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비트겐슈타인, 브랜덤: 로버트 브랜덤의 「게오르크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다가

"지향성(헤겔이 다룬 '의식'의 의미)의 경계에 대한 이러한 의무론적 기준deontological criterion은 개념적 규범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철학적 과제의 가장 높은 자리에 놓는다. 헤겔은 이러한 물음을 비트겐슈타인보다는 칸트에게 귀속시키지만, 그는 비트겐슈타인에게 더 빚지고 있는 대답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그는 지향성과 관계 있는 모든 종류의 규범적 지위──우리가 책임을 지는 것, 찬동하는 것, 우리가 우리의 권위를 둔 것──가 사회적 지위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헤겔은 사회적 실천("사용, 관습, 관례")이──오직 그 속에서만 우리가 이정표 같은 그러한 평범한 사물에 대해서조차 규범적 의미normative significance를 이해할 수 있는──맥락을 제공한다고 강조하는 비트겐슈타인적 전통에 동의한다."(Robert Brandom, "Georg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 Topoi, 27(1), 2008, 161)

“우리의 저자[헤겔]가 생각하기에, 필요한 것은 고대인들이 알았던 것──우리의 규범적 태도가 우리의 현실의 규범적 지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과 근대인들이 배운 것──규범적 지위란 우리의 규범적 태도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화시키는 방법이다. 헤겔은 상호적 인정에 대한 그의 모델이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기에 필요충분적인 이론적 원료를 결국에는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그는 상호적 인정(규범적 태도의 구조)이 규범적 지위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교훈이 명백하게 포용되는, 그리고 근대성의 교훈이 인륜성과 화해하게 되는, 그래서 소외가 극복되는, 인간 역사의 세 번째 단계를 상상한다. 자기의식의 이러한 탈근대적 형태를 그는 놀랍게도 ‘절대지(Absolute Knowing)’라고 일컫는다.”(Robert Brandom, "Georg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 Topoi, 27(1), 2008, 163)

"어떤 종류의 의미론이 상호적 인정의 화용론과 함께할 수 있는가? 여기서 헤겔은 그의 언급되지 않은 영웅인 (숨겨진 신Deus absconditus)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뚜렷하게 구분된다. 둘은, 실제로, 지성적 존재(sapience)와 지향성──토의적 이해, 지식, 행위자성의 가능성──에 대한 언어의 중심성과 본질적 기여를 주장한다. [……]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악명높게도 "언어는 중심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다만, 원리상 오직 발생론적으로만 그 배열이 이해될 수 있는 교외 지역의 난잡함 속에 철저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 헤겔은 결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언어는, 그가 생각하기에, 중심지를, 그것을 토의적(discursive)으로 만드는 실천──(칸트를 따라서) 말하자면, 개념에 열중하는concept-mongering 실천──의 집합을 가지고 있다. 그 실천이란 칸트가 이미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을 종합"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구별했던 실천, 곧──인정된 찬동commitment들(규범적 태도의 문제)로부터, 양립불가능한 찬동들을 배제하고 귀결적 찬동들을 포함시킴으로써──어떤 찬동(규범적 지위)들을 실질적으로 다른 찬동들과 양립불가능한 것으로서, 그리고 여전히 다른 찬동들을 실질적 추론의 결과들로서 다루는 실천이다."(Robert Brandom, "Georg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 Topoi, 27(1), 2008, 163)

브랜덤이 쓴 「게오르크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라는 짧은 글에서 몇몇 부분을 발췌 번역하였습니다. 내용이 상당히 재미있어서 글 전체를 번역해보고 싶은데, 브랜덤 특유의 수식어 남발 때문에 한국어로 바꾸면 문장이 심하게 꼬여버리는 구절들이 너무 많네요. 일단, 발췌한 부분에서의 재미있는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헤겔은 소위 '상호적 인정 모델(model of reciprocal recognition)'을 바탕으로 규범적 지위(normative status)가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2. 이러한 헤겔의 문제의식은 언어가 사회적 실천(social practice) 속에서 의미를 얻게 된다고 강조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관점과 공명한다.

  3.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론을 성립시키길 거부한 반면, 헤겔은 어떻게 규범적 지위가 사회적 실천 속에서 해명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의미론을 성립시키고자 한다.

마지막 인용 다음에 나오는 부분에서 브랜덤은 헤겔의 의미론이 지닌 특징을 다음의 세 가지 내용으로 흥미롭게 요약하고 있기도 해요.

  1. 헤겔은 근본적으로 총체론적(holistic)인 의미론을 제시한다.

  2. 헤겔은 주관적 사유와 객관적 사태가 모두 개념적으로 분절화(articulated)되어있다고 지적한다.

  3. 헤겔은 개념적 내용이 실질적 추론 결과(material inferential consequences)들을 계속적으로 도출해내고 실질적 양립 불가능성(material incompatibility)을 끊임없이 해소하는 과정을 통해 점차 발전한다고 강조한다.

저는 브랜덤이 헤겔의 철학을 '화용론에 응답하는 의미론'으로 읽어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맥도웰처럼 (그리고 맥도웰이 지지하는 비트겐슈타인처럼) 헤겔이 '현상/실재 이분법'이라는 사이비 문제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규범적 지위', '상호주관적 인정', '사회적 실천'과 같은 주제들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다만, 브랜덤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그런 주제들을 구체적으로 도출해내어 깔끔하게 체계화하는 방식만큼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다고 봅니다.

5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