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프로이트에 아주 관심이 많다. 관심이 많은 만큼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늘 그가 마르크스 등등 만큼이나 인간에 대한 이해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상가라고 생각해 왔다. 내가 상당히 좋아하는 아도르노도 거의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 것이 그리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프로이트와 떼어놓을 수 없는 라캉의 주장들에 별 거부감이 없는 것은, 소위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을 도매금으로 처리할 때 거기에 라캉도 끼어있으면 언찮은 것은 그 생각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이론들은 과학적이지 않다라는 취지의 모든 주장들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조너선 리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대해 나와 같이 생각하는 저명한 학자들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 이름이 내 앞에 출현했다. 외우기 쉬운 이름이기도 하고 그가 철학자, 특히 고대 서구 사상에 정통한 철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매우 마음에 들어서 그 후로 늘 그의 이름이 뇌리의 한켠에 보관되어 있었다. '프'자만 접해도 그 이름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지난해 말 언젠가 브라이언 라이터 블로그를 통해 그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직 그의 글이나 책을 단 하나도 읽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며칠 전 역시 그 블로그에서 그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 링크를 발견했다. 아래는 그 인터뷰의 번역이다. 구글 '일반' 번역기가 한 초벌 번역을 원문을 대조해 다듬었다. 유튜브에서 Jonathan Lear 로 검색을 하면 같은 주제를 다룬 전화 인터뷰 클립이 나오는데,
에서 그 인터뷰의 스크립트를 읽을 수 있다. 아래 인터뷰에 앞서 이뤄진 인터뷰다. 이제 정말 그를 읽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나와는 달리 정신분석에 전문적 관심이 있는 한국 인문학도들은 제발 그의 저작을 죄다 번역하라. 솔직히, 나는 지금쯤은 그의 저작이 단 한권이라도 번역되어 있을 줄 알았다. 알라딘에서 새로 나온 책들 리스트를 확인할 때 마다 "인구 별로 많지 않은 나라치고는 벼라별 좋은 책들이 참 많이 나오네"하다가도 정작 내가 가장 읽고 싶은 책들은 극소수만 나오는 현실에 약간의 좌절을 한다. 식자라는 한국 인간들도 편향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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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애도하는 생물들이다 (조너선 리어 & 벤저민 Y. 퐁)
https://granta.com/we-are-creatures-who-mourn/
2026년 2월 12일
조너선 리어는 시카고 대학교 사회사상위원회 및 철학과에서 존 U. 네프 석좌교수로 약 30년간 재직했다. 정신분석학을 전공한 리어는 고대 서구 사상과 문학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철학자로, 명료하고 읽기 쉬운 문체로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사랑과 자연 속에서의 그것의 자리>(1999), <열린 마음: 영혼의 논리 탐구>(1998), <행복, 죽음, 그리고 남은 삶>(2000) 등의 저서에서 리어는 정신분석학과 고대 서구 사상의 연결고리를 재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두 전통을 모두 활용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최선의 방도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2025년 9월, 시카고 대학교에서 리어와 함께 일했던 벤자민 Y. 퐁은 리어와 만나 그가 정신분석을 통해 철학을 ‘구체화’하려는 노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퐁과의 대화 일주일 후, 리어는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란타와 퐁은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다음 대화는 두 차례에 걸쳐 원격으로 진행되었다.
벤자민 Y. 퐁:
정신분석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조너선 리어:
저는 운 좋게도 젊은 시절 좋은 직장을 얻었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클레어 칼리지의 펠로우이자 철학과 강사가 되었죠. 그곳에서 일하는 것이 매우 행복했고, 그 자리는 시대의 유행이 아닌 철학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할 책임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평생 철학을 연구할 것이라면, 내가 무엇을 하고 왜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사학과에 찰스 파킨이라는 동료가 있었습니다. 그는 제게 스승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헤겔을 매우 좋아했는데, 당시 케임브리지에서는 헤겔 철학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찰스와 저는 1년 동안 매주 만나 헤겔과 플라톤을 읽고 차나 커피를 마시며 토론했습니다. 그러다 헤겔의 "철학은 구체적이어야 한다"라는 구절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제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철학이 구체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고 싶었고, 그 이후로 계속 그 생각을 해왔습니다.
