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가 이 게임을 좋아합니다.
하이데거가 이 게임을 좋아합니다.
존재 물음하는 철학도 힘들어 죽겠는데 존재 물음 하는 게임이라뇨....
ㅋㅋㅋㅋㅋ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저 게임이 제시하는 물음이 비전공자분들께는 꽤나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요? 사실, "존재 물음"이라고 하면 말이 너무 거창하고 추상적인 것처럼 들려서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따지고 보면 저 게임이 제기하는 물음을 좀 더 확장한 거니까요.
실제로, 우리가 "존재"라는 말을 마치 완전히 다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너무 손쉽게 무시해 버린다고 하이데거가 한탄할 때, 그 문제제기에는 각각의 사태 영역에 따라(가령, 물리적 사태 영역과 게임적 사태 영역에 따라) "존재한다"라는 의미가 서로 다른 층위나 양상을 지니고 있고, 그 사태 영역들 사이에 공통되는 "존재한다"의 의미는 우리에게 굉장히 막연하게만 이해되고 있다는 지적도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게다가, 이 물음이 단순히 하이데거 같은 대륙철학의 존재 물음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상대성' 같은 콰인의 논제나, '양화사 변이' 같은 메타형이상학의 문제나, '허구세계의 존재론' 같은 분석 형이상학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으니, 오타쿠 게임이 던지는 물음인데도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지 않나 하고 생각해요!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대상과 상호작용이 가능하지만 아직 마주치지 않은 대상의 차이 아닐까요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대상'과 '상호작용이 가능하지만 아직 마주치지 않은 대상'이라는 서로 다른 종류의 것들을 모두 "대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때의 "대상"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가 하이데거의 물음이죠. 실제로, 하이데거는 『사물에 대한 물음』(Die Frage nach dem Ding)과 같은 저서에서 "존재자의 존재"라는 표현을 "사물의 사물성"이라는 표현이나 "대상의 대상성"이라는 표현과 종종 치환해서 사용하기도 하거든요. 완전히 범주가 다른 두 가지 종류의 '사물' 혹은 '대상'을 우리가 하나로 묶어서 "사물"이나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때 그 두 가지 종류의 것들 사이에서 공통된 '사물성' 혹은 '대상성'이란 도대체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되고 있느냐는 거죠.
저는 개인적으로 언어의 표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어가 그것이 가리키는 무언가와 전혀 무관하지 않지만, 그 무언가 그 자체는 아니라는 거죠. 칸트의 거짓말 사례도 언어에 속아서 실제는 다른 상황을 같은 '거짓말'사례로 읽는 바람에 문제가 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님 덕분에 재밌는 시간 보냈어요! 아래는 비록 지피티를 상대로 한 논쟁이지만, 나름 생각해볼만한 것 같아서 남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대상”과 “상호작용이 가능하지만 아직 마주치지 않은 대상”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는 관계 형성이 원천적으로 막혀 있거나, 적어도 해당 사태 안에서 상호작용 가능성이 닫혀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마주치지 않았을 뿐 상호작용 가능성은 열려 있는 경우다. 그러므로 둘을 모두 “대상”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둘 사이에 같은 존재 방식이나 공통된 본질적 “대상성”이 있다고 바로 말할 수는 없다. 이 둘이 함께 “대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둘이 같은 종류의 존재자라서가 아니라, 둘 다 어떤 말하기와 사유와 구별의 장 안에서 지시 가능한 항으로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대상”은 사물 내부에 들어 있는 공통 본질의 이름이라기보다, 무언가가 지시되고, 구별되고, 문제 삼아지고, 논의 가능한 항으로 세워졌다는 기능적 표지에 가깝다. “대상성”도 마찬가지로 대상들 안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속성이라기보다, 어떤 것이 특정 관계 안에서 대상으로 기능하게 되는 조건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즉 대상성은 “그것 자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그것이 어떤 관계 안에서 지시 가능한 항으로 세워지느냐”의 문제에 더 가깝다.
이렇게 보면 “대상의 대상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조금 조심해야 한다. 그 질문은 겉으로는 깊은 존재론적 질문처럼 보이지만, 이미 “대상이라고 불리는 것들 사이에는 공통된 대상성이 있을 것이다”라는 방향을 깔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상”이라는 말이 애초에 공통 본질명이 아니라 지시 기능을 수행하는 표지라면,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물어야 할 것은 “대상의 대상성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어떤 관계 안에서 대상으로 기능하게 되는가?”이다.
물론 하이데거라면 여기서 한 단계 더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지시 가능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무언가가 이미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대상으로 세울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곧바로 “대상성은 현존재에게 존재자가 무엇으로서 드러나는 방식에서 성립한다”고 간다면, 나는 그 지점에서 다시 멈춰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대상성 일반의 바닥을 증명한 것이라기보다, 현존재에게 대상이 드러나는 방식을 출발점으로 설정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답은 이렇다. 두 종류의 것을 모두 “대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둘 사이에 동일한 존재 방식이나 공통 본질이 있어서가 아니다. 둘 다 특정한 관계 안에서 지시 가능하고 구별 가능하며 논의 가능한 항으로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상성은 존재자 내부의 공통 속성이 아니라, 어떤 것이 관계 속에서 하나의 항으로 세워지는 조건이다. 만약 하이데거가 이 조건을 현존재의 세계-개방에서 설명하려 한다면, 그 설명은 가능하다. 다만 그것이 대상성 일반의 바닥이라고 주장하려면, 왜 현존재의 시점이 대상성의 최종 바닥인지 별도로 증명해야 한다. 증명 없이 그렇게 놓는다면, 그것은 대상성 일반의 해명이라기보다 현존재적 대상 경험의 해명에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