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적 관념론

나는 아주 젊었을 때 철학적 관념론이 철학적 유물론보다 더 매력적이고 직관적으로 더 그럴듯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의 나에게 철학적 유물론은 더 매력적이고 직관적으로 더 그럴듯한, 그러나 사실은 이데올로기인 철학적 관념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렇지만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나의 가장 중요한 비판적 개념 중 하나로 남아있기는 해도 그 비판에 대한 믿음 자체는 오래가지 못 했다. 다만 나는 '관념론'이라는 용어를 꼭 쓰고 싶은 마음은 없다. 실재는 그 자체로 물질적인 동시에 정신적이라는 이해를 표현하는 용어가 필요하다. (혹시 그것이 '범심론'인가?) 내 직관은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가 '정신'이나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덜 놀랍고 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신현상학>을 읽거나 현상적 의식에 대한 글을 읽을 때 생기는 경탄은 양자역학에 대한 유튜브 대중강연이나 대중과학서를 읽을 때 생기는 경탄보다 더 급이 높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는 뇌라는 물질적 조칙체가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한가에 대한 얘기는 정신이나 마음이 얼마나 신비하고 대단한가에 대한 얘기와 다른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방금 한 말이 오히려 유물론을 옹호하는 말로 들리는가? 그건 오해다! 그러니 이렇게 바꿔 말해보자: 물질이 기초적으로, 또는 하나의 전체적으로 언제나 이미 벌써 잠재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재적으로도 정신적이 아니라면 개체적 정신들은 어디서 나오는가? 정신이나 마음이라는 것은 실재로는 없고 실재는 운동하고 있는 물질뿐이라면, 이론이라는 정신적 구성물에 상응하는 정교한 구조를 그 운동이 갖추고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물질의 운동이 이론적, 그것도 무진장하게 이론적이라는 것은 실재가 그 자체로 이론적, 즉 정신적이라는 얘기와 다름 없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죽으면 내 정신은 사라지고 그럼으로써 현재적인 정신성을 갖춘 복잡한 개체 하나가 해체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전체로서의 실재의 정신성의 수준은 불변일 것이다. 마치 에너지가 불변인 것처럼 말이다. 다만, 아마도, 이, "이거 결국 헤겔이 한 얘기 아니냐?"는 반문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한, 그러나 아마도 헤겔의 관념론보다 더 열려 있는 것으로 그려질 수도 있을 '글로벌' 존재론적 수준의 얘기는 지구라는 상대적으로 닫힌 계로서의 자연세계와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에, 그 세계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 의존성에 입각해서 초점을 맞추는 역사적 유물론으로부터 다소간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얘기일 것이다. 내친 김에 말하자면, 나는 아주 젊었을 때부터 역사적 유물론자였다. 즉 아직도 역사적 유물론자다. 그러나 40대 동안 프로이트와 생태학과 아도르노를 접한 이래 갖게된 자연과 인간 존재에 대해 갖게된 더 농밀한 인식이 그 역사적 유물론에 통합되었다. 아마 그 역사적 유물론은 마르크스적 역사적 유물론을 다소간 초월할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어두운 생태학>을 꼼꼼히 완독함으로 대강의 윤곽을 알게된 객체지향존재론이 그 통합에 다소간의 새로운 뼈대와 살집을 추가할 가능성이 있다.

Gemini 3.1 Pro 프리뷰 버전이 한 번역을 아주 살짝만 수정했다. 이 글이 발췌된 책이 빨리 국역 출간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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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주의를 정치적 무기로 쓰기

과학은 어떻게 길을 잃었는가?

[사진]
흐릿한 자연 배경을 뒤로하고, 썩어가는 사과를 들고 있는 손의 클로즈업 사진으로, 사과에서 입자와 먼지가 흩날리고 있다.

2023년 8월 11일

베르나르도 카스트럽 | 심리 철학자, 분석적 관념론의 대표적 옹호자, 그리고 유클리드(Euclyd)의 설립자 겸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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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은 여전히 유물론―존재하는 것은 물질과 그 운동뿐이라는 견해―을 계몽주의 이후 수년간의 신중한 과학적 진보의 결과라고 여긴다. 하지만 베르나르도 카스트럽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아직 출간되지 않은 그의 책에서 단독으로 발췌한 이 글에서, 그리고 수십 년에 걸친 연구의 결과로서, 카스트럽은 유물론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하고, 그것이 왜 유용한 허구였는지, 그리고 왜 이제는 그것을 극복해야 할 때인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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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류 물리주의가 허구일 뿐 아니라, 더 이상 편리한 허구조차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계몽주의 초기에는, 태동하던 과학과 교회 사이의 긴장이 높아지던 때에 그것이 사회·정치적 목적을 분명히 수행했다. 초기 과학자들은 ‘정신(spirit)’―그리스어 ‘프쉬케(psyche)’의 번역어로, 동시에 ‘마음(mind)’을 뜻하기도 한다―의 바깥에 형이상학적 영역을 하나 확립함으로써, 1600년에 조르다노 브루노가 그랬던 것처럼 화형을 당하지 않고 연구를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랐다. 마음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 밖에 존재하는 물리적 세계라는 개념은, 당시 교회 권위자들에게는 터무니없고 무해해 보였던 탓에, 그들은 과학자들을 내버려 두었다.

