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현상학은 어떤 의미를 갖나요?

안녕하세요. 저는 취미로 철학을 공부하는 비전공자입니다.

철학사는 한 번 훑어봤고, 제대로 본 거는 니체+포스트모던 철학입니다.

  • 니체 전집(유고는 대충 넘어가면서, 출판된 건 정독)
  • 푸코(감시와 처벌, 비판이란 무엇인가)

이 외에 니체 관련된 주요한 2차자료들을 정독까진 아니어도 대충 훑어봤습니다.

  • 들뢰즈 니체와 철학
  • 야스퍼스 니체와 기독교
  • 푸코 니체 계보학
  • 데리다 에쁘롱
  • 클로소프스키 니체와 악순환
  • 안드레아스 우르스 좀머의 니체 주석 작업들(NK)

이렇게 공부를 하다가 보니, 문득 현상학이 뭔지에 대한 질문이 생겼는데요, 현상학이라는 게 결국 판단 중지, 현상적 환원, 현상학적 환원, 현전 이런 걸로 결국 끌고 가는 거 아닙니까?

근데 예를 들어서, 현전을 놓고 보면은, 데리다가 <목소리와 현상> 에서 현전 개념 자체가 역사적, 맥락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것 아닌가요? 나머지도 다 마찬가지 잖아요. 하이데거나 가다머는 판단 중지같은 건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여타 포스트 모던 철학자들이 다 각자의 언어로 비슷하게 말하는 것이잖아요.

물론 저런 비판이 어느정도 허수아비 패는 느낌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메를로퐁티나 사르트르나 다양한 철학자들이 저런 모순을 어느정도 해소하면서 현상학을 발전시켰겠죠? 그런데 그 와중에도 제가 느낀 점은 결국 현상학 이라는 타이틀까지 버리진 않고, 조금 더 개선된 현상학으로 언제나 회귀한다는 겁니다.

니체가 선악의 저편 1장에서 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해서 말하듯이, 이건 니체식으로 진리에의 의지가 과잉되어 만들어낸 산물 아닌가요? 혹은 라캉적으로, 일종의 진리에 대한 강박증 아닌가요? 그런 것들을 똑똑한 철학자들이 잘 알텐데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느끼는 바로는, 현상학이라는 게 이런 류의 포스트모던적 비판을 의도적으로 무시해야지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라는 겁니다. 제가 현상학을 오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상학은 체계를 세우려는 의지의 과잉이며, 철학자들이 후설의 현상학의 미숙함을 지적하면서도 현상학이라는 기표로부터 아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철학적 결핍을 채우려는 강박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어, 메를로 퐁티가 후설의 현상학을 비판하면서도, 지각의 현상학을 통해 제대로 된 현상학으로 복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요. (제대로 이해한 거 맞나요?) 제가 보기엔 현상학이라는 기표 자체가 후설 개인이 만든 건데, 현상학에 문제가 있으면 현상학이라는 기표 자체를 폐기하고, 새로운 기표를 세우면 될 일로 보이는데 말이죠.

그래서 결정적으로 궁금한 것은, 위 글에서 제 현상학 이해에 어떤 오해가 있는지 (혹은 다른 철학자들에게도 어떤 오해가 있는지), 그리고 (만약 제 의심이 타당하다면) 오늘날 후설의 현상학이 부정당함에도, 왜 여전히 현상학이라는 기표가 유지되는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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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현상학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아니고, 아직 겨우 학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조심스럽지만, 몇 가지 답변드리고 싶어 글 남깁니다.