같은 시기에 부친이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부친의 병환과 임종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장례식에서 가족 중 한 어른이 저를 불러 심리 치료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특별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슬펐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심리 치료를 권하며 1년 동안 매주 한 번씩 받는 치료비를 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달리는 그 치료를 받을 형편이 안되었기에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습니다. 매 회기마다 훨씬 나아진 기분으로 나왔고, 그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아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어떻게 말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퐁:
정신분석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기했지만 그들의 도덕심리학의 한계 때문에 답할 수 없었던 몇개의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들을 다루는 데 있어 어떤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걸까요?
리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대한 접근 방식은 인간이 어떻게 번영할 수 있는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개인적으로 번영한다면 윤리적인 사람으로서도, 정치적인 삶에서도 번영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번영, 즉 그들이 에우다이모니아라고 부른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증진시킬 수 있는지를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기에 이 과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비이성적인 영혼과 이성적인 영혼이 어떻게 조화롭게 소통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정신, 즉 영혼은 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고, 문제는 이 두 부분 사이의 정신적 조화를 어떻게 증진시킬 것인가였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관점에 동의한다면 정신분석은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방도로는 얻을 수 없는 형태의 정신적 소통을 용이하게 해줍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그리스어 원문을 읽어보면, 그 언어가 영혼 내부의 소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어 번역에서 종종 단순화됩니다. 예를 들어, 영어 번역에서는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이 이성적인 부분에 '더 순종적'이라고 표현하지만,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더 잘 경청한다'라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물론 번역가들은 이런 미묘한 차이를 고려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요점은 순종적이라는 거잖아'라고 번역할 뿐입니다. 하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히 순종에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조화, 정신적 통합, 그리고 경청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스어의 언어는 정신 내부의 모든 수준을 경청하고 모든 수준에 말을 건네고 모든 수준과 소통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정신분석의 근본 원칙, 아니 유일한 원칙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억제하거나 검열하지 않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그 생각이 어디로 향하는지 큰 소리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로고스라고 불렀던 것을 완벽하게 보완하는 것입니다. 로고스는 때로는 언어, 담론, 이성, 합리성 등으로 번역되는데,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평소 말이나 생각을 할 때 저는 제 관점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대화를 정리하기 위해 제 마음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흥미를 끌 만하고 설득력 있을 만한 생각에 집중하려고 애쓰는 것이죠.
프로이트의 통찰 중 하나는 그렇게 하려면 많은 것들을 마음에서 지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관련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무엇이 관련 있는지는 로고스(이성적 사고)에 의해 결정됩니다. 정신분석의 기본 원칙은 '자, 앞으로 한 시간 동안은 긴장을 풀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세요. 말이 안 되거나, 관련 없어 보이거나, 민망하더라도 그냥 말하세요'입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로고스 활동, 즉 상호작용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이유를 경청하고, 자신의 신념과 입장을 결정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보완하는 것입니다.
퐁:
최근 논문 중 하나에서 로고스를 업무 주간에 비유하고 정신분석을 안식일에 비유하셨는데, 한 주를 온전히 보내려면 안식일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죠.
리어:
안식일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신이 안식일을 지키고 기억하라는 계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냥 릴렉스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릴렉싱을 존중하라는 명령인데, 사랑스러운 계명입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심을 가졌던, 그리고 그들의 윤리적 기획의 핵심이었던 종류의 심적 수준들 사이의(intra-psychic) 소통이 용이해지는 것입니다.
