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재글] 과학철학에서의 논리 -서론 (完)

환원에서 수반으로

슐릭, 카르납, 노이랏(Otto Neurath)과 같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과학적 합리성의 기준을 최상으로 유지하고자 했다. 대다수는 과학적 합리성을 취하면 물리주의 또한 취해야 한다고 믿었다. 여기서 물리주의란 물리과학이 존재론적 주장의 최종 결정권자라는 논제이다. 요컨대 그들은 오직 물리학이 어떤 것의 존재한다는 것을 보증할 때에만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우리는 천사, 악마, 마녀, 요정과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거부하는 데에는 별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서로에 관해 혹은 자기 자신에 관해 하는 진술에 대해서는 어떨까? 예컨대 내가 만일 “쇠렌은 아파”라고 말한다면 나는 “쇠렌”이 지시하는 대상의 존재와 “아픔”이라는 속성에 존재론적으로 개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리과학이 쇠렌이라는 대상이나 아픔이라는 속성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는다면, 어떻게 물리과학이 이런 주장을 보증할 수 있겠는가?

물리주의의 일반적 논제와 사람은 신체라는 특수한 논제는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논제들을 기호 논리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해명하려는 시도는 20세기의 것이었다. 이 개념을 성공적으로 해명한다면 물리주의는 모호한 이념적인 입장에서 선명한 과학적 가설로 탈바꿈할 것이다. (이 가설이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하다는 걸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반대 논증에 취약해질 만큼 분명해진다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r(x)가 아픔이라는 속성을 지시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물리주의자들은 자연스럽게 r(x)를 사용하는 진술이 실제로는 거짓이거나, (2) 기초 물리학의 언어에 어떤 술어 φ(x)가 있어서 ∀x(r(x)↔φ(x))가 성립한다고 볼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만일 r(x)를 사용하는 진술이 적절한 진술이라면 r(x)는 반드시 그 기저에 있는 φ(x)라는 물리적 속성에 짝지어져야 한다.

물리주의자는 ∀x(r(x)↔φ(x))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고 싶어 할 것이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적 이원론자조차도 이 진술이 우연적으로 참이라는 것은 받아들일 것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적 이원론자도 아마 우연적 사실의 문제로서 아픔이라는 속성과 짝지어지는 φ(x)라는 물리적 기술이 존재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것이다. 물리주의자는 아픔을 경험하는 것과 물리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 사이에 더 두꺼운 연결고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최소한 환원주의는 다음을 주장할 것이다.

T ├ r(x)↔φ(x)

여기서 T는 물리 세계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이론이다. 즉, 일상적인 언어 사용이 올바르다면 그것은 기초 물리학의 참인 진술로 번역될 수 있다.

이런 언어적 환원주의는 20세기 초기 분석철학자들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혹은 적어도 과학적 경향이 더 강한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확실히 환원주의는 U.T. 플레이스(U.T. Place)와 허버트 파이글(Herbert Feigl)과 같은 명시적인 지지자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3분기쯤에 이르러 이 견해는 한물 간 것이 되었다. 그 배경에는 퍼트넘이나 포더(Jerry Fodor)와 같은 분석철학의 선도자들이 환원주의적 관점이 불합리하다는 점을 논증했다는 것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철학자들의 취향에서 멀어지지 않은 것은 환원주의 논제를 엄밀하게 해명함으로써 찾은 자연주의적 태도였다. 이제 분석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자연주의적 경향을 표현하는 새롭고 더 그럴듯한 방식을 찾고 있었다.

분석철학에는 또 다른 움직임이 있었다. 형식적 태도에서 실질적 태도로 돌아가는 움직임, 즉 구문론적 관점에서 의미론적 관점으로의 이행이었다. 실제로 이 움직임은 개념을 구문론적으로 해명하는 것에서 의미론적으로 해명하려는 경향성으로 나타났다. 다만 “환원”이라는 단어가 너무 안 좋은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에 새로운 단어가 필요했다. 그 결과로 분석철학자들은 “수반”(supervenience)이라는 단어를 도입했다. 도널드 데이빗슨(Donald Davidson)은 이렇게 쓴다.

