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라는 질문을 억눌러라!

우리가 "왜?"라는 질문을 억누를 때 비로소 중요한 사실들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탐구 과정에서 하나의 해답에 이르게 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471)

공부하다가 눈길이 가서 올려봅니다. 철학은 어떠한 성역에 대해서라도 "왜?"라는 질문을 과감히 던지는 분야이긴 하지만, 종종 우리 철학 전공자들은 너무 손쉽게 "왜?"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적어도, 그 "왜?"라는 질문 자체가 종종 잘못되어서 사이비 문제가 발생할 때도 있다는 걸 아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이 말은 새겨 들을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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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가 어떤 게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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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최근에 성경의 '욥기'라는 책을 읽었는데, 여기서 욥의 세 친구들의 욥에 대해 제기하는 비판이 바로 "왜?"라는 질문을 오용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욥이 재산도 잃고, 자녀도 잃고, 피부병도 걸려서 괴로워하니까, 친구들은 " 욥이 이렇게 고통을 겪어야 할까?"라고 질문하면서, "욥은 분명히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을 거야!"라는 결론을 내려버리거든요. 세상의 길흉화복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래서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가 "왜?"라고 질문하면서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 자체가, 정작 억울하게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저주받은 사람"이나 "죄인"으로 몰아가게 만드는 거죠.

종교적인 예시이지만, 사실 철학에서도 매우 유사한 일들이 자주 벌어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가령, 모든 유의미한 언어적 표현에는 거기에 대응하는 실재가 있어야 한다거나, 모든 윤리적 딜레마 상황에는 거기에 맞는 정답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그런 '실재'나 '정답'을 도대체 말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까지 "왜?"라고 자꾸 묻게 만들고, 엉뚱한 방향으로 사유를 이끌어가게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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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예시들은 Youn님의 성향이 상당히 반영된거 같아 이론의 여지가 많아보이긴 하네요 ㅎㅎ 재미가 없더라도, 좀 더 논쟁의 여지가 적은 모델 케이스들은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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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예시들에 제 성향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건 맞긴 하지만, 비트겐슈타인도 사실 바로 저런 맥락에서 플라톤주의적 형이상학이나 주지주의적 윤리관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기는 했어요. 물론, 『철학적 탐구』는 다른 철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비판보다는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전기 철학에 대한 비판이 주 내용을 이루는 책이긴 하지만요.

굳이 논쟁의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은 케이스를 꼽자면, '실재'에 대한 플라톤주의와 '의식'에 대한 데카르트주의가 자꾸 "왜?"라는 질문을 잘못 적용해서 오류에 빠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그래도 많은 철학자들이 비트겐슈타인에게 동의하긴 하는데, 사실 그 두 입장에는 여전히 지지자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에요. 오히려 비트겐슈타인과 비트겐슈타인의 추종자들이 20세기 초중반까지는 절대적으로 지지를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형이상학을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힘을 얻고 있다 보니, 단순히 비트겐슈타인의 저 말 하나만 가지고 결판이 난 논쟁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저 말은 철학적 문제에 접근할 때 우리가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고, 각각의 철학적 사안에 대해서 정말 이 사안이 "왜?"라는 질문을 잘못 적용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개별적으로 따져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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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어떤 철학적 문제는 더 깊은 원인을 캐묻는 방식만으로는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왜?”라는 질문이 만들어내는 강박을 잠시 중지하고, 우리가 실제로 말하고 판단하고 반응하는 방식을 살펴볼 때 비로소 중요한 사실들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사실들이 우리를 해답, 혹은 문제의 해소로 이끕니다.
이 구절은 “왜 묻지 말라”는 반지성주의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잘못 놓인 “왜?”가 사태를 더 흐릴 수 있다는 경고에 가깝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중요한 것은 숨은 본질을 캐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언어를 사용하고 판단하며 반응하는 삶의 형식을 보는 일입니다. 설명 이전에 기술이 있고, 그 기술 속에서 철학적 문제는 때로 해답을 얻기보다 해소됩니다.

이와 비슷한 구조는 상담에서 마음의 문제를 다룰 때도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철학적 탐구와 상담은 성격이 다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마음의 문제에서도 “왜?”라는 질문이 사실을 보게 하기보다 사실을 피하게 만듭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우리는 때로 끝없는 분석만 반복합니다. 그것이 나를 아프게 했고 슬프게 했다는 사실, 무엇보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랬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물음은 사태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이미 일어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한 우회로가 되기도 합니다. 이때 분석은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외면하고 닫아잠그는 방식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분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 이전에 먼저 보아야 할 사실을 놓치지 않는 일입니다.

물론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상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가 아니라, “성격은 다르지만 비슷한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정도로 낮춰 말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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