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재글] 과학철학에서의 논리 -서론 (3)

의미론적 전회

1930년대 초반, 비엔나 서클은 바르샤바에서 활동하던 논리학자 그룹, 그중에서도 특히 알프레드 타르스키(Alfred Tarski)와 접촉했다. 20세기 분석철학을 돌아보면 타스키의 엄청난 영향력은 논리적 의미론이라는 유산부터 구조(structure)와 구조 안에서의 참(truth in a structure) 개념에 대한 해명까지 미치고 있었다. 특히 하반세기에 분석철학은 논리적 의미론과 깊게 얽혀 있었고, 모형론에서 나온 아이디어들이 형이상학, 인식론, 과학철학, 수리철학의 논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었다.

1930년대 쿠르트 괴델이 페아노 산술체계의 불완전성을 증명했을 때 순수하게 구문론적인 수학의 메타 이론의 가능성은 이미 의문에 부쳐졌다. 그 시기에 새로운 세대의 논리학자들은 이론에 관한 모든 흥미로운 질문들이 다른 수학적 대상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은 채 이론을 “그 자체로만” 바라봄으로써 답변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와 달리 이들은 이론에 관한 흥미로운 질문들 중에는 기존에 수학적 대상으로 이해되던 것들, 예컨대 집합들의 전체 집합과 이론이 어떻게 관계하는지와 같은 질문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논리적 의미론이 탄생했다. 메타이론을 연구하는 이 새로운 접근 방식은 타르스키가 “구조 안에서의 참”과 “이론의 모형”이라는 것을 정의했을 때 예견된 바였다. 그래서 타르스키 이후, 우리는 이론 T를 이해하기 위한 장치로서 구문론적 대상으로서의 이론뿐만 아니라 T의 모형들의 참된 전체 집합 Mod(T)도 갖게 된 것이다.

바스 반 프라센(Bas van Fraassen)은 과학철학을 위한 도구로 논리적 의미론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들 중 하나였고,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당시 지배적이었던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대안 견해를 발전시켰다. 반 프라센은 이론의 경험적 내용이 구문론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퍼트넘의 논증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철학적으로 좋은 방향인데) 퍼트넘의 전건긍정식을 후건부정식으로 바꾸어놓았다. 문제는 경험적 내용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문론적으로 해명하려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반 프라센은 경험적 내용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의미론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경험적 내용 개념을 해명하게 된다면 과학적 실재론의 공격으로부터 경험주의를 방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언쟁과 회피 모두 메타논리적인 프레임워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970년대부터 과학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구문론과 의미론의 위치에 대한 이 작은 논쟁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퍼트넘이나 반 프라센 같은 이들이 “이론에 대한 구문론적 견해”를 비판하기 이전 시기에 과학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수리논리학에서의 새로운 발견에 의거해서 자주 이루어졌다. 반 프라센이 특히 지적하듯이, 이런 논의가 사소해 보이는 질문에 달려 있다는 것을 철학자들이 발견할 때마다 논의 자체가 퇴보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예를 들어, 재귀적으로 공리화된 이론의 관찰가능한 결과가 또한 재귀적으로 공리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따위가 그렇다. 구문론에서 의미론적 방법으로의 전회는 부분적으로 실질적인 과학적 활동에 좀 더 충실하는 방향으로의 전회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철학자들은 이제 수리논리학에 집착하면서 제기하는 문제가 아니라 실제 과학 연구의 현장에서 등장하는 질문을 묻기 시작한 것이다.