퐁:
하지만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듯이, 실제로 아무도 근본적인 규칙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은 중요한 경험적 발견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리어:
인간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억제당한다고 느끼고,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을 수 없고, 자신을 고치려 하고, 저항하는 것은 인간적입니다. 프로이트는 여러 가지로 비판받을 수 있지만, 그의 천재성은 실패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도라라는 환자의 분석에서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것을 단순히 실패나 은폐로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실패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근본적인 규칙이 사방에서 저항을 받더라도, 그 사태에는 여전히 배울 점이 있습니다. 와해들에서 배우고, 실패를 탐구의 원천으로 삼는 것이 가능합니다.
퐁:
[정신] 치료에 대해 그것은 반드시 진실에 도달하는 것에 대한 것은 아니며, 환자들에게 그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 즉 그들의 삶을 더욱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그 구상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리어:
그것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견해지만, 저는 그것이 상당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들은 좋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포인트나 쓸모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때로는 매우 방어적인 용도로 쓰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미묘하고 섬세하고 통찰력 있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이야기 지어내기는 바로 그 내러티브에 의해 외면되고 있는 실제 문제들을 덮어버리는 방어기제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삶에 대처할 방도를 제공할 수도 있겠죠. '이게 내 이야기야. 우리 부모님은 그랬고, 나는 이렇게 자랐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에는 생략되거나 감춰진 무언가가 있습니다.
분석의 결과는 어떤 독립적인 산물, 즉 '이제 내 이야기가 생겼어'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결과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좋은 결과란 삶을 있는 그대로, 열려 있는, 진실된 방식으로 마주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퐁:
아이러니는 치료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어떻게 기여하나요?
리어:
사람들이 정신분석을 받으러 오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어떤 패턴에 갇혀 있다고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금부터 죽음까지 내내 이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중요한 관계에서 세 번째 이별을 겪고 찾아옵니다. 첫 번째 이별은 아주 속상했을 뿐입니다, 누구나 이별을 겪으니까요. 두 번째 이별은 상대방과 깊이 얽매여 있었는데 결국 잘 되지 않아서 조금 동요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이별에 이르면 사람들은 '나와 [내] 친밀 [관계]는 영원히 이런 식일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걱정합니다. 자신의 필멸성에 대한 어떤 예감이 있게 되는 것이죠. '내 삶은 이게 전부일까?'
그 이면에는 '내가 왜 이런 삶을 살고 있지?'라는 질문뿐 아니라 '친밀함이란 무엇일까? 내가 진정한 친밀함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단순히 일련의 자조(self-help) 단계들을 따라 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친밀감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인지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혼자 중 이혼이나 외도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정말 결혼한 상태일까?'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단순히 '내 결혼 생활이 불행한가?'가 아니라 '결혼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아이러니의 일반적 구조는 '나는 결혼했지만, 결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서 틈이 벌어지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질문을 무려 들을 수 있을까요? '내 손에 돌멩이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내 손에 돌멩이가 있기는 한 것일까?'라고 묻는다면 전혀 말이 안 되죠. 질문 자체가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질문들은 아주 인간적인 질문들입니다. 우리를 인간으로 규정짓는 질문들이죠. 틈이 벌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바로 그 지점에서 정신분석이 당신이 듣고 있는 부름 소리가 어떤 종류인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 치료가 제대로 진행된다면, 마음은 자신의 작용(workings)에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통찰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통찰도 중요하지만, 그 통찰 자체가 마음이 이해하는 것을 [마음이 하고 있는 이해의 내용을] 변화시키는 직접적 효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치 마음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직접적인 힘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예전에는 이렇게 믿었는데 이제는 저렇게 믿는다는 식으로 단순히 문자 그대로 마음을 바꾸는 것만이 아닙니다. 마음의 작용(functionings)에 개입하여 당신 자신의 이해를 통해 생생한 현재 속에서 그 작용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조금 어려울 수 있으니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퐁:
문학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하는, 마치 치료적인 만남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리어:
때로는 책을 펼쳐서 내용만 훑어보기도 합니다. '수영에 대해 뭐라고 말해주는 거지?'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어떤 책, 어떤 책과의 만남은,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엄청난 충격을 줍니다. 저에게는 특정 시인, 특정 시들이 평생의 동반자가 됩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 듣는 방식을 바꿔주죠.
