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식의 응수가 반출생주의를 얼마나 강하게 반박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위트(?)는 있어보이는 반박 같네요. 가끔 제 친구도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거라며 농담조로 말하던데, 다음에 한 번 "그렇게 행운인 사람 몇이나되나?" 저 말을 써먹어볼까 합니다ㅎㅎ
농담조의 답변은, 그렇게 행운인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 행운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뿐이죠!
아마 그래서 자기가 행운아라고 말하는 건 고사하고 행운의 잣대에서 벗어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ㅋㅋㅋ
- 두 상태를 합리적으로 비교하기 위해서는 두 상태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 필요하다
- 비존재 상태를 경험하고 이를 지식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 따라서 비존재가 존재보다 낫다고 믿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이 논증은 어떤가요?
저는 좋은 논증 같습니다. 게다가, 애초에 '비교'라는 것이 많은 경우 주관적 가치 판단에 의존하고 있는데, 특정한 상태가 다른 상태보다 반드시 더 낫다고 할 만한 근거가 그렇게 강력한지도 의문스럽다고 생각해요.
@aaaa 저도 반출생주의를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아서 3번 결론에 대하여 동의하지만, "두 상태를 합리적으로 비교하기 위해서는 두 상태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전제는 잘 모르겠네요. 경험하지 못한 일에 대한 예측이 합리적이라 간주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예를 들어 외국 생물이 한국 생태계에 해로운지 아닌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어도 생태계 보호에 중점을 두고 국내 반입을 금지하는 경우요. "A라는 생물이 한국 자연 생태계에 무해하다는 증거를 모르니 A는 해롭다"는 무지에 호소하는 오류지만 "A라는 동물이 한국 자연 생태계에 해로울 경우, 감당해야 할 피해가 훨씬 크다"로 우회하는 것은 합리적일 수 있지 않나요? 태어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 생각해요.
그런 식이라면 여성에게 참정권을 준 적 없는 사회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사회가 더 낫다라고 주장할 수도 없는 거잖아요. 이재명이 당선되기 전에는 이재명이 대통령인 사회가 윤석열이 그런 것보다 낫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요.
@SimpleLog 님과 @Philadelphia 님의 지적도 분명히 일리가 있지만, 저는 '삶'이라는 주제의 특수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aaaa 님의 논증이 나쁘지 않다고 봐요. 헤겔이 칸트를 비판하면서 "인식 능력에 대해 인식하려 하는 것은 수영을 해보기도 전에 수영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엔치클로페디, §41, 보론 1)라고 지적한 적이 있거든요. 수영이라는 행위는 수영을 직접 하지 않은 사람이 결코 습득할 수 없고, 오직 수영을 하면서만 습득할 수 있는 것처럼, 인식 능력도 인식과 무관하게 인식될 수 없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저는 '삶'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객관화해서 저울질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바깥에서 보기에는 완전히 무가치해 보이는 삶도 그 삶을 직접 사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삶'과 '비존재'를 외적인 시선으로 재단하려는 태도가 얼마나 정당성이 있을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질 수는 있다고 봐요.
*댓글을 쓰다 보니, "내 인생은 그렇게 하찮은 삶이 아니야!"라는 신형만의 명언이 생각나네요. 외부의 시선으로 삶의 가치를 재단하려는 태도에 대해 일침을 주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켄: 신형만, 그동안 고생 많았다. 하찮은 삶을 사느라고 말이야.
신형만: 내 인생은 그렇게 하찮은 삶이 아니야! 가족이 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너한테 알려주고 싶을 정도다!
@YOUN 님이 삶의 가치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하실 때, 만일 이게 '내부자의 시선', 즉 그 삶을 영유하는 사람의 시선으로도 알 수 없다면 @aaaa 님의 결론은 사소한 것으로 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삶의 가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삶의 가치를 살지 않는 상태의 가치와 비교할 수 없겠죠.
따라서 이를 (임의적으로) 삶의 가치에 대한 지식은 그 삶을 영유하는 사람에게 특권이 있거나 (마치 어떤 심적 상태에 대해 1인칭적 특권이 따른다는 주장처럼 말입니다), 심지어는 오직 그 삶을 영유하는 사람만이 증언을 통하지 않고 알 수 있다는 주장으로 해석하겠습니다.
그렇다면 @YOUN 님이 재구성하시는 @aaaa 님의 논증은 다음과 같을 것 같습니다:
(1) 삶의 가치에 대한 지식은 그 삶을 영유하는 사람에게 특권이 있다.
(2) 모든 살아있는 상태의 사람은 살아있는 상태의 가치에 대한 지식에만 특권이 있다.
따라서
(3) 살아있는 상태와 살아있지 않는 상태에 대한 지식에 대해 한 살아있는 사람이 동시에 특권을 가지지 못한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올바른 논증이기는 하겠으나, 이는 반출생주의에 대한 반박이 아니게 됩니다.
더 강한 해석(오직 그 삶을 영유하는 사람만이 그 삶의 가치를 증언을 통하지 않고 알 수 있다)에 따르자면, 논증을 다음처럼 재구성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오직 그 삶을 영유하는 사람만이 그 삶의 가치를 증언을 통하지 않고 알 수 있다
(2) 그 어떤 살아있는 사람도 살아있지 않는 상태의 삶을 영유하지 않는다
(+그 어떤 살아있지 않는 사람도 증언할 수 없다)
따라서
(3) 따라서 비존재 상태에 대한 가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aaaa 님의 논증의 2. 전제, 그리고 그 뒤 결론은 같슺니다)
그러나 이 논증은 저에게는 조금 미심쩍습니다. 이 논증이 올바르려면, 아마 비존재 상태 또한 일종의 삶이라는 전제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전제는 오직 삶의 가치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결론은 비존재 상태의 가치에 대한 명제로 뛰어넘어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비존재 상태의 삶을 가정한다면, (2)를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2)에 대한 한 가지 제게는 직관적인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삶은 살아있는 상태만을 포함하며, 한 사람은 자신의 삶만을 영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비존재 상태의 삶에 대한 가정과 모순되기에 불가능합니다.