1. 현상학은 반(反)-포스트모던적인가?
사실 저는 포스트모던과 모던의 구분에 대해서 명확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떤 '본질'이나 '실체'를 추구하던 전통적 사조에 대한 반기를 뜻한다면, 후설의 현상학 자체는 포스트모던이라고 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현상학의 방법론을 통해 '형상적 본질'을 찾으려고 하고, 스스로 자신의 철학을 '본질의 학문' 이라고 말하기까지 하니까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현상학의 정신 자체가 반-포스트모던적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현상학이 등장한 배경은 과학중심주의나 실증주의라는 근대성의 대표적 징표들에 대한 비판이었거든요. 이런 의미에서 보면 현상학을 완전히 비포스트모던적으로 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니체의 '진리에의 의지'를 인용하며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후설은 '단번에' 어떤 확실한 현상학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식은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상호주관적이고 역사적인 흐름에서 재구성되고 발전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후설의 진리 개념은 포스트모던과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상학의 진리 개념은 어떤 과잉과는 거리가 멀다고 봅니다. 오히려 현상학의 진리는 보다 온건하고 상식적이라는 게 제가 든 생각이에요.
'체계를 세우려는 의지의 과잉'이라는 표현으로 글쓴이님은 들뢰즈나 데리다 류의 철학을 그 반대항으로 염두에 두고 비판을 하고 계신 것으로 보이는데, 현상학의 체계성이 의지의 과잉으로까지 이어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주장의 근거를 조금 더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2. 하이데거나 가다머는 판단중지란 없다고 보았다?
글쓴이님은 후설로 대표되는 현상학의 기본적 방법론이 여러 후대 현대철학자들에 의해 비판받는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제가 데리다나 가다머나 하이데거를 잘 알지는 못하고, 그래서 이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께서 더 잘 설명해주시겠지만, 적어도 제 눈에는 판단중지를 그들이 부정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하이데거의 경우에도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의 개념에 대한 일종의 판단중지를 수행하지 않나요? 판단중지는 사실 현상학에서 그리 난해한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적된다면 현상학적 환원 쪽이 지적되겠지, 판단중지는 '선입견의 총체적 배제'라는 극도로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철학적 태도가 인식론적으로 표현된 것일 뿐이에요. 그렇게 본다면, 가다머나 하이데거나 모두 일종의 판단중지, 즉 엄밀한 선입견 배제와 철학함을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게다가 "완전한 환원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메를로-퐁티조차도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남인 교수님의 『후설과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환원을 사용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요.
그러나 현상학적 환원을 부정하는 학자들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원의 중요성이 완전히 한 사람에 의해 부정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데리다가 현전 개념 자체가 역사적, 맥락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것 아닌가' 하는 점에서 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인디 잘은 모르겠지만, 데리다의 그 책은 초중기 후설에 관한 연구로 알고 있고, 후기 후설에서는 모든 현전과 개념은 역사적 구성물이고 맥락적이고 '지평적인' 구성물임이 강조된다는 점을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3. 현상학에 문제가 있으면 현상학이라는 기표 자체를 폐기하고, 새로운 기표를 세우면 될 일 아닌가?
이에 대한 답변은 다소 더 개인적인 것 같지만, 제가 보기에는 현상학의 프로젝트 자체를 그 본질주의라는 혐의나 모더니즘이라는 혐의로 완전히 폐기하기에는 그 정신의 중요도가 너무 높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현상학에 문제가 있는 것은 그 방법론의 부분들에 있어서지, '엄밀한 철학함' 또는 '철저한 탐구' 라는 근본정신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현상학 자체를 '근본적으로 의식에 주어지는 것을 철저하게 탐구함'이라고 부른다면, 이런 정신적 토대 자체를 버릴 이유를 저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들뢰즈나 데리다 류의 철학적이고 해체적인 방법론이 현실적 지식, 즉 이론과 실천을 통일하는 데에 더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요? 이런 점에서 각각의 철학은 나름의 장단점, 나름의 측면들을 가지기에 함부로 평가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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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잘 읽었고 너무 감사합니다. 3가지 주제로 얘기해주신 부분들 보고 생각을 조금 더 해서 저도 답변 적어봅니다.

1. 체계를 세우려는 의지의 과잉이란?

지식은 물론 언제나 불완전하며, 그것이 역사의 영향사 안에서 재구성되고 발전하는 것은 맞습니다.

(포스트모던 대신 니체랑 라캉만 갖고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욕구가 라캉적으로 보면 거울단계를 통해 형성된 상상계적 자아가, 파편화된 신체를 통일시키려는, 그런 상상계적 욕망에 의해 구성된다는 비판에 대하여 현상학은 어떤 반박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니체가 선악의 저편 1장 혹은 도덕의 계보 제3논문에서 진리에의 의지에 대해 말했듯이, 이러한 진리추구 자체가 이미 진리와는 거리가 먼 심리적 현상(라캉:상상계적 동일시)에서 발생되었음을, 그리고 그것을 해소하려는 시도조차 이미 비진리적임을 인정할 수밖엔 없지 않나요?

이 실재적인 요소를 많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인정하기에 철학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하지 않지만 (어차피 좌절될 것을 안다는 불안감), 오직 철학자들만이, 그리고 이 논의에선 현상학자들만이 철학을 체계적으로 세우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게 세워진 엄밀한 철학은, 결과적으로 타자성을 배척하는 비진리의 철학이 되지 않을까요?