여름휴가 때는 대서양에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릴 적부터 해오던 대로 특정 해변을 따라 걷곤 합니다. 그 해변들을 따라가다 보면 물개들이 많이 보입니다. 저는 물개를 좋아하고, 물개들도 저를 좋아합니다. 제가 해변을 따라 걸으면 물개들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서로를 바라봅니다. 우리는 종간 소통을 위해 각자 최선을 다하지만,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개들이 3~4마일(약 4.8~6.4km)을 걷는 동안 저를 따라온 적도 있습니다. 그들은 저를 계속 주시하고 있습니다.
몇 주 전, 친구가 제가 전에 읽어보지 못했던 시 한 편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엘리자베스 비숍의 '집어소에서(At the Fishhouses)'라는 시였습니다. 정말 멋진 시였습니다. 그 시에는 그녀가 얼음물개와 만난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그 시를 읽고 나서 물개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 시를 읽고 나서 평소처럼 물개들을 만나러 나갔을 때, 저는 물개들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들었습니다. 그것이 한 편의 시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 저, 그 시, 그리고 그 물개들은 – 우리는 이제 막 시작된 것입니다. 단순히 제가 그 시가 좋아서, 혹은 그 시가 제게 즐거움을 줘서, 혹은 시인이 정말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그 시가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제가 물개를 보고 듣는 방식을 바꿔놓았죠. 제 마음에 깊이 스며들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이 제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퐁:
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없애려고 했던 '충동'이라는 개념을 옹호해 오셨습니다. 왜 이 개념이 인간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가요?
리어:
프로이트가 충동 이론을 제시하려고 했을 때, 그는 인간 삶에서 리얼한 무언가의 맥박을 짚어냈습니다. 인간의 삶에는 압박받는, 혹은 압박받는 것으로 경험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것들이 마음에 떠오르는데, 우리는 그것들에 관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마음에 계속 떠오릅니다. 이 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 밖의 무언가에 관해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데, 멈출 수가 없죠.
그렇다면 그 압박은 뭘까요? 이런 저런 것들이 강요되고 있다고 느끼는, 운명지어져 있다고 느끼는, 어떻게 해도 내 루틴을 깰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끼는 그 경험은 대체 뭘까요? 나는 그것을 이렇게 해야만 한다. 나는 그것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 한다. 충동 이론은 바로 이런 현상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퐁:
사랑의 경우에서 처럼 좋은 의미에서의 충동에 의해 압박받는 느낌에 대한 이해와, 충동에서 벗어나고 싶은 느낌에 대한 더 일반적인 이해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정신분석을 받으러 오는 많은 사람들은 초월하고 싶은 특정한 강박들, 특정한 제약들 혹은 이런 저런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압박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리어:
문제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 문제들이 창의성의 원천이 될 수 있을까?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을까? 타인들과 풍요롭고 친밀한 방식으로 함께 있기의 원천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항상 방해가 되고, 우리를 항상 감금할까? – 이런 질문들을 던져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 그것들은 우리를 끔찍한 반복 속에 가두어 매우 불행하게 만들고 타인들이나 자신들과 잘 어울려 살 수 없게 만듭니다. 하지만 스펙트럼의 다른 쪽 끝에서, 그것들은 우리에게 '이것이 내 유산이야. 나는 그것에 여러 방식으로 대처할 자유가 있어, 그리고 나는 그것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어'라고 말하도록 도와줍니다.
퐁:
분석 과정에서 그러한 압박이 나타나는 방식 중 하나가 전이입니다. 전이란 환자가 과거의 감정 구조(emotional structures)를 무의식적으로 분석가에게 투영하는 현상인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과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전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리어:
전이는 모든 인간에게서 항상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분석 상황에서는 전이가 특정한 방식으로 유용하게 활용됩니다. 전이가 의식화됨으로써 훨씬 더 효과적이고 지향적으로 변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누군가의 인형을 불태우는 것으로 그 누군가를 불태울 수는 없다(you can’t burn somebody in effigy)"라는 말을 했습니다. 대략적인 요점은, 전이가 적절한 방식으로 집중되는 상황에서 분석에 활용된다면, 전이는 자신의 작용에 대한 마음의 이해를 통해 마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정신분석을 장인의 솜씨(master craft)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훌륭한 피아니스트도 평생 바흐 협주곡 연주 실력을 갈고닦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전이 현상을 잘 활용하는 기법이 정신분석 실천의 핵심입니다.
