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과 삶의 의미

  • 본 글은 필로소픽에서 출간된 하영미의 <비트겐슈타인과 삶의 의미>를 요약한 글이다.
  • 비트겐슈타인의 발췌록은 모두 이영철 역본 기준.
  1. 전기 비트겐슈타인과 삶의 의미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언어가 허용하는 것과 허용하지 않는 것을 밝혀, 언어의 범위를 경계 짓고자 한다.

“이 책은 그러므로 생각에 한계를 그으려 한다. 또는 차라리, 생각이 아니라 사고의 표현에 한계를 그으려 한다. (…) 그러므로 한계는 오직 언어에서만 그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한계 건너편에 놓여 있는 것은 단순한 무의미가 될 것이다.” (<논고> ‘머리말’ 16쪽)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세계가 ‘사과’, ‘바구니’ 같은 ‘대상’, 즉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하지만, 세계는 실은 그러한 대상(사물)들의 논리적 배열인 ‘사태’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런 사태들 중 ‘참’인 사태들 만이 존립하는 사태들이고, 존립하는 사태들 만이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 앞에 사과가 바구니 안에 있다면, ‘사과가 바구니 안에 있다’는 사태는 사실일 것이다. 반면 ‘사과가 하늘로 올라간다.’ ‘사과가 새처럼 날아간다’ 같이 대상이 되는 사물들의 본성을 거스르는, 참이라고 볼 수 없는 사태는 존립하지 않는 사태이다.

존립하지 않는 사태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대상이 사태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든 배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상이 배열될 수 있는 방식은 정해져 있고, 이 방식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의 ‘형식’과 공유되며, 이 형식은 현실 세계와 아무리 다른 세계를 상상한다 하더라도 유지된다. 이러한 형식은 대상들이 사태 속에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들이기도 하며, 이런 가능성은 대상의 본성 속에 ‘속성’으로서 존재한다.

대상은 ‘외적 속성’과 ‘내적 속성’을 가진다. ‘외적 속성’은 한 대상이 다른 대상과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사태를 이루는지에 의존하며 고정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의자는 책상 아래에 있거나, 침대 위에 있는 등 다른 대상들과 여러가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반면 ‘내적 속성’은 공간, 시간, 색깔(채색성) 등 대상들의 고유한 본성이다. 내적 속성을 알아야만 대상들이 사태들 속에서 어떻게 나타날지 가능성을 알게 된다.

이러한 ‘속성’들에 따라 사태 속에서 대상들이 연관되고 배열된다. 이러한 사태, 그리고 사태로 이루어진 세계의 형식은 곧 ‘논리’이다. 논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사태가 되지 못하며, 사태가 아닌 것은 세계 내에 자리가 없어 세계를 구성하지 못한다. 세계는 논리적 공간 속 사실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을 표현해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언어’이다.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선 언어는 먼저 사실을 모사해야 하며, 언어는 이를 위해 사실들의 형식인 논리를 모사하는 ‘모사형식’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사고’는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며, 사고는 (언어로 이루어진) 명제로 표현된다. 어떤 사태가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태에 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논리를 벗어나, 비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즉 논리와 모순되는 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를 이루는 사실들을 모사하는 언어는 세계의 논리를 투영하고 있고, 그러한 언어는 우리 사고를 가능케 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비논리적인 것을 묘사하는 것은 마치 기하학에서 공간 법칙과 모순되는 도형을 좌표로 묘사할 수 있다거나 존재하지 않는 점의 좌표를 제시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여기서 그 유명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구분이 제시된다. 철학의 물음과 명제들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어의 문법(=논리)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자연과학적 명제들은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적 명제들에 대응되는 대상이 세계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참된 명제들의 총체는 전체 자연과학(또는 자연과학들의 총체)이다.” 반면 철학, 윤리, 종교, 미학의 명제들은 세계 내에 대응되는 대상이 없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명제를 가능하게 해주는 논리적 형식 역시 세계 내에 존재하지 않는, 말할 수 없는 대상이다. 명제의 논리적 형식을 묘사하기 위해선 명제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명제(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것을 명제로 묘사하기란 불가능 하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언어, 논리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언어, 논리로 포착하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왜곡이 야기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 무의미가 발생할 뿐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 있는 것 아니냐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반문은 잘못된 것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달이 아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이런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말할 수 있는 것의 배경이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두 종류의 주체를 언급하는데, 전통적인 철학의 ‘사유하고 표상하는 주체’는 세계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야와 눈의 관계처럼, 시야가 존재하기에 눈이 있음은 분명하지만 시야 속에서 눈을 발견할 수는 없다. 반면 세계 내의 대상에 가치를 부여하는 ‘의지하는 주체’는 우리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나타내며, 세계의 전제조건으로 존재한다. 세계 내 사실들은 그 자체로는 어떤 가치도 가지지 않지만, 의지하는 주체인 우리는 세계 내 사실들에게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이 우리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가 된다. 동시에 이러한 가치 역시 세계 밖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 우정, 미학적 체험, 종교적 체험 등의 가치 있는 것들 – 우리가 가치를 부여한 것들 – 은 단순히 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삶의 의미 또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오로지 사실의 문제만들 다루는 과학은 사실을 넘어서는 삶의 의미에 대해 답할 수 없다. “설령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렇다면 과연 아무런 물음도 더는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 (<논고>6.52)”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의미를 세계, 신에 등치 시킨다. “세계와 삶은 하나다. 세계의 뜻은 세계 밖에 놓여 있지 않으면 안된다.”, “삶의 의미, 다시 말해 세계의 의미를 우리는 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삶의 의미가 신이라는 것은 단순히 종교를 가지고 신을 믿으면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과 삶의 목적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세계의 존재로부터 신과 삶의 목적을 알 수 있다. 이는 세계가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것’인 신과 삶의 목적(의미)가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가 존재하므로 우리가 ‘세계에 사는 것’ 만으로 삶의 의미는 드러난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의 생존만이 삶의 의미를 뜻한다는 말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행복한 사람은 존재의 목적을 성취하고 있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에 동의한다. 행복한 사람은 사는 것 자체에 만족하는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으며, 이것 자체로 삶의 목적을 완성한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

