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 Halvorson 이라는 과학철학자가 쓴 The Logic in Philosophy of Science 의 아주 흥미로운 서론을 번역/연재 해봅니다.
이전에 티모시 윌리엄슨이 쓴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라는 글을 번역한 적이 있었는데요, 이번 글도 비슷하게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논리학의 발전과 과학철학이 어떻게 얽히고 설켜 왔는지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뛸 정도로 흥미진진한 글이었습니다. 수리논리학을 더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어서 스터디도 참여하게 되었고요. 여러분들도 색다른 재미를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소절을 몇 개씩 잘라서 올려보겠습니다.
번역에 관하여
(1) 번역본의 원문은 구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런던정경대 페이지)
(2) 문장부호 등은 (실수하지 않았다면) 저자가 쓴 방식 그대로 옮겼습니다.
(3) 촌스럽지만 AI 번역은 아닙니다. 몇 달 전에 읽으면서 직접 번역한 거라 오역이 있을 수 있으니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새로운 유형의 철학
어떤 사람들은 철학이 절대 발전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실은 전문적인 철학자들이 다른 누구 못지않게 더 자주 그렇게 생각을 하고 더 통렬하게 그렇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20세기 초엽, 기존의 모든 철학을 쓰레기 더미에 던져버리고 밑바닥부터 재건하기로 결정하며 고심을 하던 철학자들이 있었다. “왜 철학은 과학처럼 되면 안 되는가?” 그들은 물었다. “철학은 왜 진정한 발전을 하지 못하는가?”
여러분들은 어쩌면 이 철학자들이 경험적 자료와 실험이 없다는 점을 철학의 문제로 꼽았으리라 추측할 수도 있겠다. 경험 과학의 한 가지 장점은 형편없는 생각이 실험을 통해 반증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최초의 과학철학자들의 진단은 달랐다. 그들은 경험적 시험가능성이 과학 발전의 필요조건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들이 길잡이별로 삼은 것은 경험과학이 아니라 수학과 수리 물리학이었다.
19세기는 수학에서 거대한 발전이 있었던 시기였다. 단순히 오래된 문제와 그 응용문제에 답하는 것뿐만 아니라 수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기초를 명료하게 하고 확충한 때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조지 부울(George Boole)은 명제들 간에 성립하는 논리적 관계의 구조를 밝혔고, 게오르크 칸토어(Georg Cantor)는 ‘무한’의 개념에 관한 엄밀한 설명을 제시했다. 칸토어의 작업을 통해 집합에 관한 새로운 수학적 이론이 발전할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논리학자 고틀롭 프레게(Gottlob Frege)는 수학에서의 모든 타당한 논증 형식에 관한 엄밀한 설명을 제공하는 새로운 유형의 기호 논리를 제시했다. 위대한 독일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David Hilbert)는 해석 기하학의 유구한 전통 위에서, 모든 수학적 용어들이 “탈해석 된”(de-interpreted) 매우 중요하고 범용적인 공리적 방법론을 제시했고, 그로써 증명이 올바른지를 순수하게 형식적 기준에 근거해서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좀 더 젊은 세대에 와서는 사변 철학의 두루뭉술한 용어들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명료함과 엄밀성의 표준이 수학 분야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이 수학자들이 찾아낸 마법은 도대체 무엇인가?”20세기 초엽에 철학적 성향을 띤 과학자들은 이렇게 물었다. “사변 철학자들이 중언부언하고 있을 동안, 어떻게 수학자들은 ‘무한’이나 ‘연속 함수’ 같은 개념을 엄밀하게 이해할 수 있었는가?” 새로운 세대에 따르면 이제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방법론을 다시 생각해야 할 때였다.
철학이 19세기 수학의 모습으로 재창조되어야 한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었다. 러셀은 새로운 철학적 방법론이 성취할 수 있는 것에 관해 전혀 겸양을 떨지 않았다. 실제로 러셀은 자신을 위대한 사변 철학자들의 직접적 경쟁자로 제시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헤겔이었다. 러셀은 새로운 기호 논리학에 힘입어 자신이 헤겔보다 더 명료하고 정확하게 실재의 근본적 구조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는 실로 헤겔의 일원적 관념론을 대체하고자 의도된 것이었다.
러셀의 거대한 형이상학적 야망은 그의 학생이었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돌을 맞게 된다. 본질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 Philosophicus)는 수리논리학의 언어가 실재 자체의 구조를 반영하기에 적합하다는 아이디어에 대한 귀류법을 수행하고자 의도된 것이다.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의 격렬한 비판을 수용한 만큼 철학과 수리논리학의 연합은 만족스럽지 못하게 끝났다. 철학이 수리논리학과 짝을 맺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두 번째 움직임이 발생했다. 이번에는 전통적인 사변적 형이상학의 야망을 포기하는 움직임이었다. 이 두 번째 움직임은 철학적 탐구의 새로운 방법론뿐만 아니라 철학의 근본적 목적까지도 재고하고자 했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19세기는 수리물리학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수학에게는 황금기였다. 한 세기에 걸쳐 뉴턴 물리학은 기존에는 뉴턴 물리학이 다루는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겨졌던 계(system)를 기술할 수 있게끔 성공적으로 확장되었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 이전에는 열을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흘러가는 연속적 물질로 간주했던 열역학(thermodynamics)이 온도의 변화를 기술했었다. 그러나 그 즈음에 이르러 이 물체들이 뉴턴 역학의 법칙을 따르는 매우 작고 셀 수 없이 많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열역학이 예측하는 바와 동일한 예측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열역학이 통계역학으로 환원된 것이다. 이와 관련한 철학적 논쟁도 잇따랐다. 관찰될 수 없는 것, 예를 들어 열과 같은 거시적 현상을 설명한다고 여겨지는 작은 입자(원자)의 존재에 관한 논쟁이었다. 볼츠만(Ludwig Boltzmann), 마흐(Ernst Mach), 플랑크(Max Planck), 푸앙카레(Henri Poincaré)와 같은 선도적인 과학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입장을 견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논의는 과학적 지식의 본성과 범위에 관한 좀 더 일반적인 성찰로 이어졌다.