퐁:
그러니까 원치 않는 압박으로 시작된 것이 성장의 계기가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리어:
네. 이것이 정신분석이 단순히 '올바른 이야기'를 갖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닌 이유 중 하나입니다. 방어기제, 심지어 이야기를 방어적으로 사용하는 것까지도 다뤄야 합니다. 개발해야 할 것은 타인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생생한 이해를 바탕으로, 바로 그 이해를 통해 직접적이고 인과적이며 효과적인 방식으로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은 제대로 작동할 때 바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퐁:
최근 저서 <종말을 상상하며>(2022)에서 당신은 참석했던 기후 변화 강연에 대한 일화로 책을 시작하셨죠. 질의응답 시간에 한 젊은 학자가 일어나서 "아무도 우리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청중들은 웃었지만, 당신은 웃지 않은 것 같군요. 왜 안 웃으셨죠?
리어: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사람들이 왜 웃는지, 왜 이런 말을 재밌어하는지 알아보는 것은 항상 흥미로운 일입니다. 비자발적인 것과 자발적인 것 사이에는 묘한 관계가 있습니다. 누군가 농담을 하면 웃고, 재밌다고 느끼는데, 그 반응은 대부분 반응자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웃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니까요. 웃음은 자연스럽고 자동적인 반응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당혹스러울 수도 있죠. 사람들이 어떤 말에 웃음으로 반응할 때, 그들은 그들에게 완전히 달려있지는 않은 자신의 일면(something about themselves)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인류가 지구에서 사라질 거고, 아무도 우리를 그리워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는데, 모두가 그 말을 재밌어하네요. 충분히 탐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 농담이 효과를 발휘하는 방식 중 하나는 '아무도 우리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여러 겹의 의미가 담겨 있죠. 하나는, 만약 인류가 멸종하고 바퀴벌레만 살아남는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그리워할 생명체가 세상에 없을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잘 가라!'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연은 우리 없이도 아름답게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우리는 그 일부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그리워할 가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마땅한 처벌이라는 의미가 살짝 들어 있는 것이죠.
퐁:
당신은 이 농담을 죽음과의 대면으로 여기는 것 같은데, 그것에서 당신이 흥미롭게 생각하는 부분은 그것이 애도를 회피하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리어:
저는 사람들이 애도가 우리가 하는 중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임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우리는 애도하는 생물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관념들, 예술 작품들, 온갖 것들에 애착을 형성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취약해집니다: 이 사람들이나 것들이 사라지거나 죽을 때, 우리는 그들/그것들을 애도합니다. 우리의 상상력은 상실에 대한, 우리가 잃은 것에 대한,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에 대한, 그리고 그것이 미래에 우리에게 의미할 것에 대한 활발한 생각이 됩니다.
프로이트는 20세기 초에 '애도와 멜랑콜리아'라는 에세이를 썼습니다. 그는 자신이 애도와 멜랑콜리아라는 두 가지 흥미로운 심리학 범주들 사이에서 감별 진단을 제공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를 독해하는 방식은, 그의 주장을 넘어서서, 애도는 단순히 심리학적 감별 진단 범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반응으로 인간의 한 실존적 범주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애도하는가, 아니면 멜랑콜리아인가? 여기서 멜랑콜리아는 단순히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우울증이 아닙니다. 그것은 애도하기 거부입니다. 제 생각에 애도는 단순히 여러 심리적 과정 중 하나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윤리적 범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바로 그 본성상 그리고 우리의 바로 그 삶 속에서 상실을 다뤄야 하는 유한하고 의존적인 존재들입니다.