2. 판단중지 등은 없다?

제가 철학을 취미로만 보다 보니 상세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겠지만, 오늘날 당연하다고까지 취급되는 상대주의적인 포스트모던 담론을 통해, "판단중지, 현상적/현상학적 환원, 순수인식은 상상할 대상은 맞지만 도달은 불가능" 하다는 것이 중요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다시말해, 현상학의 그러한 도달불가능한, 소실점으로서의 기표들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상상계적 동일시가 이루어져야 하기에 일단 겉으로-보기에-완벽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이후에 우리는 당연하게도 그러한 기표들에 도달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기표들을 쫓지 못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혹은 저만 편향적으로 생각하는 건가요?)

3. 현상학이라는 기표

앞서 언급했듯, 제가 보기엔 현상학이라는 기표는 '엄밀한 철학함' 등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가정될 때에 가능합니다. 그 기표의 유익함에 대해서는 적극 동의하는 바이지만, 현상학이라는 기표가 실제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선 일단 포스트모던의 지적을 전부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현상학이라는 기표는 포스트모던의 비판이라는 실재의 벽에 가로막혀서 분열되어버릴테니깐요.

현상학과는 조금 다른 얘기지만, 니체의 영원회귀, 초인, 주인도덕 등의 기표 역시 효력을 발휘하려면 실재의 모순을 '해결한척'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긍정적인 방향성으로 손쉽게 되지 않았기에, 유대인을 배척하는 기표가 된 것이 아닐까요? 반면 현대 과학의 기표들은 그것이 철학적으로 엄밀하지 않음에도(물은 H20인가?) 일단 겉으로-보기에-완벽하기에, 지식으로서 효력을 발휘합니다.

현상학이라는 기표는 그러면 어느정도 겉으로-보기에-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일텐데, 그렇다면 그것을 위해 필요한 중간 과정인, '포스트모던 뛰어넘기 과정'이 존재해야 할텐데, 저는 그걸 발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현상학은 포스트모던적인 비판을 무시해야지만 가능한 학문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늦은 시간에 정성스레 답변 달아주신 것에 대해서 다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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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va39 님이 현상학에 대해 제기하신 의문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고, 저는 기본적으로 @fuersichsein 님이 잘 답변해 주셨다고 생각하는데, 처음 질문에서 '현상학'이나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가 너무 넓게 사용되고 있어서 답변의 초점을 맞추기에 좀 까다로운 면이 있다고 봅니다.

가령,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는 사실 철학에서 아주 보편적으로 통용될 만한 전문 용어는 아닙니다. 이 용어는 애초에 건축학에서 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가 사용한 것이다 보니, 철학에 적용되었을 때는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가 모호해지는 용어입니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는 말을 그대로 이해하면 '근대 이후'나 '탈근대'를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근대 이후에 등장한 모든 철학자들을 다 '포스트모던'에 속하는 인물들이라고 보아야 해서 외연이 너무 넓어지니까요. 그래서, 질문자님은 '후설'이나 '현상학'을 '포스트모던'을 대비시키시지만, 사실 후설도 얼마든지 '포스트모던'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고 현상학도 얼마든지 '포스트모던' 사조라고 말할 수 있죠.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분류하는 연구자들이 매우 많아서 애초에 '후설 vs. 포스트모던'이나 '현상학 vs. 포스트모던'이라는 대립 구도 자체가 그다지 엄격하게 성립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 점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질문하신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룬다고 한다면,

(1) 하이데거나 가다머는 판단 중지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

아마도 '선입견'이 모든 경험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하이데거나 가다머의 주장을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신 것 같지만, 이런 해석 자체가 매우 논란의 여지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선입견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순수한 인식이나 순수한 경험은 가능하지 않다."라는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주장이 바로 인식이나 경험에 대한 '판단중지'에 근거해서 도출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가령, 하이데거의 제자인 에른스트 투겐트하트(Ernst Tugendhat)는 Der Wahrheitsbegriff bei Husserl und Heidegger라는 매우 권위 있는 후설-하이데거 연구서에서 하이데거가 언제나 언제나 '판단중지'를 자명하게 전제한 상태에서 자신의 존재 사유를 전개한다고 지적하죠.

