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가능성 원리(PAP)는 오직 달리 행동할 수 있었던 바에 대해서만 도덕적 책임이 있다는 아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창작물에 많이 등장하는 말 중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보통 변명을 늘어놓는 악당에게 주인공이 말하는 정의롭고 멋진 말로 평가되는 데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과연 '같은 상황'이라는 것이 존재할까요? 제 생각에 여기에 '같은 상황'이라 함은, 걸어온 삶의 궤적을 뛰어 넘어 DNA까지 같은 것입니다. 즉, 완전히 물리적으로 일치하는 상황을 말하는 거죠. 그것이 아니라면, '너와 같은 상황이지만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이 있다'를 논리적으로 주장하기에는 어폐가 있기 때문입니다. (통제 변인이 바뀌었는데, 종속 변인의 변화를 주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므로)
여러분이 신이라고 생각하고 사고 실험을 해서, 모든 물리적 상황을 똑같이 재현했더니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이것을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그저 확률적인 운명의 장난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결국 이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도달한 것은, 모든 사람은 잘못을(어떤 행동을) 저지를 확률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사람 때문도 아니고 그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죠.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저는 제시하신 내용이 '대안가능성 원리(principle of alternate possibilities)'라는 주제와 정확히 일치하는지 조금 의문스럽습니다. 다만, 대안가능성 원리에 대한 논의를 떠나서,
라는 비판 자체는 대부분의 경우 아주 타당하게 제시되지 않나요? 가령, "나는 가난했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라는 주장은 아주 단순하게 형식화하면,
(x)(Px → Cx)
Px: x는 가난하다.
Cx x는 범죄를 저지른다.
이고, 이렇게 형식화된 주장은 가난하더라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명 이상의 사례라도 존재한다면 논박되잖아요. (∃x)(Px & ~Cx)를 만족하는 x가 하나라도 있으면 논박되는 거죠. 마찬가지로, "나는 무책임한 부모 밑에서 컸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라는 주장도 아주 단순하게 형식화하자면,
(x)(Ix → Cx)
Ix: x의 부모는 무책임하다.
Cx x는 범죄를 저지른다.
이고, 이렇게 형식화된 주장은 무책임한 부모 밑에서 자랐더라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명 이상의 사례라도 존재한다면 논박되잖아요. (∃x)(Ix & ~Cx)를 만족하는 x가 하나라도 있으면 논박되는 거죠. 바로 이러한 비판을 일반화하여서,
라고 할 수 있다면, 이 비판은 대부분의 경우에서 충분히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굳이 '같은 상황'을 엄격하게 정의해서 모든 물리적 상황을 똑같이 재현한 경우를 고려해야만 저 비판이 타당하다고 하는 것은 너무 과한 해석이죠.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가 자신이 잘못을 범하게 된 결정적 요인으로 제시한 것에 대해서, 그 요인이 잘못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판이 성립한다고 생각해요.
만약 형이상학적 주제로서 '동일성(identity)'이나 '같음(sameness)'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라면, 개인적으로 저는 '상대적 동일성(relative identity)'이라는 개념을 옹호하는 입장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제자인 피터 기치(Peter Geach)가 제시한 것으로 유명한 개념인데, "동일하다"거나 "같다"라는 말은 특정한 맥락이 주어질 때에야 유의미하게 이야기될 수 있다고 지적하는 개념이에요.
I maintain that it makes no sense to judge whether things are "the same", or remain "the same", unless we add or understand some general term―"the same F".
P. T. Geach, Reference and Generality, third Edition (Ithaca, N.Y.: Cor- nell University Press, 1980), pp. 63f
I am arguing for the thesis that identity is relative. When one says "x is identical with y", this, I hold, is an incomplete expression; it is short for "x is the same A as y", where "A" represents some count noun understood from the context of utterance―or else, it is just a vague expression of a half-formed thought.
P. T. Geach, "Identity," Review of Metaphysics 21 (1967-8), p. 3.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JarOfDesire 님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될 것 같아요. (a) 구체적인 맥락을 상정하지 않은 채 '단적으로 같음' 혹은 '완전한 같음' 따위가 존재할 것이라고 전제하고서 "같은 상황"이 무엇인지를 말하려는 시도는 허구적일 것이고, 혹은 (b) 반드시 '완전히 물리적으로 일치하는 상황'으로만 "같은 상황"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지나치게 과도하니까요. 어느 쪽으로든지, "같은 상황"이 무엇인지를 @JarOfDesire 님이 주장하신 것처럼 정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라는 주장을 우리가 유의미하게 이해하려 한다면, "너처럼 가난하더라도, 모두가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혹은 "너처럼 부모가 무책임하더라도, 모두가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와 같이 '구체적인 상황'의 같음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저런 비판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대개 구체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요.) 그렇지 않고서, 단적으로 같은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저 비판을 피하려 하거나, 물리적으로 완전히 같은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저 비판을 피하려 하는 것은 '동일성'이나 '같음'에 대한 다소 잘못된 이해를 전제하고 있는 것 같아요.
