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 <성찰>의 말맛(?)을 살려보려고 애쓴 번역

[1] 신성한 파리 신학부의 가장 지혜롭고 저명한 사내들인 학장님과 박사님들께 르네 데카르트 드림

제가 여러분들께 이 글을 바치는 이유는 지극히 정당하며, 제 집필 의도를 이해하고 난 뒤에는 여러분들 역시 이 책을 비호할 만한 정당한 이유를 가지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제가 이 글에서 따랐던 바를 짧게나마 말하는 것으로 이 글을 가장 잘 추천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언제나 신학보다는 철학의 도움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문제들 가운데 신과 영혼에 관한 두 문제가 가장 주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인 우리는 인간 영혼이 신체와 더불어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과 [2]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신앙으로써 충분히 믿을 수 있지만, 불신자들은 이 두 가지가 먼저 자연적 이성으로 증명되지 않는 한, 일체의 종교도, 거의 모든 도덕적인 덕도 납득하지 않으려 드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생에서는 곧잘 덕보다는 악덕에 더 큰 포상이 내걸리기에, 사람들이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생을 기대하지도 않는다면, 대다수는 정당한 것을 유용한 것보다 선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서에서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신의 실존을 믿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역으로 신으로부터 얻어진 것이기에 성서를 믿어야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참입니다. 신앙은 신의 선물이기에, 여타의 것을 믿도록 하는 은총을 주신 바로 그 분께서는 당신께서 실존한다는 사실을 믿도록 하는 은총 또한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런 말을 불신자들에게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순환논증이라고 판단할 테니까요. 물론 여러분들과 다른 신학자들이 ‘신의 실존이 자연적 이성으로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또 ‘피조물들에 관한 수많은 인식보다 신의 실존에 관한 인식이 더 쉬우며, 이토록 쉬운 인식을 하지 못하는 자는 비난받아 마땅함이 성서로부터 추론된다는 것’을 긍정하심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실로 이는 <지혜서> 제13장의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세계를 탐지할 수 있는 지식을 쌓을 능력이 있다면 어찌하여 세계를 만드신 분을 일찍이 찾아내지 못했는가.” 그리고 <로마서> 제1장에서는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라고 말합니다. 더욱이 같은 장의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라는 말은 신에 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이 오직 우리 정신으로부터 구해진 근거들만으로 밝혀질 수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이런 연유로 저는 이것이 어찌 그러한지, 또 어떤 길을 통해 신이 세속의 것보다 더 쉽고 확실하게 인식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3] 또 영혼에 관해서 말하자면, 많은 이들이 영혼의 본성은 쉽게 탐구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심지어 몇몇 이들은 인간 이성rationes humanas은 육체와 동시에 영혼이 사멸한다는 점을 설득한다고, 오직 신앙으로써만 그 반대가 주장된다고 감히 말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 10세 치하의 라테라노 공의회 제8회기는 이들을 단죄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에게 그들의 논거들을 논파하고, 힘껏 진리를 증명하라고 분명하게 명하고 있기에, 저 역시 이런 일에 착수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대다수의 불경한 자들이 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 정신이 육체와 구별된다는 것을 믿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이유인 즉, 이 두가지 것을 여태껏 아무도 증명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이들에게 전혀 동의하지 않으며, 오히려 반대로 위대한 사람들이 이 문제들을 위해 내놓은 거의 모든 논증들이 충분히 이해되기만 한다면 증명력을 가진다고 생각하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논증도 거의 존재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모든 논증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면밀히 찾아내어, 앞으로 모든 이들이 이 논증들이야말로 증명이라고 인정할 만큼 정확하고 명료하게 설명한다면, 철학에서 이보다 더 유익한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학문들에서 온갖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교양(敎養)했다는 점이 몇몇 이들에게 알려졌던 모양입니다. 물론 진리보다 더 오래된 것은 없으니 이 방법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다른 학문들에서 이 방법을 성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본 그들은 내게 이 [저술에서 행할] 일을 극히 집요하게 간청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안에 있어서도 얼마간 힘써보는 것이 제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4] 이 저술에는 제가 성취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동일한 문제를 증명하기 위해 제공될 수 있을 모든 다른 논증들을 이 저술에서 그러모으고자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어떤 확실한 논증도 충분히 있지 않을 때나 가치 있을 테니까요. 