정신적 속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물리적 속성들에 의존적, 혹은 수반한다. 여기서 수반은 두 사건이 물리적 측면에서 정확히 동일한데 정신적 측면에서 다른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혹은 어떤 대상에 있어서 어떤 물리적인 측면의 변화 없이 정신적인 측면의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Davidson, 1970)

데이빗슨이 서술적으로 제시한 수반의 정의가 형식화를 요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추후에 살펴보겠지만, 수반 개념을 정식화하고 나면 사실 그것은 모형 이론에서 암묵적 정의가능성 개념과 다르지 않다.

1970년대 철학자들이 보기에 얇은 구문론적 환원 개념에서 두꺼운 의미론적 수반 개념으로 이행한 것은 분명 중요한 발전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1980년대에 이르러 수반 개념은 분석철학의 몇몇 분야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어떤 불합리한 철학적 입장이 단지 그와 관련된 개념을 구문론적인 것에서 의미론적인 해명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그럴듯한 입장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것을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 경우로 말하자면, 수반 개념이 사실 환원가능성을 의미론적 용어로 재구성한 것에 다름 아닌 것 아닌가 하는 우려라 할 수 있다. 6.7절에서 볼 텐데, 만일 수반 개념이 암묵적 정의가능성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베스의 정리(Beth’s theorem)는 수반이 환원가능성과 동치라는 것을 보여준다.

왜 철학자들은 마음-두뇌 환원주의를 불합리하다고 판단했을까? 매우 흥미롭긴 하지만 이미 다른 곳에서도 많이 논의된바 여기서 우리가 논증을 검토하는 일을 하지는 않겠다. 우리는 그보다 환원에 반대하는 논증이 환원을 구문론적 개념으로 이해했을 때만 효과적이고 의미론이 환원에 관해 더 나은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기존의 반론을 이겨낸다는 주장에 좀 더 관심을 가져볼 것이다.

이 책 전반에 걸쳐 우리는 논리적 구문론과 의미론의 근본적 이원성을 주장할 것이다. 이 이원성이 성립하는 한, 어떤 개념에 대한 의미론적 설명이 더 본질적이라거나 그것을 통해 인간의 표상의존성을 극복할 수 있다거나, 그것이 마음과 세계의 갈라진 틈 사이에 “세계”로 향하는 다리를 놓는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논리적 의미론은 (..잠시..) 그냥 고급 수학이다. 으레 말하듯 의미론이 세계에 관해 무언가 주장하는 활동을 등을 통해 세계에 있는 것들을 표상하는 데 사용될 수는 있지만, 그 표상의 방법이란 것은 다른 수학에서 하는 것들과 차이가 없다. 따라서 논리적 구문론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와 퍼즐, 혼동은 그 못난 얼굴을 논리적 의미론에서도 쳐들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구문론적 현미경으로 검토해보았을 때 과학적 반실재론이 무너진다면, 의미론적 현미경으로 검토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무너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심신 환원론이 구문론적으로 해명되었을 때 불합리하다면, 그것을 의미론적으로 해명한다고 해서 사정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나는 개념을 의미론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을 덮어놓고 싸잡아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모형론이 단순히 아름다운 수학적 이론일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고에서 특히나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철학적 논제(예컨대 물리주의나 반실재론)가 구문론적으로 해명되었을 때는 지지될 수 없지만 의미론적으로 해명되면 지지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의심해야 한다. 또한 의미론적 방법이 구문론적 방법보다 사이비문제를 덜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심해봐야 한다.

실재론과 동치

앞서 살펴봤듯이, 20세기 철학의 많은 논쟁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이론이 다른 이론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예컨대 심신 관계에 관한 논쟁은 우리의 상식 심리학이 뇌과학 이론, 궁극적으로는 물리학 이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틀을 잡을 수 있다.

우리가 추상성의 수준을 높인다면 20세기 철학을 양분한 문제 역시 이론들의 관계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논리실증주의자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던 견해는 일종의 반실재론이었다. 형이상학적 주장은 물론이요 과학에서의 이론적 주장에 대해서도 말이다. 놀랍지 않은 사실이지만,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선호했던 이론적 동치에 관한 견해는 경험적 동치였다. 즉, 두 이론이 동치라면 오직 그러한 경우에 두 이론은 동일한 예측을 제시한다. 직관적으로 동치인 것처럼 여겨지지 않는 이론들도 동치라고 주장하는 까닭에, 이런 동치 개념은 상당히 느슨한 축에 속한다.