논리적 구문론에서 벗어남으로써 철학자들이 실제 과학 이론에 좀 더 가까이 참여한다는 점은 건강한 결과였다. 이론에 대한 구문론적 견해가 쇠락한 때부터 과학철학자들이 물리학, 화학 등에서의 특수한 이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반 프라센과 수피스(Patrick Suppes) 등이 옳게 지적했듯이, 과학자들은 딱히 이런 이론들이 1차 공리화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이론들을 1차 논리로 표현하는 것은 오히려 횡포일 것이다. 따라서 구문론적 관점이 쇠락함으로써 철학자들은 위상공간이나 리만 다양체, 힐베르트 공간, C*-대수 등과 같은 집합론적 구조라는 자원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미론적 전회의 결과가 언제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하나만 꼽자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철학자들이 서로 대화를 자주 하지 않게 됨으로써 과학철학 전반의 엄밀성의 기준이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예를 들어, 두 과학철학자가 동형 모형들(isomorphic models)은 모두 동일한 가능성을 나타내는지 아니면 다른 가능성을 나타내는지 논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모형”이나 “동형사상”(isomorphism)이라는 개념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 사실 많은 과학철학자들은 “동형사상”이라는 개념에 의존하고 이 개념을 논증에서도 많이 쓰지만 그것에 대해 엄밀한 형식적 해명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그들의 논증은 동형사상은 구조를 보존한다는 모호한 의미에 의존하고 있으며 심지어 여기서 구조가 무엇인지는 더 모호할 따름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과학(물리학, 수학, 논리학)에서 가져온 전문용어로 철학적 논의를 전개하지만 실제로 그 용어의 기술적 기반은 잃어버린 경우를 많이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결과는 언제나 철학자들이 혼란을 줄이기는커녕 가중시키는 것으로 귀착된다. 과학철학이 명료함과 논리적 엄밀성의 예언자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과학철학이 이 모양이 난 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른다. 과학철학자가 명료성을 끌어올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례를 꼽자면 이론적 동치(theoretical equivalence) 라는 개념이다. 과학자들, 특히 물리학자들은 두 이론이 동치라는 개념을 자주 쓴다. 이런 판단은 비단 이론들에 대한 과학자 개인이 어떤 태도 취할지 뿐만 아니라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이론 T1과 T2 중 무엇을 선택할지 판가름할 실험을 기획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문제가 그렇다. 가령 고전 역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라그랑지안 프레임워크와 해밀토니안 프레임워크가 동치라는 말을 자주 들을 텐데, 바로 그들이 동치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둘 중에 무슨 이론을 고를지 선택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내 경험상 철학자들은 과학자들에게는 낯선,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용어를 가져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만일 어떤 분석철학자에게 누군가가 “두 문장 φ와 ψ는 언제 같은 것을 의미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아마 “두 문장이 동일한 명제를 표현할 때죠”라고 답할 것이다. 여기서 “명제”라는 단어는 물리학자에게는 낯선 것이다. 게다가 동의성(synonymy)에 관한 실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그에게 “이론 T1과 T2 는 언제 같은 것을 말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아마 “두 이론이 같은 가능세계에서 참일 때죠”라고 말할 것이다. 어쩌면 이런 답은 철학자들의 머리에는 무언가 그림을 그려낼지도 모르겠지만 물리학자의 머리에는 그 비슷한 걸 그려내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설령 그려냈다 하더라도 논쟁적인 경우에서 뭔가 결정을 내릴 때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라그랑지안 역학과 해밀토니안 역학이 동치인지,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과 슈뢰딩어의 파동 역학이 동치인지를 알고 싶다. 가능세계의 공간이라는 게 설령 있다 하더라도 쉽게 살펴보기가 어렵고, T1이 참인 가능세계의 부분집합과 T2가 참인 부분집합을 비교하는 작업은 거의 할 수 없다. 즉, “같은 가능세계에서 참”이라는 분석철학자의 말은 동치 개념의 해명이라고 할 수 없다. 카르납적인 의미에서 해명은 한 개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콰인처럼 명제나 가능세계, 혹은 분석철학자들이 흥미롭게 여기는 개념들을 다 퇴출시켜야 한다고 요청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저 이런 개념들이 정밀과학에서의 사용되는 비슷한 개념들의 후예 혹은 사촌지간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분석철학자들은 그들이 과학을 이해하고 명료하게 만들고 싶은 만큼 과학이 쓰는 단어를 과학적 맥락으로 되돌아가 연결시키는 것을 배우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철학자들의 가능세계는 논리학자들의 “이론의 모형”, 수학자들의 “미분방정식의 해”, 그리고 물리학자들의 “상태 공간의 점”의 후예이다. 그러니 가능세계에 관해 말하는 것은 좋지만 그 개념을 과학에서 사용하는 방식에 맞게끔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카르납은 어떤 개념에 대한 철학적 해명은 반드시 구문론적이어야 한다는 제약을 스스로 걸었다. 예를 들어, “관찰 문장”에 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구문론적 메타논리 언어로 그에 대응하는 술어를 구축해야 한다. 여기서 구문론적 메타논리 언어란 원초적 개념이 “술어 기호”와 “이항 연결사”와 같은 것인 언어를 말한다. 카르납은 그런 술어를 정의하려고 시도했지만 콰인과 퍼트넘 등은 카르납의 해명이 부적합하다고 보았다. 이 지점에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많다. 그리고 그 방향 중 하나는 거의 탐색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첫째로, 콰인과 퍼트넘이 그랬던 것처럼 논리적 구문론을 고수하며 철학적 관점을 바꿀 수 있다. 둘째로, 반 프라센이 그랬던 것처럼 논리적 의미론으로 넘어가서 카르납의 철학적 관점을 고수할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반 프라센의 철학적 관점은 카르납의 것과 많이 다르다. 여기서는 반 프라센의 관점 중 핵심적인 부분이 콰인보다는 카르납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1950년대의 논리적 구문론이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을 들어, 발전된 구문론을 통해 철학적 개념을 구문론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 더 가망성 있어졌다는 것에 희망을 걸 수 있다. 이 세 번째 방향이 이 책의 목적 중 하나이다. 즉, 구문론적 분석을 더 미묘하고 복잡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 말이다.