오히려 저는 제일의 주요한 논증들만 따라갔기에, 이제 이 논증들을 가장 확실하고 명증적인 증명들로서 감히 내세울 정도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논증들은 인간 정신humano ingenio에 개방된 길을 통해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결코 발견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것들입니다. 말하자면 사안의 필요성과 모든 것과 관련된 신의 영광이 여기에서 평소 제 습관보다 더 자유롭게 저의 성과에 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 논증들이 확실하고 명증적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이런 이유로 이 논증들이 모든 이들의 이해력captum에 적합하다고 확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정은 기하학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여기에서는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 파푸스 및 다른 이들이 많은 논증들을 작성해두었으며, 이것들은 따로따로 떼어서 살펴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고, 또 전건들이 후건들과 정확하게 부합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이유로, 가장 명백하고 확실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이 논증들은 다소 길고 독자들이 집중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오직 극소수에 의해서만 이해됩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저는 제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논증들이 확실성과 명증성에 있어서 기하학적 논증들과 동등하다고, 아니 심지어 그것들을 능가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이것들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충분히 파악되지 못할까봐 염려스럽습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 논증들 역시 다소 길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나 이 논증들이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정신을, 감각들의 결속으로부터 쉽게 떨어질 수 있는 정신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세상에는 기하학적 연구에 적합한 사람보다 형이상학적 연구에 적합한 사람이 더 적습니다. 게다가 [5]차이는 다음과 같은 점에 있습니다. 기하학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확실한 증명을 갖지 않은 어떤 것도 결코 쓰이지 않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미숙한 자들은 참된 것을 논박하기보다는 이해하는 척하기 위해 거짓된 것을 승인하는 것에서 우를 범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철학에 있어서는 모든 사안이 양론으로 나뉘어 논쟁될 수 있다고 여겨지므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진리를 탐구하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최선의 것들마저 공격함으로써 재사(才士)라는 명성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제 논증들은 어떤 것이든 간에 철학에 관련된 것인 까닭에, 당신들께서 변호로써 저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제가 그 논증들의 힘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당신들 학부에 대한 대단히 큰 평판이 자리잡고 있고, 소르본이라는 이름이 갖는 권위는 대단히 커서, 신앙의 영역에서 신성한 공의회 이래로 그 어떤 단체도 당신들 단체보다 더 큰 신뢰를 받지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철학에서도 당신들보다 더 큰 혜안과 견실함, 판단을 이끌어내기 위한 공정함과 지혜를 찾을 수는 없다고 여겨질 정도이니, 만일 당신들께서 이 저술에 마음을 써주실 수 있으시다면, 우선 이 저술을 수정해주십시오. 저의 인간임과 제 무지를 잘 알고 있는 저는 이 저술에 아무런 오류도 없다고 단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빠진 것들이든, 충분히 완전치 않은 것들이든, 설명을 더 요하는 것들이든, 덧붙여주시고, 완전하게 해주시고, 설명해주십시오. 이 일은 여러분들이 직접 해주셔도 되고, 아니면 여러분들의 권고를 듣고 제가 해도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 저술에 포함된, 신이 존재하고 정신과 신체가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논증들이 내가 최대한이라고 인정할 만한 명료함에 도달한 이후에, 즉, [6] 그것들이 더없이 정확한 증명들로 간주되어야 하는 논증들이라는 점에 도달한 이후에, 이 사실을 선포해주고, 공공연하게 증언해주십시오. 당신들께서 이 정도로 마음을 써주신다면, [신과 영혼이라는]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있었던 일체의 오류가 사람들의 마음에서 금새 사라지리라는 것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가 여타의 재능있는 자들과 학식있는 자들로 하여금 당신들의 판단에 쉽게 동의하도록 할 것이고, 당신들의 권위는 재능있다거나 학식 있다기보다는 얼치기 학자이곤 하는 무신론자들로 하여금 반박하려는 의향을 내려놓게 할 것이며, 심지어 어쩌면 그들은 재능을 갖춘 모든 사람들이 이 논증들을 증명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알고서는, 자신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도리어 이를 직접 옹호하려고까지 할 것입니다. 또한 마침내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토록 많은 증언을 쉽게 믿을 것이며, 신이 실존한다는 것, 또 인간 영혼이 신체와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유익한지는 비할 바 없는 지혜의 힘으로 누구보다도 여러분들 스스로가 가장 잘 평가하실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언제나 가톨릭 교회의 최대 지주였던 당신들에게 신과 종교의 문제에 관해 여기에서 더 운운한다는 것은 제게 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7] 독자를 위한 서문