퐁:
지금 감사에 관한 책을 집필 중이시죠. 애도에 대한 생각에 감사가 어떻게 녹아들어 있나요?
리어:
멜라니 클라인은 말년에 '시기와 감사'라는 고전적인 논문을 썼습니다. 클라인은 시기와 감사를 인간의 고통과 번영이라는 축의 양극단에 놓았습니다. 왜 그런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평생 임상 작업을 통해 얻은 그녀의 직관이었죠.
저는 감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것을 단순히 좋은(nice) 것 중 하나가 아니라 인간에게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감사'라는 단어는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단일한 것이 아니죠. 하지만 그 의미 중에서도 제가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의미인데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사를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을 위해 주어진 선물, 호의, 또는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그것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상호성과 교환, 서비스용 재화들과 상품들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동시대 문화에서 그것은 [감사는] 매우 중요합니다. 교육은 하나의 상품입니다. 우리는 교육을 구매하고 전문가의 서비스를 받습니다. 분석가에게 비용을 지불하면 분석 결과를 얻습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깜짝 생일 파티를 열어주면, 당신은 제가 당신을 피크닉에 초대하거나 박물관 개관식에 초대할 거라고 기대합니다. 그렇게 교환이 계속됩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인류학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전달합니다: 우리는 이 대단히 관대한 행위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들은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사회적 교환이다. 그것 모두 매우 매혹적인 연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상대를 위한, 아무런 대가도 기대하지 않는, 진정으로 아무런 조건 없는(genuinely no strings attached)' 사회적 상호작용은 가능하지 않다는 고정관념을 낳았습니다.
퐁:
당신은 프로이트의 '애도와 멜랑콜리아'를 클라인의 '시기와 감사'를 연결짓는 것 같습니다. 감사를 위해서는 애도가 필수적인가요? 그리고 멜랑콜리아와 시기 사이에는 어떤 본질적인 연관성이 있을까요?
리어:
모든 멜랑콜리아가 시기는 아니지만, 제 생각에 당신은 절대적으로 맞는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본질적으로 기억하기(remembering)의 한 형태입니다. 그것이 당신의 감사의 대상입니다. 과거에 누군가가 나를 도왔을 때, 감사는 '이 사람이 나를 도왔다' 또는 '이 행위가 나를 도왔다'라는 기억(memory) 속에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미래지향적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거기에 있습니다. 감사하면서 과거를 되돌아보기도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면서 그것을 채택하기도 하고(take it up) 미래로 자신을 투사하기도 합니다: 내가 수혜자인 지금,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사람에게 보답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그밖의 무언가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다른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시기를 멜랑콜리아와 동일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시기는 매우 특별하고 특이한 경우입니다. 감사와 마찬가지로 '시기'라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시기'라는 단어가 인간 삶의 부정적인 면으로 이어지는,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방식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애도와 멜랑콜리아, 감사와 시기라는 단어군(family)은 매우 기본적인 존재론적 선택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감정적 또는 심리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선택입니다. 그것이 제 다음 책이자 마지막 책이 될 것입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진: 하마야 히로시, 도쿄, 1959년, 매그넘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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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
프로이트가 "you can’t burn somebody in effigy"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프로이트는 어떤 의도로 그 말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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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실제로 사용한 정확한 표현은 **"부재중이거나 상징적인 인형(effigie)을 상대로는 누구도 죽일 수 없다(It is impossible to destroy anyone in absentia or in effigie)"**입니다. 흔히 "화형식(burn in effigy)"이라는 영어 관용구 때문에 "태울 수 없다"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원문에서는 "제거하다" 또는 "쳐죽이다(erschlagen)"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1912년 논문 **《전이의 역동(The Dynamics of Transference)》**에 등장하며, 프로이트가 **'전이(Transference)'**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 의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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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갈등은 '현실'에서 다뤄져야 한다
프로이트는 환자의 신경증(neurosis)을 치료하려면, 환자가 과거에 겪었던 갈등을 단순히 회상하거나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습니다. 환자의 무의식적 충동(사랑, 증오, 경쟁심 등)이 분석가와의 관계에서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감정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나야만 비로소 그 충동을 다루고 해소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상징적인 대상은 효과가 없다
"허수아비(effigy)를 태우거나 목매단다"고 해서 실제 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분석실 밖의 과거 인물(부재중인 아버지나 어머니 등)을 탓하거나, 감정이 실리지 않은 상징적인 대화만으로는 무의식의 콤플렉스를 파괴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전이'의 필요성
따라서 분석가는 환자에게 있어 과거의 인물을 대체하는 생생한 대상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환자가 분석가에게 직접 화를 내거나 애정을 갈구하는 등 갈등을 현재의 관계 속에서 재연(re-enactment)하게 함으로써, 비로소 그 갈등을 직면하고 해결(working through)할 수 있다는 치료적 원칙을 설명한 문장입니다.