사실, 계몽주의의 창시자들이 물리주의가 무엇보다 먼저 정치적 무기였다는 사실, 즉 실재의 본성을 그럴듯하게 설명해 주는 이론은 아니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윌 듀런트는 『철학 이야기(The Story of Philosophy)』(사이먼 앤 슈스터, 1991)에서, 계몽주의의 기초 문헌인 『백과전서(Encyclopédie)』의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드니 디드로가 “모든 물질은 아마 생명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며, 의식의 통일성을 물질과 운동으로 환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유물론은 교회를 상대로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무기이며, 더 나은 것이 발견될 때까지는 사용해야 한다.”(300쪽)라고 인정했음을 지적한다. 디드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분명한 인식과 솔직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날 스스로를 물리주의와 ‘과학주의(Scientism)’―과학과 형이상학을 순진하고 오류적으로 뒤섞는 태도―의 대변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대부분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해 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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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철도, 증기기관, 공작 기계 등으로 상징되는 산업혁명이 힘을 얻어 가고, 신흥 상업 계급인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적 영향력을 축적해 갔다. 그 결과, 1830년 7월 혁명 무렵이 되면 계몽주의의 시대정신은 교훈적인 예술과 철학에서, 현실적인 기술과 과학의 실용적 응용으로 옮겨가 있었다. 이 시점에서 마음과 구분되는 물리적 영역이라는 바로 그 개념은, 성직자에 대한 부르주아 지식 엘리트의 지배력이 커지는 것을 정당화해줬을 뿐 아니라,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관찰하는 현상들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 내는 데 도움이 되는 심리적 손잡이―편리한 허구―를 제공했다. 이것은 또, 과학의 결정적 초기 단계에서 경험적 실험의 객관성을 높이는 데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이 되자, 물리주의가 주로 정치적 무기였지 정말로 그럴듯한 형이상학적 가설은 아니라는, 계몽주의 초기의 분명한 인식은 사라져 버렸다. 이 과정은 찰스 테일러가 『세속 시대(A Secular Age)』(하버드 대학 출판부, 2007)에서 연대기적으로 추적해 놓았다. 그런데 이것 역시 심리적 보상이 뒤따랐는데, 사실 역사상 가장 큰 심리적 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상적 의식, 즉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물리적 배열의 단순한 부산물로 이해하는 것은, 인류가 역사를 통틀어 품어 온 가장 큰 두려움, 즉 우리가 죽음 이후에 무엇을 경험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을 단 한 번에 제거해 버렸다. 우리의 마음이 살아 있는 뇌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라면,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경험할 의식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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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기독교 신화에서는 지옥에 대한 공포로 정식화된―은, 그동안 기독교인의 삶을 짓눌러 온 모든 도덕적 책임과 함께,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우리의 모든 걱정과 후회, 불안 등은 이제,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든 말든, 믿든 말든, 죽는 순간에 끝날 것이 보장되었다.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이 해방이 얼마나 심오하게 느껴졌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미 이 해방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몇 세기 앞선 종교개혁만이, 이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유럽 대륙 전역의 거의 전 인구를 1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실상 단독으로 통제할 수 있게 해 주었던 바로 그 공포가, 갑자기 협상 테이블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물리주의가 그 후 줄곧 그토록 많은 문화적 추진력을 축적한 것은 놀랍지 않다. 비록 그것이 설명력, 개념적 절약성, 경험적 적합성, 내적 일관성, 전반적 정합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지구상의 어느 사회에서든 주류 지위를 얻은 형이상학적 가설 중 아마 최악의 것에 속함에도 말이다.