이 당시의 과학자들은 20세기 초엽에 물리학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05년부터 1915년 새 물리학에는 최소 세 번의 대격변이 있었다. 맨 처음은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것이고, 두 번째는 보어(Niels Bohr)가 수소 원자에 관한 양자 모형을 제시한 것이며, 세 번째는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것이었다. 이런 대격변을 통해 분명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는 과학의 본성에 관해 생각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고 있다고 믿어왔지만 아인슈타인이나 보어 같은 사람들은 게임의 규칙을 바꾸고 있었다. 이제 과학 전체의 본성에 관해 성찰해볼 시기가 무르익은 것이었다.
새로운 물리학 이론들은 특히나 물리 과학에서 수학의 역할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세 이론(특수, 일반 상대성 이론 및 양자 이론)은 모두 이전에 물리학자들이 쓰지 않았던 고도로 추상적인 수학적 개념을 사용했다. 세 이론 중 그나마 가장 직관적인 특수 상대성 이론조차도 4차원 기하학과 양의 값과 음의 값을 모두 갖는 “거리” 개념을 사용한다. 1920년에 이르면 상황이 더 심각해진다.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는 직관적으로 물리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과 하등 상관이 없어 보이는 비가환대수(non-commutative algebras)를 사용한 새로운 양자 이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의 과학자들은 확실히 철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젊은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생각을 읽고 있으면 오늘날처럼 “과학자”와 “철학자”의 경계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철학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과 보어를 비롯한 다른 위대한 과학자들은 철학적인 체계를 구축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가 그저 그들의 이론을 공표하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느라 바빠서였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과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작업은 오늘날 우리가 과학철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남겨졌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첫 번째 “과학철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모리츠 슐릭(Moritz Schlick)이어야 할 것이다. 슐릭은 베를린에서 막스 플랑크의 지도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 이후 철학을 연구했다. 1910년대에 슐릭은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이론에 관한 철학적 해석을 제시한 최초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이 되었고, 그런 작업을 통해 마부르크의 신칸트주의와 배치되는 독특한 관점을 발전시켰다. 1922년 비엔나에서 슐릭은 이전에 볼츠만과 마흐가 맡았던 자연철학 교수직을 얻었다.
슐릭은 자신의 인식론을 발전시킬 때 수학과 물리학의 최신 발견을 포섭할 수 있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슐릭은 그 자신의 수학적 지식과 더불어 파슈(Moritz Pasch)와 힐베르트와 같은 19세기 수학자들을 따라, 수학적 진술은 정의에 의해 참이며 공리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그에 따라 암묵적으로 정의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그 단어들은 공리에서의 역할로 인해 주어진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슐릭이 비엔나에서 과학철학의 뿌리를 심는 동안 젊은 학자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는 베를린, 괴팅엔, 뮌헨을 오가며 철학, 물리학, 수학의 연구를 종합하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는 카시러(Ernst Cassirer)와 철학을 연구했고, 아인슈타인, 플랑크,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와 물리학을 연구했으며, 힐베르트, 뇌터(Emmy Noether)와 함께 수학을 연구했다. 처음에는 적합한 교수직을 찾아 헤맸는데 결과적으로 라이헨바흐는 1926년 베를린에 정착한다. 라이헨바흐가 훗날 새로운 철학적 방법론을 미국의 명문 대학들로 전파할 칼 헴펠(Carl Hempel)이라는 학생을 지도하게 된 곳이 바로 베를린이었다. 헴펠의 제자들 중에는 20세기 과학철학을 주름잡은 유수의 학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아돌프 그륀바움(Adolf Grünbaum), 존 어만(John Earman), 래리 스클라(Larry Sklar)가 있다. 라이헨바흐 본인은 나중에 UCLA로 옮겨가게 되고 거기서 마찬가지로 유명한 철학자가 되는 웨슬리 새먼(Wesley Salmon)과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을 제자로 받는다.
다시 1920년대로 돌아와서, 베를린에 정착하기 전 라이헨바흐는 에를랑엔에서 열린 철학 학회에서 호재를 만났다.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이라고 하는 젊은이를 만난 것이다. 그는 라이헨바흐처럼 철학과 물리학, 그리고 수학의 교차점을 찾고자 했었다. 라이헨바흐는 카르납을 그의 친구인 슐릭에게 소개해주었고, 슐릭은 “과학적 철학”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카르납의 야망에 열정적인 관심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