“보통 하이데거에게서 판단중지의 부재는 그의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이것은, 나중에 더 보게 되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옳지만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의미에서는 옳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이 개념이 “현존재”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어떠한 것—곧 자신의 “세계”—과 관계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반면, 후설의 초월론적 환원에서는 의식이 그것이 관계하는 것—곧 자신의 “세계”—와 분리된다고 생각한다. […] 하이데거는 더 이상 주어짐의 방식들의 차원에 도달하기 위해 판단중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차원이 후설에 의해 열리게 된 이후, 그는 애초부터 그 안에 서 있었으며 이제 그 차원을 자신 고유의 관계들로부터—더 이상 단순히 대상들의 세계에 대한 배타적 정향 속에서가 아니라—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Tugendhat, 1970: 263 인용자 강조)

더 나아가, 이 점이 바로 하이데거나 가다머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제기되기도 합니다. 하이데거나 가다머는 순수한 인식이나 순수한 경험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내가 '판단중지'를 통해 인식이나 경험을 순수하게 바라보았는데, 순수한 인식이나 경험은 없어. 그게 인식이나 경험의 '본질'이야."라고 역설적이게도 다시 판단중지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가다머의 제자인 잔니 바티모(Gianni Vattimo)는 바로 이 점에서 자신의 스승인 가다머를 비판합니다. 가다머는 여전히 선입견 없이 세계를 보려고 하는 후설의 현상학에 종속되어 있고, 그런 종속성을 더욱 철저하게 극복해야 진정한 해석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요.

현상학이나 해석학 계열이 아닌 다른 '포스트모던' 철학자라고 해서 반드시 상황이 더 좋지만은 않습니다. 가령, 순수한 인식이나 경험을 비판하기 위해 '계보학'이나 '고고학' 같은 방법론을 사용하고자 하는 시도나, '정신분석학' 같은 방법론에 호소하려는 시도는, 결국 그 방법론들을 다시 다른 인식을 비판하기 위한 순수하고 근본적인 층위로 상정하는 문제를 범하게 되죠. 그래서 (a) 후설의 현상학이 제시하는 '순수 의식'이나 '순수 자아' 같은 개념에 대해 이후 철학계의 논의에서 많은 비판이 제기된 것은 맞지만, (b) 그렇다고 해서 이후 철학자들이 반드시 후설의 현상학을 완전히 거부하거나 극복한다고 보기도 힘들고, (c) 현상학 바깥의 철학자들도 여전히 비슷한 논의 구조 속에서 철학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d)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가 그 자체로 현상학 이후 대륙철학계의 하나의 화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현상학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

현상학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정초'할 것인지의 문제와 현상학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의 문제는 별개입니다. 철학에서 흔히 다루어지는 후설-하이데거류의 '초월론적 현상학(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은 전자의 문제에 주로 주목하지만, 소위 '응용현상학(angewandte Phänomenologie)'이라는 분야는 굳이 그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전개될 수 있습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물리학 법칙의 토대가 밝혀져야만 공학이 가능한 것이 아니듯이, 후설이 추구했던 현상학의 철학적 정초가 완전히 이루어져야만 현상학의 실천적 적용이 가능한 것은 아니죠.

그래서 종교현상학, 사회현상학, 예술현상학 등 개별적 분야에서 그 분야의 본질 영역을 기술하는 작업들은 철학과의 안과 밖에서 독립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흔히 사회학에서 '질적 연구'라고 하는 분야가 현상학과 자주 결합되는 경향이 있죠. 국내에서 이 작업에 주목하시면서 응용현상학을 현상학의 미래로 강조하시는 분들 중 한 분이 서울대 이남인 교수님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이런 주장에 크게 동의가 되더라고요.

그밖에도, 오늘날 현상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핫이슈'가 되고 있는 분야로 '비판적 현상학(Critical Phenomenology)'이 있습니다. 제가 이 분야를 크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인종', '젠더', '신체', '장애', '타자'와 같은 조건들로부터 어떻게 주체가 구성되는지를 현상학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작업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실의 사회-윤리적 쟁점들과 현상학이 매우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분야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현재 주목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 주제와 관련된 게일 살라몬(Gayle Salamon)의 논문 "What's Critical about Critical Phenomenology?"이 유명하다고 하고, 또 이 글이 국내에는 에라스무스 연구소 김동규 선생님을 통해 번역도 되어 있다고 합니다.

https://puncta.journals.villanova.edu/index.php/puncta/article/view/2791

https://erasmus.imweb.me/8s3x8n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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