요약하자면, **"마음의 병을 고치려면 과거의 유령이나 상징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의 대상(분석가)과 부딪쳐 싸워 이겨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출처:
Freud, S. (1912). The Dynamics of Transference (Zur Dynamik der Übertragung).
원문: "Denn schließlich kann niemand in absentia oder in effigie erschlagen werden." (결국 누구도 부재중이거나 상징적인 형상 상태로는 처단될 수 없기 때문이다.)
Gemini 3 Pro을(를) 사용해 준비했습니다
부록 2
조너선 리어가 언급한 엘리자베스 비숍의 시
"정신분석학과 고대 서구 사상의 연결고리를 재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두 전통을 모두 활용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최선의 방도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는 평가를 받는 걸출한 철학자 조너선 리어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를 번역하다가 엘리자베스 비숍이라는 낯설지 않은 이름의 미국 시인을 알게 되었다. 그가 자신을 변화시킨 시로 비숍의 '집어소에서'라는 시를 언급했던 것이다. 헌데, 낯설지 않았다는 것은 착각이었다. 김수영이 '거대한 뿌리'에서 언급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과 헷갈렸던 것이다. 리어가 좋아한 시면 나도 좋아할 가능성이 100%여서 얼른 문제의 시를 찾아내 딥시크와 제미나이한테 번역을 부탁했다. 딥시크는 군말 없이 번역을 해줬는데, 제미나이는 저작권을 존중해야 한다며 부분 번역과 번역 가이드 라인만 제공한다. 혹시나 해서 구글 '일반' 번역기한테 부탁했더니 다 번역해 준다. 두 번역을 원문과 대질시켜 적절히 절충하고 수정했다. 비숍에 대한 한글 검색은 그 다음에나 했는데, 영문학자들의 논문이 네 다섯 편 있고 그 중 둘은 공짜 다운도 가능하다. 나무위키 항목도 있다. 비숍의 가장 유명한 시가 번역되어 있는 웹페이지도 있다. 하지만 가장 반가운 것은 비숍의 시가 다, 그것도 아주 공들여 국역되어 있다는 기사였다. 기사가 거짓말 한 것이 아니면 '집어소에서'도 수록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내륙으로 질주한다'
“100여 년 전 쓰여진 비숍의 시, 2025년 한국 독자가 불러냈다”
'집어소'에서를 읽은 소감은 역시나였다. 내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의, 전혀 억지스럽지 않게 '지적인', 그래서 깊은 울림을 주는 시다. 읽어들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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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poetryfoundation.org/poems/52192/at-the-fishhouses
집어소에서 (엘리자베스 비숍)
쌀쌀한 저녁이지만,
집어소 건물 중 한 곳 아래에서
노인이 그물을 엮으며 앉아 있다,
그의 그물은, 으스름 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고,
짙은 자줏빛 갈색이며,
그의 북은 닳고 윤이 난다.
공기는 대구 냄새가 너무 세
콧물이 나고 눈물이 핑 돈다.
