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설명이 다소 단순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 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롤스는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무지의 베일을 쓰고 있어야 한다고 막연하게 주장하지는 않죠. 롤스가 말하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사회의 모든 국지적 영역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정의라기보다는, '사회의 기본 구조'에 한정되는 정의이니까요. 말하자면, 정부의 일반적 구조와 시민의 기본적 권리를 규제하는 '헌법의 핵심 사항들'에서 정의가 실현되기만 하면, 그 뒤에는 무지의 베일을 벗을 수도 있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과연 '정부의 일반적 구조와 시민의 기본적 권리'를 과연 베일을 쓴 채 눈 먼 상태에서 결정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죠. 무엇이 권리이고 무엇이 의무인지가 그 사회의 문화나 상황을 반영해야 하는 문제라면, 문화나 상황에 대해 눈을 가릴 경우 정의가 무엇인지 자체를 결정할 수 없게 되니까요. 그리고 이 점을 지적한 철학자들이 매킨타이어, 테일러, 샌델 등이고요.
선생님이 종종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하고, 네이글을 통해 잘 알려진 표현인, the view from nowhere의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롤즈는 무지의 베일이 정의의 원칙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전반적인 사실 혹은 정보는 가리지 않고, 개인과 사회에 대한 ‘특수한 앎’만을 가린다고 반문하기도 하지요.
전자에는 (a) 인간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사실 (b) 정치적 사안과 경제 이론의 원칙들 (c) 사회 조직의 근간과 인간 심리에 관한 법칙들이 포함되고, 후자에는 (d) 계급적 지위나 사회적 지위와 같은 자신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 (e) 타고난 자산과 능력의 분배 상의 운, 자신의 지능과 힘, (f) 자신이 속한 사회의 정치·경제적 상황, 시민화 정도, 이룩한 문화의 수준 (g) 자신이 어느 세대에 속하는지에 대한 정보 등이 있고요.
한편, 롤즈는 제기 가능한 비판 --무지의 베일이 거의 모든 특수한 정보를 가린다면, 원초적 입장의 의의가 도대체 뭐냐--에 대해서도 답변하기도 하지요.
롤즈는 이상의 무지의 베일 사고실험을 통해 “the restrictions must be such that the same principles are always chosen. The veil of ignorance is a key condition in meeting this requirement”라며, 쉽게 말해, 무지의 베일을 쓰면 우리가 필연적으로 어떤 정의의 원칙 a를 택한다는 점을 보이고 싶어하는데, 문제는 이렇게 되면 원초적 입장은 사실상 ‘원칙 선택’의 상황/실험이 아니라 ‘원칙 인식’ 상황/실험이 되어버리죠. 달리 말해, 어떤 사람이 그 입장에 처해도 같은 함숫값이 도출된다면 무지의 베일+원초적 입장은 단순한 절차적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 도입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결과는 우리의 이해 관심과 무관하게 주어져 있음을 논증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을 수 있죠.
실제로 롤즈는 다른 구절에서 “since the differences among the parties are unknown to them, and everyone is equally rational and similarly situated, each is convinced by the same arguments”라면서 원초적 입장에서 선택될 원칙은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 한 명을 무작위로 선발하여 그가 받아들일 원칙과 동일하다며, 합의 중재 역할을 맡는 ‘심판’과 같은 자는 “사실상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죠.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가 추구하는 질서정연한 민주주의 정치라는 것 어디서 정치적인 측면이 있냐고, 롤즈는 정치를 사법 행정의 영역으로 치환해버렸다는 비판에 부딪히게 되지요. 이게 롤즈를 비판하는 많은 입장들 중의 한 가지이기도 하고, 저도 꽤나 동의하는 입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