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 역설

온도 역설은 Barbara Partee가 제시한 라이프니츠 법칙에 대한 반례이며 Partee’s paradox로 불리기도 합니다.

브루스 웨인은 부자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이다
∴ 배트맨은 부자다

이 논증은 명백히 타당한 논증이며 P(x), x=y ∴ P(y)의 한 사례입니다. 하지만 Partee는 다음과 같은 반례를 제시합니다.

온도가 상승한다. (The temperature is rising)
온도는 90도이다. (The temperature is ninety)
∴ 90이 상승한다. (Ninety is rising)

온도를 나타내는 수 90 자체는 상승하지 않으므로 이 경우는 확실히 타당하지 않은 논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반례를 통해 동일성 법칙이 틀렸다고 결론짓는 것은 너무 과도한 처방 같습니다. 그래서 동일성에 관한 법칙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제안들이 제시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론 90이 상승한다 자체가 의미적으로 이상한 문장이라 주장했고 Jackendoff(1979)는 전제 온도는 90도이다가 사실 x=y 형태의 진술이 아닌, 온도를 어떤 점, 즉 90도에 위치시키는 진술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들은 다음과 같은 온도 역설 변형에 의해 재반박될 수 있습니다.

서울의 온도가 상승한다
서울의 온도는 도쿄의 온도와 같다
∴ 도쿄의 온도가 상승한다

결론의 문장 도쿄의 온도가 상승한다는 의미적으로 이상하지 않으며 전제 서울의 온도는 도쿄의 온도와 같다는 분명하게 x=y 형태의 동일성 문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도쿄의 온도가 함께 상승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Montague의 해결책

Montague는 온도는 90도이다(The temperature is ninety) 문장에서 the temperature라는 주어 명사(subject NP)의 지시체가 해당 문장이 발화된 시점 t의 온도를 나타내는 값이고 온도가 상승한다(The temperature is rising)의 주어 명사는 특정 시점의 온도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온도에 대한 함수라고 설명합니다.

즉, 첫 번째 전제는 시간에 따라 변하는 온도 함수에 대한 술어화(predication)이며 두 번째 전제는 현재 온도에 대한 문장으로 봐야 된다 말합니다.


Montague는 여기서 외연(extension)을 특정 시간-세계에서 실제로 가리키는 대상, 내포(intension)를 시간-세계가 바뀔 때마다 외연을 정해 주는 함수로 봤습니다. 이를 반영하면 온도 역설은 P(x), x=y ∴ P(y)의 한 사례가 아니라

P(intension(x))
extension(x)=y

이고 때문에 P(y)라는 결론이 도출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짧고 재밌는 주제인 것 같아 Löbner, Sebastian (2020). "The Partee Paradox. Rising Temperatures and Numbers"를 참고해서 소개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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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제가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한 적이 없어서 뭔가 놓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문제가 '역설'이라고 할 만큼 철학자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될 주제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일단

에서 "온도"라는 용어가 구체적 개체를 지칭하는 용어 자체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저런 문장들을 구체적 개체를 지칭하는 용어인 "브루스웨인"이 사용된 문장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잘 납득이 되지 않아요. 물론, "온도"가 추상 단칭 명사인 점에 착안해서, 추상 단칭 명사도 어떤 지시체가 있어야 한다는 형이상학적 발상으로 논의를 확장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 역설이 그 점까지 염두에 둔 것은 아닌 것 같고요. 그래서 제 생각에

라는 문장들은 굳이 "온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다른 문장들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지 않나요? 가령, 섭씨 온도는 물의 어는 점과 끓는 점으로 정의되고, 섭씨 90도라는 것은 물이 끓을 만큼의 뜨거움의 9/10이라는 의미이니,

이 물체는 물이 어는 만큼 차가웠다가 물이 끓는 만큼 뜨거워졌다.
이 물체는 물이 끓는 정도보다 9/10만큼 뜨겁다.

처럼 바꿔서 서술할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여기서는 특별히 어떤 역설이 발생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애초에 이 두 문장은 P(x)와 x=y의 형식이 아니라 F(a)와 G(a)의 형식이고, 이 두 문장에서 F=G를 도출할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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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공감합니다. 사실 저도 이 역설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같은 의문을 느꼈어요. 하지만 일단 보통 역설이라고 소개되고 저런 형식화 예를 제시하니 제 맘대로 바꾸는 건 이상해보여서 그냥 온도 역설, Partee’s paradox라고 소개하고 예시도 저렇게 썻습니다.