또는, @YOUN 님의 의도가 사람은 오직 나의 삶과 비존재 상태의 가치를 비교할 수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렇게 된다면 반출생주의뿐 아니라 반-반출생주의 두 진영 모두에 대한 회의주의가 되겠다는 걱정이 하나, 또한 약한 해석과 강한 해석 모두 남의 삶의 가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막아놓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단지 이 문제가 선험적으로 해결불가능하다는 결론만이 따라나오는 것으로 보인다는 걱정이 또 하나 있습니다.
사실 저는 반출생주의의 비대칭성 논제나 삶의 질 논제 같은 기본 전제들이 나이브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 그 이후의 주제들에 대해 아주 세부적으로 고민해 본 적은 없긴 하지만, 제 직관은 @2357 님이 마지막 문단에서 제시해 주신 내용에 가까운 것 같긴 합니다. 삶에 대한 비교가 가능하다면, 그 비교는 ‘나의 삶‘에 대한 주관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으로 이루어져야 할 뿐, 베너타 같은 사람들처럼 일반화된 비교를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해요.
신형만: 내 인생은 그렇게 하찮은 삶이 아니야! 가족이 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너한테 알려주고 싶을 정도다!
이 대사는 개인적으로 공감 가네요. 저는 반출생주의가 삶이 주는 고통을 부각하고 삶이 주는 행복은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경향을 없앤다면, 태어남과 태어나지 않음. 둘 중 뭐가 더 좋은가에 대한 저울질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맥락에서는 충분히 공감합니다.
제 기억상 베너타의 주장은 대충 고통과 쾌락이 존재하는-그리고 베너타에 따르면 쾌락보다 고통이 클 수 밖에 없는- 삶보다 고통과 쾌락이 부재하는 비존재의 상태(태어나지 않는것)이 더 '낫기' 때문에 반출생주의가 옳다 였던걸로 기억합니다.
네이글의 위트있는 응수는 비존재의 상태가 더 낫다 하더라도 그런 상태에 처한, 그런 행운을 누릴 사람이 몇이나 되냐 - 즉 그런 행운을 누려야 할 존재들은 막상 존재하지도 않는데, 비존재의 상태에 행운이란게 존재한다고, 비존재 상태가 더 좋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냐? 저는 이런 식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이런 응수가 반출생주의에 적절한 응수일지 저는 살짝 회의적입니다. 베너타는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면서 삶에 있어 쾌락을 좋은 것으로, 고통을 나쁜 것으로 등치시킵니다. 베너타는 비존재의 상태가 더 좋은, 더 쾌락을 주는 상태라서 반출생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 두 상태를 비교해볼때 비존재는 쾌락도 고통도 없어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고통이 쾌락을 능가하는, 나쁜 상태인 존재보다 더 나은 상태기에 반출생주의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즉 베너타는 비존재가 더 좋은, 더 쾌락을 주는 상태기에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도 고통을 얻을 존재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런 상태가 존재하는 것 보다 더 낫기에 반출생주의를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비존재의 상태에는 쾌락과 고통을 얻을, 행운을 얻을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데 과연 그 상태를 행운이라고 볼 수 있는가를 문제삼는 네이글의 응수는 베너타의 주장을 빗겨나가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별개로 베너타가 비존재의 상태를 비교하는 것이 과연 옳은 논증인지에 대한 논의는 존재하는 걸로 알고있습니다.
- 두 상태를 합리적으로 비교하기 위해서는 두 상태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 필요하다.
- 비존재 상태를 경험하고 이를 지식으로 가질 수는 없다.
- 따라서 비존재가 존재보다 낫다고 믿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반박a) 한번도 국내에 도입된 적 없는 외래종의 경우, 외래종이 국내에 들어온 상태를 경험한 적이 한번도 없어도 외래종이 도입된 상태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a)에 대한 비판 : 외래종의 위험성에 대한 지식은, 국외의 여러 외래종에 대한 도입 사례에서 귀납적으로 유추된 것이므로, 완벽히 일치하지 않지만 연관이 있는 경험적 지식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존재에 대해서 동일한 정도의 정보가 있다고 볼 수 없다.
반박b) 여성 참정권 도입.
b)에 대한 비판 :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 비판.
프랑스 혁명이 공포정치로 향하기 시작한 1793년에 에드먼드 버크는 천부인권 개념을 한번도 적용해본적이 없는 사회는 천부인권을 부여하는 사회가 이보다 더 낫다고 주장할 수 없다고 하였다.(추상적인 권리에 대한 옹호 논증보다 구체적인 경험으로 부터 구성된 관습을 더 옹호하며, 추상적인 권리에 대한 주장은 공동체의 질서를 붕괴시킨다고 하였다.) 이 논증은 근현대 보수주의자들의 시초가 되었으며, 보수주의자들에게 아직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금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천부인권 개념이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19~20세기에 수많은 혁명과 전쟁을 거치며 이를 사회에 어떻게 적용해야 될지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