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와 물리학자, 그리고 수학자가 스코틀랜드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던 중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검은 양 한 마리를 보았다. 그러자 천문학자가 말했다. "그것 참 신기하군, 스코틀랜드 양들은 죄다 검은색이잖아?" 이 말을 듣고 있던 물리학자가 천문학자의 말을 반박했다. "그게 아니야. 스코틀랜드 산 양들 중에서 일부만이 검은색이라고 말해야지." 이들의 말이 한심하다는 듯, 수학자는 하늘을 잠시 쳐다본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너무 성급한 판단을 내린 거야. 스코틀랜드에는 적어도 몸의 한쪽 면 이상의 면적에 검은 털이 나 있는 양이 적어도 한 마리 이상 방목되고 있는 들판이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한다. 이래야 말이 되는 거라구!"
처럼 양화할 수 있지 않나요? 다만, 양화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이런 술어논리적 번역에도 일종의 철학적 '해석'이 들어간다는 점이 언제나 쟁점이 된다고 생각해요. 가령, 콰인이 잘 지적한 것처럼, "페가수스는 존재한다." 같은 문장도, 페가수스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Px & (∀y)(Px → x = y))
("페가수스화하는 한 마리 말이 존재한다.")
Px: 페가수스화하다.
라고 번역될 수도 있고,
(∃)((Hx & Wx) & Bx & (∀y)((Hy & Wy) & By → x = y))
("날개 달렸고, 말이고, 벨레로폰에게 사로잡힌, 한 마리의 말이 존재한다.")
Hx: 말이다.
Wx: 날개가 달렸다.
Bx: 벨레로폰에게 사로잡혔다.
라고도 번역될 수 있잖아요. 둘 중 어느 쪽 번역을 선택할 것인지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입장을 지니고 있는지에 따라 열린 문제이고, 이 점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존재한다"라고 할 때는 암묵적으로든지 명시적으로든지 여러 가지 철학적 해석을 전제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 (콰인이 '존재론적 개입'과 '존재론적 상대성'이라는 표현으로 지적한 문제이지만, 저는 이러한 주장이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한 주장과도 상당 부분 일맥상통한다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