저는 신과 인간 정신에 관한 문제들을 이미 몇 년 전 1637년에 불어로 출판된 <이성을 올바르게 지도하고 학문들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에 관한 서설>[이하 <서설>]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이는 실로 이 문제 자체를 거기에서 정확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아니었으며, 다만 맛만 보고, 이 문제들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야 하는지 독자들의 판단으로부터 알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 이 문제들은 그 자체로 한 번 이상 다뤄져야 한다고 판단될 정도로 중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들을 해명하기 위해 제가 따른 길은 거의 밟히지 않은 길이며, 보통 잘 이용되지 않는 길이어서, 저는 프랑스어로 쓰여져 거의 모두가 읽을 수 있는 글에서 이 길을 더 상세히 가르치는 일이 쓸모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더 허약한 정신마저도 자신이 그 길에 들어서야 한다고 믿어버렸을 테니까요. <서설>에서 저는 제 저작에서 반박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 무언가를 떠올린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부디 제게 알려주십사 부탁했었지만, 이 문제들과 관련해 내가 다룬 것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반론은 딱 두개밖에 없었으니, 문제들을 더 정확히 설명하는 데 착수하기 전에 이 두 반론에 대해 먼저 짧게 대답하겠습니다. 첫 번째 반론은 ‘자신에게로 돌아선 인간 정신이 [8] 자기가 다름 아닌 생각하는 것임을 지각했다는 것’으로부터 ‘인간 정신의 본성 혹은 본질이 그것이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에만 존립한다는 것’이 귀결되지 않아서, 그 결과 ‘오직tantum’이라는 말은 어쩌면 또한 인간의 영혼의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말해질 수 있을 나머지 것들 모두를 배제한다는 것입니다. 이 반론에 대해 대답하자면, 저 또한 거기에서 그것들을 사물의 진리 자체와 관련된 순서 속에서 배제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그때 저는 분명 이 순서에 관해 다루고 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제 지각과 관련된 순서 속에서만 배제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 말인 즉슨, 내가 내 본질에 속한다고 알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란 ‘나는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 혹은 자기 속에 생각의 능력을 갖고 있는 사물이라는 점’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잇따르는 곳에서 저는 어떻게 해서 ‘내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내가 다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는 그 사실’로부터 ‘실제로 다른 어떤 것도 내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귀결되는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다른 반론은 ‘내가 나보다 더 완전한 사물의 관념을 내 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그 관념 자체가 나보다 더 완전하다는 것’이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하물며 ‘이 관념을 통해 표상되는 것이 실존한다는 점’은 더욱이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 관념이라는 말에 동음이의어가 깔려 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관념이라는 단어는 [한편으로는] 질료적으로, 즉 지성의 활동이라는 의미로 취해질 수 있으며, 이 의미에서 관념은 나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해질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상적으로, 즉 저 [지성의] 작용을 통해 표상된 것이라는 의미로 취해질 수 있으며, 이렇게 표상된 사물은 비록 지성 밖에 실존한다고 전제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자기 본질의 측면에서 나보다 더 완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잇따르는 곳에서 저는 ‘나보다 더 완전한 사물이 내 속에 있다는 것’으로부터 ‘그 사물이 실제로 실존한다는 것’이 어떻게 귀결되는지 자세히 드러내겠습니다. 