다섯 채의 집어소는 지붕 꼭대기가 가파르고
좁은 미끄럼방지 건널 판자가 비스듬히 올라가
박공에 있는 저장실들로 이어져
손수레가 오르내릴 수 있게 되어 있다.
모든 것이 은빛이다: 바다의 무거운 표면은,
넘칠 듯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며,
불투명하지만, 의자들, 가재잡이 통발들, 그리고 돛대들의 은빛은,
거칠고 들쭉날쭉한 바위들 사이에 흩어져
뚜렷이 반투명해 보인다,
해안 쪽 벽에 에메랄드빛 이끼가 자라는
작고 오래된 건물들처럼.
커다란 생선통들 안은 아름다운 청어 비늘로
겹겹이 채워져 있고
손수레들도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무지갯빛 사슬 갑옷들로 덮였고,
그 위를 작은 무지갯빛 파리들이 기어다닌다.
집어소 뒤편의 작은 비탈 위,
듬성듬성 밝게 빛나는 풀밭에
오래된 나무 닻줄 감개가 놓여 있다.
갈라지고, 두 개의 긴 빛바랜 손잡이가 달려 있고,
쇠붙이가 녹슨 부위에는
마른 핏자국 같은, 서글픈 얼룩들이 있다.
노인은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를 받아든다.
그는 내 할아버지의 친구였다.
그가 청어 잡이 배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인구 감소와
대구와 청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조끼와 엄지손가락에는 반짝이 조각들이 묻었다.
그는 날이 거의 닳아 없어져 가는
낡은 검은 칼로, 수없이 많은 물고기로부터 비늘을,
가장 아름다운 부위를 긁어냈다.
물가 아래, 배들을 끌어올리는 곳,
물속으로 길게 뻗어 내려가는 긴 경사로 위에,
가는 은빛 나무 둥치들이 수평으로
회색 돌들을 가로질러, 아래로 아래로
4, 5피트 간격으로 놓여있다.
차갑고 어둡고 깊고 더할 나위 없이 맑은,
어떤 필멸자도, 물고기와 물개도
견딜 수 없는 요소...
특히 한 마리 물개를
저녁마다 여기서 보았다.
그는 나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그는 음악에 관심이 있었다;
나처럼 완전 침례를 믿었기에,
나는 그에게 침례교 찬송가를 불러주곤 했다.
"내 주는 강한 성이로다"라는 노래도 불렀다.
그는 물속에 서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그러고는 사라졌다가, 갑자기 다시 나타나곤 했다
거의 같은 자리에, 마치 자신의 더 나은 판단에 반해서 인 듯
어깨를 으쓱하며.
차갑고 어둡고 깊고 더할 나위 없이 맑은,
그 맑은 회색빛 얼음 물... 뒤편, 우리 뒤로,
위엄 있는 키 큰 전나무들이 시작된다.
푸르스름하게, 자신들의 그림자들과 어우러져,
수많은 크리스마스트리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서 있다. 물은
둥근 회색과 청회색 돌들 위에 걸려 있는 듯하다.
나는 그 모습을 몇 번이고 보아왔다, 똑같은 바다, 똑같은,
돌들 위에서 느릿하고, 무심하게 출렁이는,
돌들 위에서 얼음같이 자유로운,
돌들 위에서, 그 다음에는 세상 위에서.
손을 담근다면,
손목은 즉시 욱신거릴 것이고,
뼈는 쑤시기 시작하고 손은 타는 듯할 것이다
그 물이 돌을 먹고 살고
어두운 회색 불꽃으로 타오르는 불의 변형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맛본다면, 처음엔 쓴맛이 나고,
그다음에는 짠맛이 나다가, 그다음에는 분명히 혀를 태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식이 그렇다고 상상하는 것과 같다:
어둡고, 짜고, 맑고, 움직이고, 완전히 자유롭고,
세상의 차갑고 단단한 입에서 끌어내려지고
바위로 된 젖가슴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영원하고, 흐르고 끌어내려지며, 그리고
우리의 지식은 역사적이므로, 흐르고, 흘러가버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