솔직히 저도 왜 저런 형식화가 되는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이해할려 노력해보자면 아마 영어로 나타냈을 때 The temperature is rising에서 the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과학적 설명에서 질량값=x, 최솟값=y이런 개체로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그런 식으로 분석된 것 아닌가? 뇌피셜로 추측해봅니다.
+

이 부분은 Jackendoff는 전제 온도는 90도이다 가 사실 x=y 형태의 진술이 아닌, 온도를 어떤 점, 즉 90도에 위치시키는 진술이라고 보았다라는 본문 내용과 비슷한 지적같네요. 아마 이런 방식의 해석도 온도 역설의 변형 서울의 온도는 도쿄의 온도와 같다같은 문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x=y가 되지 않나?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원문 속 직접적인 예시는 The temperature in Chicago is the same as the temperature in Sidney였는데 the ~is the same as the ~같은 표현을 x=y가 아닌 다른 형식화로 나타내는 것이 잘 상상되지가 않네요.

이 역설이 아마도 형이상학이나 논리학의 문제가 아닌 의미론에 대한 문제로 받아들여지는듯 해요. 몬태규가 언어, 의미론 분야에서 유명하기도 하고 이 해결책이 자연어에 Intensional logic을 도입한 시도란 설명을 본 적이 있거든요.

그냥 본문 마지막 말 그대로 짧고 재밌어 보이는 주제를 어쩌다 알게되서 소개해보고 싶단 맘에 올린거라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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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역설에 관심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이런 역설은 처음 들어보고 철학적인 의의도 못 느끼겠네요. 그래서 gpt에게 물어보니:

In linguistics and formal semantics, Partee’s work is very influential, but what gets discussed are typically technical issues about quantification, meaning, and reference, not “paradoxes” in the deep foundational sense that drive major philosophical debates.

So, if you saw “Partee’s paradox” in a text, it’s likely one of these situations:

  • a pedagogical example (a problem meant to illustrate a tension in a theory), or
  • an informal label used in a specific course or paper, rather than a canonical philosophical paradox.

랍니다. 물론 gpt가 틀렸을 수 있으니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처음 듣는"역설"이긴 한데요. 몬태규가 설명한 (그리고 파티 본인이 크게 기여한) 바와 같이 영어 정관사구의 의미가 내포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바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일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간단한 동기부여 예시로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정관사가 없는 한국어 모국어 화자로서는 참 남의 나라 얘기같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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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네요! ‘행성의 수 = 9’이면서 ‘행성의 수가 하나 늘었다’가 ‘9가 하나 늘었다’를 함축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내포성 문제네요.

저는 내포/외연이라는… 고전적인 ‘성긴’ 구분보다는 더 세련된 방식으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긴 합니다. 이때 문제란 철학의 문제라기보다 프레게 전통의 고전적 도구들이 갖는 문제이겠고요. (말하자면 공학적 해결을 해야 하는 것이죠.)

가령, 다음 사례가 제시한 이른바 ‘역설’과 근본적으로 같은 ‘고전적 도구의 문제’를 드러낸다고 제게는 보입니다:

모호다방과 애매다방
모호다방에서 커피를 시키면, 반드시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0.5 정도로 따듯한 커피를 내어준다. 한편, 애매다방에서 커피를 시키면, 0.5 확률로 얼음장같이 차갑거나 지옥불같이 뜨거운, 즉 0과 1 정도로 따듯한 커피를 내어준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나는, 어떤 X ∈ {모호다방, 애매다방}에 대해서건 ‘X에서 커피를 시키면 0.5 정도로 따듯한 커피가 나올 것이다’라고 믿는가?

참조: Zinke, A. Uncertainty, Vagueness, and Rational Decision. Erkenn 91, 1511–1517 (2026).

(그냥 얼마전에 읽고 재미있었어서 사족 달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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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많이 과문합니다만, 분석철학에서 동일성 개념이란 대개 라이프니츠 법칙, 즉 식별 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두 대상이 지닌 성질이 완전히 동일하다면, 두 대상은 논리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대상이다')를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런 견지로 본다면 저는 좋은 분석철학자란 다음 두 가지 역량을 갖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 일반적인(아직/별로 비판에 부쳐지지 않아 "평평"한) 개념적 기준 하에 동일하다고 간주되는 양자 사이에 '미처 발견치 못했던' 불일치가 있었음을 통찰하는 직관 및 자신의 새로운 직관을 남들에게 설득해내는 학술적 소통력과, 2) 그 불일치를 적절히 조사하기 위하여 필요한 미시적 개념/범주를 찾아내고, 그것을 어떻게 설정하면 양자의 일치성이 측정될 수 있을지 실험할 줄 아는 개념적 실행력('훈련된 도전정신'). 그리고 제가 원문을 읽기로는, 적어도 최초 레퍼런스 속의 철학적 주장이 이곳 댓글란에서는 그리 호응을 못 얻고 있듯이, 제가 앞서 말한 "(이 직관이 왜 개념 분석에서 새로운/정밀한 것인지를) 학술적으로 설득하는 힘"이 아직 덜 실려 있는 것 같습니다. 철학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대개 학술적 설득력도 잘 갖춰져 있기 마련이니까요. (글을 퍼오신 서강올빼미 회원님이 아니라, 퍼온 글(원문)에서 주장을 하는 주체인 그 철학자에 대한 코멘트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