이외에도 저는 썩 길게 쓰여진 두 개의 글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글들에서는 이 사안에 관한 저의 논증들이 아니라 결론들만을 무신론자들의 일반적인 논의에서 나온 논변들을[9] 변형시킴으로써 반박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논변들은 내 논증을 이해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힘]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판단은 도착되고 허약해서 처음 받아들인 의견이 아무리 거짓되고 이성으로부터 낯선 것일지라도 그 처음의 것에 의해 설득되지, 그 의견에 대한 반박으로서 나중에 들은 것에 의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참되고 굳건할지언정 별로 설득되지 않기 때문에, 제가 혹여 그 [반박하는] 논변들을 먼저 언급하게 될까봐 여기에서는 그 글들에 대해서 답변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것만을 일러두겠습니다. 통속적으로 무신론자들이 신의 실존을 반박하기 위해 제기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언제나 인간의 정념들을 신에게 덧씌움으로써 신의 실존을 부정한다거나, 혹은 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지를 규정하려 들고 파악하려 들만큼의 큰 힘과 지혜를 우리 정신에 부여한다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정신은 유한한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하지만, 신은 파악불가능하고 무한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그들이 제기하는] 그 모든 문제들은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도 낳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판단을 어떤 식으로든 한 번 겪고 난 뒤인 지금, 이제 저는 여기에서 신과 인간 정신에 관한 동일한 물음과 동시에 제일철학의 모든 토대들을 다루는 일에 착수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대중의 어떤 박수갈채도, 독자들의 쇄도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저는 저와 함께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고 성찰하기를 원하는 이들, 또 정신을 감각과 동시에 모든 판단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고 떼어놓기를 원하는 이들이 아니라면, 그 누구에게도 이 글을 읽으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대단히 적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논증들의 계열과 연관을 파악하는 것에 신경쓰지 않으면서, [10] 흔히들 그러듯이 오직 낱낱의 개별적인 어구들만을 흠잡으려 하는 자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이 저술을 읽는 것으로부터 큰 수확을 거두어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쩌면 많은 곳에서 조롱할 만한 기회를 발견하더라도, 그럼에도 그들은 채근하거나 응답할 가치가 있는 어떤 반론을 쉽사리 제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조차 제가 모든 면에서 대번에 그들을 만족시키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에, 또 어떤 이에게는 난점으로 비춰질 법한 사안들 모두를 제가 미리 알고 있다고 자부할 정도로 자신하지는 않기 때문에, 제가 확신했던 동일한 논증들을 가지고 어쩌면 제가 다른 사람들도 설득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기 위해서, 먼저 <성찰>에서는 제가 생각하기에 확실하고 명증적인 진리의 사유로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유들 자체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정신에 있어서도 학식에 있어서도 뛰어난 몇몇 사람들의 반론에 대답하고자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이 <성찰>은 인쇄소에 맡겨지기 전에 [미리]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보내졌습니다. 대단히 많은 것들과 다양한 것들이 그들에 의해 반론으로 제기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에 의해서 아직 다뤄지지 않은, 적어도 어떤 중요성을 갖춘 무언가가 다른 사람들의 정신 속에 나타나는 것을 감히 기대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독자들께 저 반론들과 그것들에 대한 [저의] 해결책들 모두를 통독하시기 전에는 <성찰>에 대해 먼저 판단내리지 말 것을 거듭거듭 청합니다.

드라이브를 뒤적이다가 석사 때 번역 연습한 걸 찾았네요. <성찰>이 말맛이 참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서, 그 말맛을 한번 살려보려고 애쓰면서 작업해 본건데, 읽으시는 분들은 어떻게 느낄지 궁금하네요. 마침 <번역자료>라는 카테고리가 있길래 한번 올려놓아 봅니다.

13개의 좋아요

The awkwardness of Descartes’s seeking the acceptance and use of his Meditations by teachers is amplified by the fact that he was not a teacher himself.

첫 번째 글에 대해 sep에서 설명한 글의 일부인데, 그 awkwardness가 잘 살아난 번역 같아 좋네요ㅋㅋㅋ

1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