이제 시간을 건너 뛰어 20세기 말로 가면 이런 관점이 급진적으로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분석 형이상학자들은 부분전체론적 허무주의 대 보편주의, 현재주의 대 영원주의(presentism versus eternalism)와 같은 논쟁에 뛰어들고 있었다. 또한 물리철학자들은 양자 역학의 해석에 관한 봄 역학(Bohmian mechanics) 대 에버렛 해석(Everettian interpretation)을 두고, 시공간에 대한 실체주의(substantivalism) 대 관계주의(relationalism)를 두고 대립했다. 흥미로운 지점은 철학자 커뮤니티 안에서 이론적 동치를 보는 일반적인 기준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70년 전만 해도 이 논쟁들은 사이비 논쟁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이런 논쟁들은 경험적으로 동치인 이론들 사이에 무엇 하나를 선택하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철학자 사회 전체가 이론적 동치에 관해 느슨한 견해에서 보수적인 견해를 취하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이론적 동치에 관해 대체로 합의된 견해에서 이탈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1970년대의 힐러리 퍼트넘이다. 퍼트넘의 견해는 모형 이론적 논증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론”을 제시하지만 동치인 이론들의 사례를 제시한 것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퍼트넘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정식화할 수 있다는 점, 이후 양화사 변이 논쟁에서 핵심 사례로 등장하는 “카르납과 부분전체론자”(Carnap and the mereologist)와 같은 유명한 사례를 든 바 있다.

이 책에서 전개된 형식적 방법론의 이점을 하나 꼽자면 20세기 철학에서 등장한 관점들을 분류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실재론적 경향은 이론적 동치에 관한 더 보수적인 기준을 채택한 것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고, 반실재론은 더 느슨한 기준을 채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미국 정치판이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양분된 것 마냥 “실재론 대 반실재론” 구도로 이해하면 안 된다. 실재론-반실재론 질문에 대한 답은 양분되는 게 아니라 연속적인 차원에 놓여 있으며 그 연속성은 이론적 동치에 관한 견해들의 연속성에 대응한다. (사실 이론적 동치에 관한 견해들은 다차원적 연속성 속에 있다. 여기서는 직관적인 이해를 위해 1차원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아마 우리는 이론적 동치에 관한 견해가 두 극단의 사이를 향하려 한다는 것을, 그리고 많은 철학적 질문들은 아주 약간이라도 움직여야 한다면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론적 동치에 관한 세 가지 온건한 견해를 개진한다. 첫 두 견해는 이론들이 동치라면 오직 그러한 경우에 두 이론은 상호번역가능하다(intertranslatable)고 주장한다. 두 견해의 차이는 “번역” 개념을 약간 다르게 이해하는 점에서 생긴다. 첫 번째 견해이자 가장 보수적인 견해는 양화사를 포함하는 진술이 불변적이고 따라서 좋은 번역은 이 점을 보존해야 한다고 본다. (이 상호번역가능성 개념이 “공통의 정의적 외연을 가짐”(having a common definitional extension)에 대응한다는 것도 보일 것이다) 그보다 조금 더 느슨한 견해인 두 번째 견해는 한 언어의 양화 진술을 다른 언어에서의 양화 진술의 복합문으로 번역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 상호번역가능성 개념은 “공통의 모리타 외연을 가짐”(having a common Morita extension)에 대응한다는 것도 보일 것이다) 세 번째 견해는 가장 느슨한 견해로서 언어적 고려사항 보다는 과학적 활동에서 동기를 얻은 것이다. 과학자들은 두 이론을 통해 “같은 것을 할 수 있으면” 두 이론을 동치로 보는 것 같다. 이 책에서는 과학 이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형들의 범주”(category of models)라는 용어로 해명할 것이다. 세 번째 견해는 만일 두 이론의 모형들의 범주가, 범주론적인 엄밀한 의미에서 동치라면 두 이론은 동치라는 것을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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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대략적으로 살펴본 정도이지만, 매우 흥미로운 글이네요. 분석철학의 초창기 역사부터 따라가면서 과학과 관련된 다양한 논쟁과 쟁점을 소개해 주고 있다 보니, 앞으로 이 주제를 공부할 때 자주 참고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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