행복한 자는 영원 속에 살아간다. 영원 속에 산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지금 뿐임을 알고,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롯이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행복한 자는 세계의 밖에서 세계 내 사건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무시간적 현재’를 살아가며 세계를 조화로운 곳으로 인식한다. 이는 세계 내 사건들을 경험하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경험하더라도 거기에 동요되지 않음을 뜻한다. 또한 행복한 자는 소망하지 않는다. 소망을 가지고 거기에 맞게 계획을 세우며 통제할 수 없는 세상만사를 통제하려 들지 않는 다는 뜻이다. 소망하는 자는 ‘결과’를 중요시해 자신의 기대에 따른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좌절하지만, 행복한 자는 우리의 의지의 결과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 있음을 알며 결과보단 의지에 따른 행동 자체를 중요시하며 결과에 마음을 휘둘리지 않는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행복한 사람에게 소망은 없지만 의지는 있다’ 말한다.

요약하자면,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의미를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며, 주체의 의지가 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따라 세계를 어떻게 보는 가에 따라 우리는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또는 의미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으로, 이들은 과거나 미래에 붙잡혀 있지 않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며, 단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재의 일에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1. <논고>로 철학의 문제들을 해결했다 여긴 비트겐슈타인은 더 이상 철학을 할 이유가 없어 초등학교 교사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돌연 철학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생각한 그는 1929년 케임브리지로 귀환하며, 이 시점을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이 구분된다. 1929년 말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의 ‘이교도 협회’에서 그의 생애 유일한 대중 강연을 한다. 강연의 주제는 ‘윤리학’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었던 G.E.무어에 따르면 윤리학이란 ‘좋은 것에 대한 일반적인 탐구이다. 앞서 살펴봤듯,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윤리, 가장 좋은 것은 삶의 의미로, 비트겐슈타인의 윤리학은 삶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가치에는 상대적 가치와 절대적 가치가 있다. 상대적 가치는 한 대상을 다른 대상과 비교하며, 더 나은, 더 좋은 대상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는 사실들의 단순한 나열에 지나지 않으며, 가치 판단의 형태를 띠지 않는 사실적 진술들로 대체될 수 있다. 반면 절대적 가치는 사실적 진술들로 대체될 수 없다. 절대적 가치는 ‘절대적 좋음’과 ‘올바름’을 따지며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사실의 차원에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에 속하지도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탁월한 경험’을 할 때 절대적 가치를 표현한다. ‘세계의 존재에 감탄하는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절대적으로 안전하다 느끼는 경우’,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 등이 탁월한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셋 모두 세계 내 사실들이 아니며, 전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를 오용하는 무의미한 표현들이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 탁월한 경험들을 언어를 통해 말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포착한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가 세계를 ‘기적적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과학적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면 세계는 과학을 통해 해명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기적적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그 자체로 기적이고 경탄의 대상이다. 기적적 관점으로 세계를 보는 자에게는 평범한 일상과 그 속에서 스쳐가는 풍경들 하나하나가 경이롭고 놀라운 대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반면 대상을 과학적으로 보려는 태도는 이런 기적을 제거하려 하며 과학적 관점만이 유일하게 옳은 관점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다른 관점을 성립시킬 수 없는 과학적 관점은 정작 그런 관점을 가진 과학자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기 때문에 위대하다 할 수 없다. 과학의 결과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해줄 지 언정, 삶의 의미 같은 정말 중요한 문제들은 해결하지 못한다.

