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va39 님이 현상학에 대해 제기하신 의문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고, 저는 기본적으로 @fuersichsein 님이 잘 답변해 주셨다고 생각하는데, 처음 질문에서 '현상학'이나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가 너무 넓게 사용되고 있어서 답변의 초점을 맞추기에 좀 까다로운 면이 있다고 봅니다.
가령,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는 사실 철학에서 아주 보편적으로 통용될 만한 전문 용어는 아닙니다. 이 용어는 애초에 건축학에서 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가 사용한 것이다 보니, 철학에 적용되었을 때는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가 모호해지는 용어입니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는 말을 그대로 이해하면 '근대 이후'나 '탈근대'를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근대 이후에 등장한 모든 철학자들을 다 '포스트모던'에 속하는 인물들이라고 보아야 해서 외연이 너무 넓어지니까요. 그래서, 질문자님은 '후설'이나 '현상학'을 '포스트모던'을 대비시키시지만, 사실 후설도 얼마든지 '포스트모던'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고 현상학도 얼마든지 '포스트모던' 사조라고 말할 수 있죠.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분류하는 연구자들이 매우 많아서 애초에 '후설 vs. 포스트모던'이나 '현상학 vs. 포스트모던'이라는 대립 구도 자체가 그다지 엄격하게 성립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 점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질문하신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룬다고 한다면,
(1) 하이데거나 가다머는 판단 중지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
아마도 '선입견'이 모든 경험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하이데거나 가다머의 주장을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신 것 같지만, 이런 해석 자체가 매우 논란의 여지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선입견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순수한 인식이나 순수한 경험은 가능하지 않다."라는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주장이 바로 인식이나 경험에 대한 '판단중지'에 근거해서 도출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가령, 하이데거의 제자인 에른스트 투겐트하트(Ernst Tugendhat)는 Der Wahrheitsbegriff bei Husserl und Heidegger라는 매우 권위 있는 후설-하이데거 연구서에서 하이데거가 언제나 언제나 '판단중지'를 자명하게 전제한 상태에서 자신의 존재 사유를 전개한다고 지적하죠.
“보통 하이데거에게서 판단중지의 부재는 그의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이것은, 나중에 더 보게 되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옳지만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의미에서는 옳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이 개념이 “현존재”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어떠한 것—곧 자신의 “세계”—과 관계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반면, 후설의 초월론적 환원에서는 의식이 그것이 관계하는 것—곧 자신의 “세계”—와 분리된다고 생각한다. […] 하이데거는 더 이상 주어짐의 방식들의 차원에 도달하기 위해 판단중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차원이 후설에 의해 열리게 된 이후, 그는 애초부터 그 안에 서 있었으며 이제 그 차원을 자신 고유의 관계들로부터—더 이상 단순히 대상들의 세계에 대한 배타적 정향 속에서가 아니라—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Tugendhat, 1970: 263 인용자 강조)
더 나아가, 이 점이 바로 하이데거나 가다머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제기되기도 합니다. 하이데거나 가다머는 순수한 인식이나 순수한 경험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내가 '판단중지'를 통해 인식이나 경험을 순수하게 바라보았는데, 순수한 인식이나 경험은 없어. 그게 인식이나 경험의 '본질'이야."라고 역설적이게도 다시 판단중지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가다머의 제자인 잔니 바티모(Gianni Vattimo)는 바로 이 점에서 자신의 스승인 가다머를 비판합니다. 가다머는 여전히 선입견 없이 세계를 보려고 하는 후설의 현상학에 종속되어 있고, 그런 종속성을 더욱 철저하게 극복해야 진정한 해석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요.
현상학이나 해석학 계열이 아닌 다른 '포스트모던' 철학자라고 해서 반드시 상황이 더 좋지만은 않습니다. 가령, 순수한 인식이나 경험을 비판하기 위해 '계보학'이나 '고고학' 같은 방법론을 사용하고자 하는 시도나, '정신분석학' 같은 방법론에 호소하려는 시도는, 결국 그 방법론들을 다시 다른 인식을 비판하기 위한 순수하고 근본적인 층위로 상정하는 문제를 범하게 되죠. 그래서 (a) 후설의 현상학이 제시하는 '순수 의식'이나 '순수 자아' 같은 개념에 대해 이후 철학계의 논의에서 많은 비판이 제기된 것은 맞지만, (b) 그렇다고 해서 이후 철학자들이 반드시 후설의 현상학을 완전히 거부하거나 극복한다고 보기도 힘들고, (c) 현상학 바깥의 철학자들도 여전히 비슷한 논의 구조 속에서 철학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d)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가 그 자체로 현상학 이후 대륙철학계의 하나의 화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현상학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
현상학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정초'할 것인지의 문제와 현상학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의 문제는 별개입니다. 철학에서 흔히 다루어지는 후설-하이데거류의 '초월론적 현상학(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은 전자의 문제에 주로 주목하지만, 소위 '응용현상학(angewandte Phänomenologie)'이라는 분야는 굳이 그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전개될 수 있습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물리학 법칙의 토대가 밝혀져야만 공학이 가능한 것이 아니듯이, 후설이 추구했던 현상학의 철학적 정초가 완전히 이루어져야만 현상학의 실천적 적용이 가능한 것은 아니죠.
그래서 종교현상학, 사회현상학, 예술현상학 등 개별적 분야에서 그 분야의 본질 영역을 기술하는 작업들은 철학과의 안과 밖에서 독립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흔히 사회학에서 '질적 연구'라고 하는 분야가 현상학과 자주 결합되는 경향이 있죠. 국내에서 이 작업에 주목하시면서 응용현상학을 현상학의 미래로 강조하시는 분들 중 한 분이 서울대 이남인 교수님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이런 주장에 크게 동의가 되더라고요.
그밖에도, 오늘날 현상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핫이슈'가 되고 있는 분야로 '비판적 현상학(Critical Phenomenology)'이 있습니다. 제가 이 분야를 크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인종', '젠더', '신체', '장애', '타자'와 같은 조건들로부터 어떻게 주체가 구성되는지를 현상학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작업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실의 사회-윤리적 쟁점들과 현상학이 매우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분야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현재 주목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 주제와 관련된 게일 살라몬(Gayle Salamon)의 논문 "What's Critical about Critical Phenomenology?"이 유명하다고 하고, 또 이 글이 국내에는 에라스무스 연구소 김동규 선생님을 통해 번역도 되어 있다고 합니다.
https://puncta.journals.villanova.edu/index.php/puncta/article/view/2791
https://erasmus.imweb.me/8s3x8n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