물리주의라는 허구의 역사적, 사회정치적, 심리적 편리함은 거의 과장하기 어려울 정도다. 20세기의 대부분 동안, 물리주의는 심지어 초현실적인 순환 논리의 묘기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까지 이용되었다. 주류 물리주의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자연의 유일한 이론 이전적 소여 사실인 현상적 의식―즉 경험의 존재―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근본적인 무능력이다. 실제로 현상적 의식은 인식적으로 이론에 선행한다. 모든 이론은 현상적 의식 안에서 생겨나고 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주류 물리주의는 현상적 의식을 물리 세계의 부수적 현상, 즉 뇌 과정의 단순 부산물에 불과하며, 그 자체의 인과적 힘은 없다고 ‘선언’함으로써―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이―의식을 인간 탐구의 의제에서 지워 버렸다. 즉, 자기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결함을 폭로할 수 있는 바로 그 대상을 억눌러 버린 것이다. 요약하자면, 생각은 이랬다. 이미 우리는 의식이 부수적이고 인과적 연결망에서 빠져 있다고 가정하고 있으니, 의식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아내려고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편리한가! 이런 순환성을 20세기 실증주의나 행동주의의 전개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의식이 탐구 의제에 (아주) 천천히 돌아오기까지는, 토머스 네이글이 “박쥐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인가?(What is it like to be a bat?)”라는 제목의 기념비적 논문을 발표한 1974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주류 물리주의에 대한 우리 문화의 신뢰는, 이성 및 증거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역사적인 심리사회적 현상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보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우리가 잠겨 있는 문화사의 상대적으로 느리고 미묘한 밀물과 썰물을 분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렴풋이 알 뿐인 짧은 생애의 거의 전부를, 내적 모순이 있고 경험적으로도 유지될 수 없으며 설명력을 갖출 가망이 없는 견해를 굳게 확신하는 박식한 엘리트들에 둘러싸여 보낸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주류 물리주의가 틀림없이 참일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 틀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사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에도 항상 틀렸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성과 증거는 그들이 지금도 틀렸다는 것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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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적 관념론―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형이상학적 오류들을 바로잡는 시도, 한 걸음 전진을 의미한다. 내가 곧 논증하겠지만, 분석적 관념론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 가운데 실재의 본성에 관해 가장 그럴듯하면서도 절약적인 가설을 제공한다. 당신이 이제 읽게 될 것의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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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이 주제로 열 권의 책과 한 편의 박사학위 논문을 썼으며, 학술지에 실린 여러 편의 기술적 논문, 블로그 게시글, 주요 매체에 실린 대중 과학·철학 에세이들도 발표해 왔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무엇이 새로운가? 책 제목이 시사하듯, 여기서 나는 분석적 관념론의 핵심 요지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증을, 형식성은 낮추되 직접적인 방식으로 요약해 보려 한다. 내 이전 저작들에서 나온 여러 아이디어들이 여기서 다시 등장하지만, 종종 새로운 형식으로, 다른 각도에서 제시된다. 그리고 이 모든 아이디어들을 한데 묶어서, 분석적 관념론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간결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개요를 제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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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는 수년 동안 수없이 많은 인터뷰, 질의응답, 패널, 토론, 강의, 기타 공개 행사에서 분석적 관념론을 설명하고 옹호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핵심 아이디어들을 제시하는 보다 최적의 방식을 응축해 내야 했다. 사람마다 분석적 관념론을 이해할 때 부딪히는 주요 난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의 직관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이 암묵적으로 지니고 있는 전제를 더 명확하게 다루는 설명 방식을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배워 왔다. 이런 모든 학습과 정제의 결과가 바로 이 책에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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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 면에서 보면, 나의 앞선 열 권의 책은 모두 꼼꼼하게 문헌을 인용해 가며 썼다. 두 번째 박사학위 논문과 동료 평가를 거친 학술지 논문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이제 분석적 관념론에 대해, 덜 형식적이고 문헌 인용도 줄이되, 더 유려하고 읽기 쉬운 방식으로 이야기할 자격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더 직관적이고 구어체에 가까운 언어로, 가장 핵심적인 지점들을 포착하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이루려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앞선 저작들과 달리, 여기서는 나는 의도적으로 정식 문헌 인용, 참고 문헌, 주석을 피할 것이다. 문헌을 직접 언급하는 것이 특히 생산적이거나 불가피해 보일 때에만, 이미 위에서 했던 것처럼, 본문 속에서 이름을 거론하는 식으로 처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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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분석적 관념론에 대해, 마치 내가 당신에게 직접 설명해 주는 것과 가능한 한 가까운, 구두 대화에 해당하는 내용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여기서 취하는 어조는, 기술적인 글에서 볼 수 있는 건조하고 객관적인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나 자신의 인간적인 측면과 정서 상태를 독자에게 더 많이 드러낸다. 보다 기술적이고 엄밀하게 문헌을 갖춘 논증을 선호하거나 필요로 하는 독자들에게는, 내 이전 저작들을 추천한다. 그 가운데 상당수―예컨대 학술 논문과 학위 논문―는 온라인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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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베르나르도 카스트럽의 곧 출간 예정인 책 『분석적 관념론 개설(Analytic Idealism In A Nutshell)』에서 발췌한 것으로, 이 책은 2024년에 Iff Books에서 출판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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