예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적적 관점을 가지게 한다. 위대한 예술작품은 사람의 정신을 깨워 모든 것이 놀랍고 경이롭게 보이도록 만든다. 마찬가지로 종교 역시 사람들에게 기적적 관점을 제공한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종교적 언어는 무의미한 것이고 논리만이 문법이었지만,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종교를 비롯한 다양한 문법(언어게임)들이 존재하며, 우리가 서로 다른 문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언어가 오용된다 주장한다. 여기서 문법은 서로 다른 언어 간의 문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종류의 문법은 ‘표층 문법’에 불과하며, ‘심층 문법’, 그 중 경험적 사실과 관련 없는 ‘문법적 명제’는 문법들 속에서 ‘개념의 용법’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신은 존재한다’, ‘최후의 심판을 믿는다’라는 명제들은 종교인의 언어게임과 비 종교언어게임에서 다르게 쓰인다. 종교인에게 두 명제는 반대 상황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고, 종교인은 두 명제를 찬성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보인다. 반면 비종교인은 결코 종교인이 믿는 의미에서 두 명제를 말할 수는 없다. 비종교인은 종교적 언어의 문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언어놀이가 삶의 형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삶의 형식에서 차이가 나면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게 된다.

나아가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이 본성상 ‘종교적’이라고 주장한다. <황금가지>의 저자 프레이저는 원시 종교에서 보이는 주술적 행위가 세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보며, 세계에 대한 이해가 발전하면 이런 주술행위는 사라진다 주장했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에 입을 맞추거나, 화가 났을 때 땅을 치고, 경기장에서 선수를 응원하는 등, 우리의 행동이 대상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이 대상에게 닿을 것이라 믿으며 그런 ‘종교적인’ 행동들을 한다. 그리고 이런 종교적 행동들은 특별한 원인이 있어서 가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우리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성이 종교적인 인간들이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선 종교를 믿어야 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실제로 그는 종교인이 되려는 지인들을 만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적 삶’을 살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비트겐슈타인의 종교관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흔히 사람들은 성경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책으로 이해하고, 성경이 역사와 일치하지 않음을 들어 성경이 허위라 비판하곤 한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믿는 바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판명 나더라도, 그 때문에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는 않는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 대한다면, 다른 역사적 사실들을 대하는 태도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대해야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러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는 성경이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기록한 ‘역사적 소식’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인간 영혼에 무엇이 일어났으며 또 일어날 것인지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 내 말은, 이론이 아니라 –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실제 사건에 대한 하나의 기술이다. 왜냐하면 ‘죄의 인식’은 실제 일어나는 사건이며, 절망도 그렇고, 또 믿음을 통한 구원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것들에 관해서 말하는 사람들(예컨대 버니언)은 단순히,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을 기술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것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싶어하던 간에 말이다.” (<문화와 가치> 77-78)

성경은 죄의 인식, 절망, 믿음을 통한 구원 등 인간의 삶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기술한 것으로, 이런 사건이 다른 이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진리라면, 그것은 일견 그로써 진술되었다고 보이는 그런 진리가 아니다. 하나의 이론이라기 보다, 그것은 오히려 한숨 또는 절규이다. (<문화와 가치>82쪽)” 즉 성경은 연약한 인간의 삶으로부터 기인하는 절망과 고통속에 놓인 개인이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사투하는 과정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예컨대 사四 복음서의 내용들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 때로는 모순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복음서들이 역사적 진리가 아닌, 그들에게 실제 일어난 사건(역사적 소식)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본래 믿음이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으로, 우리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 믿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부여잡는다. 따라서 신의 존재는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 속에서 신의 존재를 경험하는 것은 철저히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종교적 믿음을 갖는 것은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 행동 지침과 좌표를 제공한다. 믿음을 가진 자는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참회하는 자의 삶에서 참회가 드러나야만 진정으로 참회를 했다고 말할 수 있듯이 말이다. 종교인은 단순히 신에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고난을 적극적으로 마주하고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동시에 성경의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 의례나 제의에만 치중해, 가르침보다 의례와 제의등의 혁식을 우선하는 본말전도를 경계해야 한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의미가 세계로부터 독립된, 세계 내 사건에 영향을 받지 않는 초연한 자의 삶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적 삶을 통해 삶의 의미가 현실세계 속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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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던거 이상으로 실존적인 종교철학자의 면모가 있군요. 흥미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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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 읽었습니다. 그나저나 저자명이 익숙해서 찾아보니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철학에 대한 책을 쓰시거나 번역하셨던 분이셨네요. 혹시 그 책들도 읽어보셨을까요? 구매를 망설이다가 까먹고 지냈네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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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못봤습니다...이 책을 보고 저도 작가의 다른 책들이 궁금해지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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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어본 적은 있는데,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철학에 대한 평이한 해설서였습니다. 독창적인 주장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전반에 대한 간략한 소개부터, 거기서 그의 종교철학이 어떻게 제시되는지를 전반적으로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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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친절히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여러 종교적 요소를 훑는 용도로 쓰기 좋아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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