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6. 「잠언과 화살」 13, 27, 28번은 여성에 관해서 말하는 잠언들이다. 13번에서 니체는 남자가 자신의 '이상'의 갈비뼈로 여자를 창조했다고 말하는데, 이는 다음을 함축하는 듯 보인다. (1) 여자는 남자의 이상, 즉 남자가 쫓는 것이다. (2) 그런데 그런 이상은 순전히 그 자신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이때 (1)에 관해서는 『선악의 저편』 서문을 참조할 만하다. "진리를 여자라고 가정한다면 (...) 모든 철학자가 독단론자인 한 그들은 여자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심은 근거 없는 것일까? (...)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 모든 종류의 독단론은 우울하고 의기소침한 태도로 서 있다." 그런데 이때 니체가 '여성'의 메타포를 사용하는 방식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13번 잠언으로 다시 돌아가면 이때 여성은 남자에 의해, 그의 갈비뼈로부터 만들어진 이상이다. 여성과 남성은 성적 측면에 있어서 서로 이끌린다는 점을 보면, 니체는 이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만든 이상에 우리가 이끌려 가는 것을 비유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2)는 사실 니체가 이 『우상의 황혼』전체에서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주제 중 하나이다. 이는 그의 다른 후기 저작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니체와 여성에 관한 연구들을 참조해 봐야겠다.)
7. 「소크라테스 문제」의 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에 대한 판단, 즉 삶에 대한 가치판단은 삶을 긍정하는 것이든 부정하는 것이든 궁극적으로는 결코 참일 수 없다. 그것들은 단지 증후로서만 가치를 지니며 증후로서만 고려될 수 있다. 우리는 삶의 가치는 평가될 수 없다는 이 놀랍고 미묘한 사실을 손가락을 뻗어서 붙잡으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살아 있는 인간에 의해서는 가치 판단이 불가능하다. 살아 있는 인간은 바로 논의의 당사자이고 심지어 논의의 대상이지 논의의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복잡해 보이는 논의에서 내가 찾아낼 수 있는 함축들은 먼저 다음의 것들이다. (1) 삶의 가치는 평가될 수 없다. (2) 삶에 대한 가치판단은 평가나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징후학적 현상이다. (3) 살아 있는 인간에 의해서는 가치 판단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a) 사람은 삶을 살아가는 주체이지 삶 자체를 관찰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고, (b) 삶의 그 논의의 대상이지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1)은 (3)을 근거로 하는데, 두 가지 이유는 인간을 심판자인 동시에 심판 대상으로 보는 칸트적 비판 모델에 반대되고 있다. 니체가 이것을 의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보기에 삶을 살아가는 자는 그 자신의 삶을 전체로서 볼 수 없기에 논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b)는 반대로 그 사람을 삶에 관한 논의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삶에 대한 고찰일 것이기에, 나는 나 자신을 심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이유를 적절하게 구성하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또한 이후에 「반자연으로서의 도덕」 5절에서는 "삶의 가치에 대한 문제를 조금이라도 건드리기라도 하려면 우리는 삶의 바깥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2)의 경우에는 니체의 철학을 심리학 또는 증후학으로 스스로 명명하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이런 '징후학'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어려운 문제다. (니체와 그의 징후학적 프로젝트에 관한 연구들로는 대표적으로 무엇이 있는가?)
8. 「소크라테스 문제」 7절에서는 소크라테스식 변증법의 데카당스적 측면들이 논의된다. 이때 눈에 띄는 것은 변증법이 상대방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리고 "상대방의 지성에서 힘을 제거해 버린다"고 말하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 대화편에서 나타나는 모습에서 볼 때 상대방의 무지를 스스로 자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상대방에게 힘을 제거하는 복수의 표현이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다. 또 이로부터 니체가 생각하는 좋은 대화 모델은 무엇인지가 궁금해진다.
9. 「철학에서의 '이성'」 1절과 2절에서는 감각이 참된 세계에 대해서 우리를 속인다는, 엘레아학파적 사고방식을 겨냥한다. 감각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도무지 거짓말을 하지 못하며, 감각의 증언을 가지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비로소 감각에 거짓말을 집어넣는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것들이 지적될 수 있다. (1)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가 감각을 부당하게 취급했다는 점에서는 비판받을 만하지만 그럼에도 파르메니데스 같은 자들과는 달리 "존재"란 하나의 공허한 허구라고 말했다는 점에서는 영원히 옳다. '가상적인' 세계가 유일한 세계다. 즉 '참된' 세계란 나중에 덧붙여져 날조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 니체는 이성의 범주, 또는 인식론적인 범주의 기능이 참된 인식을 제공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칸트식의 설명에 반대한다. 그는 칸트의 범주들 중 통일성, 사물성, 실체, 영속성 개념을 거부한다. 그런데 이 거부는 우리가 그것을 만들어낸 것이라는 설명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이 감각의 세계를 잘못된 가상으로서 오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0. 「철학에서의 '이성'」 5절에서는 이런 논의를 이어가는 한편, 통일성이나 동일성, 사물성, 존재를 상정하는 우리의 오해의 기원을 '언어'에서 찾는다. 그는 언어가 "원시적인 주물숭배"에 빠져 있다고 본다. 즉 우리는 한편으로는 행위자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귀속되는 행위를 본다는 것이다. 이때 존재로서의, 실체로서의 '나'가 믿어지고 이런 믿음이 모든 사물에 투영된다. 이때 실체적 나의 관념이 모든 사물에 투영된다는 말을 잘 이해를 못하겠으나, 1번 문단에서 언급한 14[79]에서도 나를 사물성의 근원으로 본다. "나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파생된 것으로서 존재라는 개념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앞의 문장에서는 "도처에서 존재가 원인으로서 고안되어 은근슬쩍 밑으로 집어넣어진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는 be동사 am의 계사적 사용과 존재적 사용을 지시하는 것일까? 행위자와 행위의 구별은 『도덕의 계보』 제2논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음으로 이성 범주에 관한 유래를 설명하면서 존재라는 오류와 생성의 세계의 폄하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가 아직 문법을 믿고 있기 때문에 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나는 염려한다."
11.「반자연으로서의 도덕」 4절에서는 삶의 본능과 반자연적 도덕이 대조된다. 도덕에서의 모든 자연주의, 즉 모든 건강한 도덕은 삶의 본능에 의해 지배된다. 그런데 이때 니체는 여기에서도 삶의 계율은 '해야 한다'와 '해서는 안 된다'라는 특정한 규범(bestimmten Kanon)으로 채워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 Kanon은 윤리적 규범이라기보다는 (음악적 예술적 용어로서) 기준이나 표준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어쨌든 니체는 여기에서도 행위의 어떤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무 도덕도 없는 삶을 추구했다는 오해를 반박할 중요한 근거가 되는 듯 보인다. 이에 반해 반자연적 도덕은 삶에 적대적이다.
12. 「반자연으로서의 도덕」 6절에서는 "인간은 이러이러하게 존재해야만 한다"고 소리치는 자들을 비판한다. 니체가 보기에 인간은 달라져야만 한다는 외침은 위선적이고 웃음거리일 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 개인은 미래와 과거로부터의 운명이며, 다가올 것과 존재할 모든 것에 대한 하나의 법칙, 하나의 필연성이다. 그러한 개인에게 달라져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해, 심지어는 과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조차도 달라지라고 하는 셈이다." 이때 니체가 개개인을 어떤 '필연성'이라고 본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다. 니체의 "운명" 개념은 무엇이며 어디까지를 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