라는 주장인데,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저 주장이 정당한지 여부니까요. 즉, 다른 사람들이 삶 전체와 DNA까지 자기와 똑같다면 모두 자기처럼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는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고 별다른 근거 없이 단언하고 있을 뿐이죠. 아무리 선해해주어도, 저 주장은 일종의 '운명론'이나 '결정론'에 호소하고 있는 셈이지만, 운명론이나 결정론이 철학적으로 잘 정당화되는 주장인지는 매우 의문스럽죠.
먼저 YOUN님께서 지적한 것 같이 '너와 같은 상황이지만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이 있다'는 말로 보통 의미하는 것은 "유관한 측면에서 충분하게 유사한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지 "물리적으로 구별 불가능하면서 다른 선택을 내리는 행위자가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보통 이런 종류의 말은 행위자가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내가 이러저러한 상황 C에 있었다는 사실이 나의 책임을 무효로 만들어주거나 최소한 경감시켜준다고 먼저 변명한 경우에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C라는 상황에서 다른 행위를 한 사람들도 많으니 행위자가 C라는 상황에 있었다는 사실이 행위자의 책임을 무효로 만들어주거나 경감시켜주지 못한다는 지적인 것이죠. 이때 C는 애초에 변명의 구실로 행위자에 의해 명시적으로 언급된 내용만을 포함합니다. (e.g.,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람, 범죄의 피해자가 된 적이 있음, etc.) 염두에 두고 계신 창작물 속에서 행위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빠짐없는 총체적 물리적 기술을 언급하면서 변명하진 않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더불어, 동일하진 않지만 van Inwagen이 소위 Roll-back argument를 libertarianism에 대해 제시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행위자가 자유로운 결정을 할 때마다 시간을 다시 과거로 돌려서 동일한 조건에서 다시 결정을 내리도록 만드는 일을 여러번 반복할 경우 행위자는 어떨 때는 A를 선택하고 어떨 때는 B를 선택하는 일을 반복할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에 대한 어떠한 인과적인 설명도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이는 행위자의 선택이 전적으로 무작위로 일어남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무작위로 일어난 선택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기 어려워 보입니다. 따라서 libertarian들이 생각하는 자유로운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상이 Roll-back argument입니다.
그런데 Roll-back argument는 libertarianism에 대한 비판 논변이지 대안가능성 원리에 대한 비판 논변이 아닙니다. 글쓴 분의 논변도 대안가능성 원리에 대한 비판 논변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양립가능론과 대안가능성 원리를 모두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논의의 편의를 위해 단순화된 버전을 언급하면, 대안가능성 원리를 "다른 행위를 하길 원했다면 다른 행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가 참일 것을 요구하는 원리로 생각할 겁니다. 이러한 원리는 JarOfDesire님의 논변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소한 지적으로 Frankfurt의 유명한 논문 'Alternate possibilities and moral responsibility' 이후에 최소한 분석철학자들은 상당수가 대안가능성 원리를 거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주관적인 인상으로는 과반이 넘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위 주장이 범죄의 필연성을 별다른 근거 없이 주장할 수 있죠. 다만, 제가 본문에서도 말했다시피, 똑같은 상황에 대한 사고 실험을 진행했을 때, 다른 결과가 나온다면, 필연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어떠한 차이점에서 발생한 것일까요? 단순히 무작위적 확률에 의존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우리의 모든 행동의 원인과 결과는 거슬러 올라가 우리가 수정된 순간부터 받은 영향과 선택이 누적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수정된 그 순간 사람은 어떠한 선택과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언제, 어떻게 범죄를 저지르는 세계와 저지르지 않는 세계가 갈라설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만약 완전히 동일한 물리적 상황에서 다른 결과가 나온다면, 그것은 해당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변인이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필연성까지 가지 않더라도 책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계속 될 수 있는거죠.
물론, 이것은 결정론적 세계관에 기댄 서술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론의 관점에서도 보겠습니다.
다시 사고실험으로 돌아가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다고 고려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세계의 해당자는 완전히 똑같은 궤적을 지나고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 차이는 우리가 물리적으로 관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력'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고려해보겠습니다. 그 자유의지력은 어떻게 차이가 날까요? 결국, 어떠한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더라도 둘 사이의 차이를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마치, 같은 함수에 같은 입력값을 넣었더니 출력이 다른 상황과 같은 것이죠. 그렇다면, 해당 사람에게 본질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도 어렵겠죠. 그저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완전히 위상적으로 동일한 두 사람을 고려을 때, 다른 선택이 가능한가? 입니다. 그것이 과연 불가능하다면, 저는 해당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수정체인 순간부터, 자아가 막 생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어떤 미래로 진입할 지 결정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는 일단 자유의지의 의미를 정확하게 정의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은 이전과 동일한 상황이었더라도 우리 인간은 다른 행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상 증명할 수 없고 의미 있는 주장도 아니라고 봅니다. 따라서 자유의지의 존재는 "어떤 행위에 대해 그 행위를 일으키게 한 선택, 즉 원인이 달라질 수 있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식적인 관점에서 발생한 사건의 원인이 달랐다면 당연하게 그 결과 또한 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