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에 관한 짧은 노트들 (1)

요즘 다른 책들과 함께 틈틈이『우상의 황혼』을 읽는 중인데, 생각보다 어렵네요. 논의가 압축적이기도 하고, 문장 하나하나의 밀도가 너무나 높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읽으면서 든 제 생각을 적어보며 읽어보려고 하고, 이 글이 첫 번째가 될 것 같습니다. 특히 많이 어려웠던 1번에 대해서는 @sophisten 님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책은 박찬국 교수님 번역으로 읽고 있고, 인용된 백승영 선생님의 책은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을,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을, Hill은 얼마 전에 다 읽어서 그냥 참조해본 Nietzsche's Critiques 를 가리킵니다.

틀렸거나 잘못 이해한 점이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1. 「잠언과 화살」 4번에서는 "모든 진리는 단순하다"는 것이 이중적으로(zweifach) 하나의 거짓말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때 '이중적으로'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소 불분명한데, 가능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단순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실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니체가 보기에 우리가 단순하다고 여기는 것은 우리의 상상일 뿐이다. (2) 진리, 즉 참된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니체는 진리는 단순한 것이라고 말하는 철학자들에 대해서 그것이 틀렸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1888년에 쓰인 유고인 15[118] (한국어판 전집 제21권)에 있는데, 그곳에서는 "단순한 모든 것은 단지 상상된 것일 뿐이며, 참이 아니다. 그런데 참된 것은 하나도 아니고, 심지어 하나로 환원될 수도 없다"고 쓰여 있다. 다른 가능한 해석으로는 (1) '모든 진리는 단순하다'는 명제는 거짓이다. (2) 이 명제가 거짓이라는 말이 참인지 니체는 의문시한다. 정도가 될 수 있다. 또한 14[79]를 참조하면 니체는 단일성 개념이 '나'(Ich) 개념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본다. 이를 니체는 감관의 편견이자 심적 편견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부가물들'을 제거하면 어떤 사물(Ding)도 남지 않고, 단지 역동적 양자들과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역동적 양자들만이 남는데, 이것을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고 본 듯하다.

2. 「잠언과 화살」 5번은 '영원히 알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며, "지혜는 인식에도 한계를 긋는다"고 말한다. 이는 니체의 철학의 어떤 비판철학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특히 R. Kevin Hill은 그의 Nietzsche's Critiques에서 (비록 초기에 관한 설명이지만) 니체가 칸트의 '신앙을 위해 지식을 포기하는' 프로젝트를 '예술을 위해 지식을 포기하는' 것으로 전환시켰다고 본다(Hill [2003], 27). 또한 이러한 니체의 태도가 그의 철학적 방법론에 있어서 무엇을 함축하는가도 생각해 볼 만하다. 그는 초험적인 것에 대한 탐구를 단순히 배제하는 것인가, 혹은 단언하여 부정하는 것인가? 이는 니체의 '진리에의 의지' 비판을 참조하면 될 것 같다. 백승영은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생각하고 표상하는 주체가 아니라 가치를 창조하고 해석하는 주체이기에, 그 관점적 특징 때문에 이성 작용의 출발점은 진리에의 의지 같은 이론적 욕구가 아니라 관점적이고 실용적인 관심에 의한 추동이라고 말한다(백승영 [2005], 133).
또한 14[103]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우리의 경험 세계는 자기 보존 본능으로 인해 그 인식 한계에 있어서도 역시 제약되어 있을 수 있다".

3. 「잠언과 화살」 6번은 "자신의 부자연스러운 상태로부터, 즉 자신의 정신성으로부터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가친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부자연스러운 상태'는 힘에의 의지 또는 욕망, 충동, 본능 등이 저지되는 인위적 상태를 가리키는 듯 보인다. 또 이때 이것이 '정신성'과 나란히 말해짐은 주목할 만한데, 정신성이라는 말로 니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니체는 14[107]에서 정신성이 "생리적 사실에 대한 가장 창백한 최후의 복제품"이라고 본다. 또한 이 책의 「반자연으로서의 도덕」에서는 열정의 정신화(Vergeistigung)에 대해서 말하기도 하고, 관능의 정신화는 사랑이라 불린다고도 말한다. 또한 그는 적이라는 존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이 적의를 정신화했다고도 말한다. 이렇게 보면 정신화는 어떤 일차적 충동이나 욕구, 생리적 현상이 높은 단계의 심리적 상태로 발전한 것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니체가 보기에 그런 정신화는 필연적으로 생리학적 징후들을 불완전하게 복제한다. 또한 여기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루소를 연상시킨다.

4. 「잠언과 화살」 10번에서 니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비겁하지 말자! 행동을 하고 나서 그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자!"고 쓴다. "양심의 가책은 고상하지 않다". 이때 그는 '양심의 가책'에 관한 『도덕의 계보』 제2논문의 내용을 상기시킨다. 이때 가책은 행위에 대한 '의식'을 수반하는데, 물론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가 아니라 『도덕의 계보』에서 더 자세히 봐야겠지만, 니체는 의식보다 의식 없음을 강조한다. 즉, 과거의 행위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릴 것임을 '망각' 개념을 통해 논한다. 이는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제2장에서도 나타나 있다. "의식은 본질적으로 반응적이다"(들뢰즈 [2001], 89). 또한 그뿐만 아니라 니체는 행위 이후의 후회에 대해서도 경고되는데, 이것이 니체의 윤리적 관점에서 어떻게 설명되는지가 궁금하다. 아무튼 니체의 의식 비판에 대해 더 공부해 볼 만하다.

