 실재한다고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설명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두 번째로, 속성 유명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물리적인 것과 심적인 것의 차이가 실제 존재적 차이가 아니라 서술적 차이, 언어적 차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에 데카르트적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7) 따라서 우리는 심신 문제를 접근할 때 속성 유명론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나는 이 논문의 논증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다만 문제는 속성 유명론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문제가 곧바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우리는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를 따질 때 그 사람에게 책임을 귀속시킬 조건을 따진다. 가령 우리는 그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로웠는지, 진정으로 자유롭다는건 무엇인지, 어떤 물리적 조건 하에서 그렇게 됐는지를 따진다. 그런데 물리적인 것과 심적인 것이 순전히 언어적 차이라고 한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겠는가? 우리는 명백히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물리적 조건에 대해서도 심적으로 자유로웠다고 서술할 수 있는 기만적 해결책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럽다.
물론 심신 유명론 입장에서는 제멋대로 서술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에 대한 다양한 서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지, 언어가 개별자와 무관하게 활용되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할 것이다. 가령 어떤 개별자의 행위와 사건을 서술할 때 행위자가 조작됐다면, 우리는 그가 자유롭지 않았다고 서술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우리가 만약 자유의 조건, 자유의 속성에 특별한 지시체가 할당된 것이 아니라 그저 언어적 서술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자유의 조건이 결국 언어적인 것, 해석의 영역에 불과하다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가 물리적 조건에 귀속되고, 심적 언어도 그 물리적 조건에 귀속된다면 우리는 언어적인 것의 부수현상론에 빠지게 된다. 반면 심적 언어가 물리적 언어에 귀속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유의 문제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도덕적 책임을 부정하는 측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그들은 같은 개별 사건을 보고 그것을 도덕적 책임이 귀속되는 자유로운 상황이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유를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인지, 해석의 권위를 누가 가지고 결론을 확정지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논의를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