광기의 모형 이론

1970년대에 이르러 과학적 실재론은 과학철학의 주류 견해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이 바닥의 주요 인물은 보이드(Richard Boyd), 처칠랜드(Paul Churchland), 키처(Philip Kitcher), 루이스(David Lewis), 새먼(Wesley Salmon), 셀라스(Wilfried Sellars) 등이었다. 그 시절 급진적 반대자였던 퍼트넘은 다시 수리논리학이라는 도구를 집어 들고 이번에는 실재론의 비정합성을 주장했다. 그의 유명한 “모형이론 논증”에서 퍼트넘은 논리적 의미론, 특히 뢰벤하임-스콜렘 정리는 모든 일관적 이론이 참이라는 것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퍼트넘은 이론적 동치에 관해 좀 더 느슨한 견해로, 기실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경험적 동치 개념보다도 더 느슨한 견해로 돌아섰다. 퍼트넘의 결론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해석에 따르면 퍼트넘의 결론은 임의의 두 일관적인 이론은 서로 동치라는 것을 함축한다.

퍼트넘의 급진적인 주장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든 간에, 그의 주장이 몇몇 흥미로운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퍼트넘의 주장은 대(大) 실재론자인 데이빗 루이스로 하여금 그의 형이상학적 체계에서 자연적 속성의 역할을 밝히게끔 추동했다. 루이스에 따르면 퍼트넘의 논증이 가진 결함은 술어 P가 실제 세계에 있는 대상들로 구성된 임의의 부분집합에 할당될 수 있다는 가정이었다. 루이스에 따르면 이 가정은 잘못된 것인데, 그 까닭은 사물들을 임의로 모아놨다고 해서 그것이 자연종에 대응되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T에 등장하는 술어가 현실 세계에 있는 대상들의 자연적 집합에 할당되는 해석만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T가 일관적이라도, T가 현실에서 참이 되는 해석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퍼트넘에 대한 루이스의 응답이 효과적인지에 관해서는 견해가 엇갈린다. 그러나 일단 우리의 목적에 비춰보면 중요한 것은 루이스의 응답이 이론적 동치에 관해 좀 더 보수적인 견해로 나아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루이스가 제시한 이론적 동치의 개념이 반대 방향으로 너무 나아간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루이스를 해석하는 한 가지 방식에 따르면 그의 주장은 두 이론 T와 T′은 오직 “원초적 개념”(primitive notions)을 공유하는 경우에만 동치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주장을 문자 그대로 1차 이론에 적용하면 T와 T′이 동치인 것은 오직 동일한 기호로 쓰였을 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조건은 이론들이 동치이기 위해서 표기상의 변화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셈이 된다.

루이스가 실재론적 입장을 분명히 표현하는 동안 퍼트넘은 느슨하고 포괄적인 이론적 동치의 기준을 지지하는 논증을 모색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그가 가진 막대한 수학적 지식을 동원해 수학자들이 동치라고 부르는, 그러나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은 동치가 아니라고 볼 이론의 사례들을 가져온다. 퍼트넘이 여기서 즐겨 쓰는 예는 공리적 유클리드 기하학이다. 어떤 수학자들은 점을, 다른 수학자들은 선을 원초적인 것으로 두고 정식화하지만 그들은 결코 어떤 정식화가 더 정확한지 논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퍼트넘은 과학자들이 동치라고 선언하지만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은 동치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실재론의 과학적 적격성을 공격한다.

퍼트넘이 이런 사례를 제시했을 때, 분석철학은 안타깝게도 그 자신의 논리적, 수학적 기원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었다. 실상으로 드러난 바, 퍼트넘의 예시는 널리 논의가 됐지만 그 논의가 고도의 논리적 엄밀함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 예로, 그 누구도 “동치”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비록 엄밀하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이 논의는 퍼트넘이 제시한 두 번째 예시와 관련해서 이어졌다. 두 번째 예시에서 퍼트넘은 다음 줄에 몇 개의 개체가 있는지 묻는다.

☆ ☆

이 질문에 서로 다른 대답을 한 두 형이상학 학파가 있다. 부분전체론적 허무주의(mereological nihilist)에 따르면 있는 것은 두 개이다. 그 두 개는 모두 별표이다. 부분전체론적 보편주의(mereological universalist)에 따르면 있는 것은 세 개이다. 두 개의 별표가 있고, 두 별표로 구성된 복합체가 있다. 그러나 퍼트넘은 이 두 학파의 논쟁은 “순전히 언어적 논쟁”이며 두 입장 중 어느 쪽이 더 옳거나 그르지 않다고 선언한다.

다시 돌아와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퍼트넘의 주장이 이론적 동치의 기준을 느슨하게 만들자는 제안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이 논쟁에 참여함으로써 형이상학자들은 암묵적으로 더 보수적인 동치 기준을 도입한다. 바로 이 기준이 도입될 때 비로소 한 쌍의 별표가 개별 별표와 다른 무언가인가 하는 게 문제가 된다. 퍼트넘은 이론적 동치에 관한 더 느슨한 기준을 도입하자고 강권한다. 이에 따르면 그 쌍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된다.

7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