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국제 정세에 대해 이런 밈을 공유하는 것이 맞는지 다소 망설임도 있지만, 그래도 저는 이 밈이 꽤나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과연 특정한 철학적 사조를 옹호하는 것이 현실의 문제에 대해 곧바로 특정한 사회-정치적 행위를 취하도록 만드는지 평소에 매우 의문이 있어서요. 똑같은 '칸트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상반되는 정치적 논리를 칸트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듯이, 우리가 어떠한 철학적 사조를 지지하는지와 우리가 어떠한 사회-정치적 행위를 지지하는지 사이에는 사실 커다란 간극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점을 가장 날카롭게 지적하고 분석한 인물 중 하나가 슬라보예 지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젝의 책을 읽다가 아주 영감을 받은 단락이 있는데, 그 내용을 여기에도 올려봅니다.
하나의 이데올로기 장에서 실정적 내용들이 아무리 바뀌어도 그러한 장을 동일한 것으로 창조하고 유지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 이데올로기의 공간은 풀려 있는 요소들인 '떠도는 기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표들은 다른 요소들과 사슬을 이루면서 중층결정되어 있으며, 따라서 동일성 자체는 항상 열려있다. 다시 말해 기표들의 '문자적' 의미는 거기 부과된 어떤 은유적 의미에 달려 있다. 생태주의를 예로 들어보자. 생태주의와 다른 이데올로기적 요소들과의 관련은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국가 지향적인 생태주의자가 될 수 있으며(강력한 국가의 개입만이 파국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경우) 사회주의적인 생태주의자가 될 수도 있으며(자연의 무자비한 착취의 근원을 자본주의 체제에 두는 경우) 보수적인 생태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인간이 자신이 태어난 토양의 뿌리를 다시금 회복해야 한다는 식으로 설교하는 경우). 페미니즘도 사회주의적이 될 수 있고, 무정부주의적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인종차별주의조차도 엘리트주의가 되거나 서민주의가 될 수 있다. ‘누빔’은 총체화를 수행하며 이 과정을 통해 자유롭게 부유하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고정시키게 된다. 다시 말해 누빔을 통해 요소들은 의미의 구조화된 네트워크의 일부가 된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새물결, 2013, 149-15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