5. 「잠언과 화살」 12번은 삶의 이유에 관해 말한다. "만일 살아야 할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삶의 어떠한 방식도 받아들일 수 있다". 덧붙여서 니체는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오직 영국인들만이 그럴 뿐이다"라며 비판한다. 이때 영국인들은 공리주의자들,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늘 주장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는 것 같다. (1)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니체에서 행복은 힘에의 의지의 동기가 될 수 없다. 13[2]에서 니체는 "힘에의 의지의 형태론으로서의 심리학. 행복은 동기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또한 14[5]에서는 최고 유형의 인간을 가리켜 행복한 자라고 이름하지 말기를 경고한다. 마지막으로 14[87]에서는 행복에 이르는 길이란, 삶의 핵심적인 힘들이 모두 소진되었다는 점에 대한 표시라고 말한다. 니체는 행복을 힘에의 의지로 대체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2) 살아야 할 이유를 갖고 있다면 어떠한 삶의 방식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는 점에 대해서, 니체는 우리가 '삶의 이유'를 가진다고 보는가가 의문이다. 사실 니체는 이미 염세주의를 허무주의의 선(先)현상이라고 보면서, 수동적 허무주의, 능동적 허무주의, 완전한 허무주의를 구별하는데, 그 핵심은 수동적이고 불완전한 허무주의는 삶의 의미를 믿을 수 없어 지친 자들로 특징지어지는데 반해, 완전한 허무주의는 능동적 허무주의를 거쳐 자기 자신을 가치 설정자로, 의미 창조자로 이끈다고 본다(백승영 [2005], 206 이하). 즉 니체에게 삶의 의미는 가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창조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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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영국인이었네요!

“모든 종류의 앎과 선택이 어떤 좋음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정치학이 추구한다고 지적했던 좋음은 무엇인지, 그리고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좋음들 중 최상의 것은 무엇인지 논의해 보자. 대중과 교양 있는 사람들 모두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하고, ‘잘 사는 것(eu zēn)’과 ‘잘 행위 하는 것(eu prattein)’을 ‘행복하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강산진 외 3명 옮김, 길, 20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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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가 보기엔

라는 주장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잘 모르겠네요. (이건 글쓴이 분의 문제가 아니라 Kevin Hill의 문제이죠.)

저는 니체가 이렇게 생각했다고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인데, 그렇다고 해도 말이 별로 안되는 주장 같네요. "이기에"라는 말을 써놨으니, P->Q가 되어야 하는데 전건에서 후건이 어떻게 도출되는지..

전후맥락은 모르겠고, 제가 보기에

라는 주장은 간단히 이해될 수 있고, 문제될 만한 발언도 아닙니다. 우리가 대상을 이해할 적절한 Knowledge가 없으면 대상을 잘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 자체를 못할 수도 있죠. 마치 우리가 수학적 지식이 없으면 세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나, 현미경이 없으면 미생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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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감사합니다. Hill의 해석은 맥락상 초기 니체가 칸트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한 것이었고, 그의 의도는 칸트와 비슷한 비판철학적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사실 이것이 저 잠언에 대한 Hill의 직접적인 해석이라기보다는, 저 잠언에서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 덧붙인 말이었어요.
백승영 교수님의 해석에 대해서는 저도 잘은 모르겠네요. 말씀해주신 대로 저 문장은 생각보다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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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영 교수님의 해석이 올바른지는 모르겠지만, 주장 자체는 굉장히 평이한 주장이 아닌가요?

  1. 인간은 해석하는 주체이다. (전제 1)
  2. 해석하는 주체는 관점적 특징을 지닌다. (전제 2)
  3. 따라서 해석하는 주체인 인간이 지닌 이성도 관점적 특징을 지닌다.

이 정도의 이야기가 아닌가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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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공자라서 깐깐하게 보는 건 아닌가 싶긴 한데, 쌤이 자비의 원칙을 아주 잘 적용한 것처럼 보여요. 사실 쌤처럼 입장을 정리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이죠. 칸트 본인조차도 이견을 제시하기 힘들 정도로 누구도 부정하기도 힘들죠.

그러나 저는 전제 1, 그러니까

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치를 창조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특히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가치에 대한 표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 너무나 상식적이라서요. 그래서 최소한 기술이 너무나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이기에"를 쓸 정도로 논리적으로 도출될 주장은 아닌 듯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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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건 니체를 해석하는 사람마다의 스탠스의 차이기는 한데, 저는 아주 상식적인 혹은 전통 철학적인 관점에서 니체의 주장을 평가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복잡하게 생각하기 이전에 상식적인 혹은 전통 철학적인 관점에서 평가하는데, 뭐 그렇게 대단한 말을 니체가 한 것 같지는 않아요.

개인적으로 지금 다루는 "잠언과 화살" 파트를 그렇게 진중하게 다룰 가치가 있나 싶기도 합니다. 참 니체 전공자가 할 말은 아닐 것 같기도 하지만요. :rof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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