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반철학자이며 반대하는 것의 맞은편에 서 있기만 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니체의 관점주의와 자유정신은 기존 전통 철학에 반대하기 위해서, 힘에의 의지는 기독교에 반대하기 위해서, 고통은 공리주의에 반대하기 위해서, 큰 정치는 민족주의에 반대하기 위해서, 가치의 위계와 거리의 파토스는 민주주의에 반대하기 위해서 발전되고 만들어진 개념들이다. 그의 이러한 개념들을 현실에 적용하기는 매우 어렵고 위험하고 오용될 여지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통용될 만한 어떠한 실천적 규범도 제시하기 어렵다. 이건 니체 스스로가 여기에 어떤 체계도 부여하지 않았고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편적 규범의 왕국을 만들려고 한 칸트와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는 것 같다. 그의 철학은 역사 해석에 머무르고 있다. 또 각 개념들은 상대적이다.
우리는 같은 힘에의 의지를 신자유주의 자기계발 논리에서도 발견할 때가 있고 반체제적인 혁명가에게서 발견할 때가 있다. 힘에의 의지는 선한 것도 아니며 악한 것도 아니며 특정 정치 이념에 귀속되지 않는다. '삶이 자기 자신을 확장하고 조직하고 지배하려는 경향성'에 가깝다는 기술적 개념에 가깝다. 그래서 기업가의 자기확장에서도, 혁명가의 전복 충동에서도, 예술가의 창조 욕망에서도, 금욕주의자의 자기 극복에서도 동시에 나타난다.
결국 적용되어야 할 것은 니체의 방법론일까? 니체가 가진 가치와 도덕마저 의심하는 속성과 덕을 가리는 섬세한 눈과 예민한 귀는 본받을 만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니체의 태도만 남을 것이다. 니체가 남긴 것은 가치의 기원을 의심하는 계보학적 시선, 도덕을 감정과 권력의 문제로 읽는 심리학적 예민함, 미덕과 덕목을 무조건 선으로 보지 않는 잔혹한 정직성, 고상함과 저속함을 가르는 섬세한 차이 감각, 말해지지 않은 것을 듣는 예민한 귀이다. 하지만 정녕 이게 다란 말인가?
철학 잘 모릅니다. 많은 가르침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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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을 너무 나이브하게 쓴 거 같아 수정해서 다시 덧붙입니다.
니체는 자주 “반(反)의 철학자”처럼 보인다. 그는 어떤 입장을 세우기보다, 반대하는 것의 맞은편에 서서 그 입장의 전제와 숨은 동기를 해부하는 데서 출발한다. 관점주의와 자유정신은 전통 형이상학이 전제해온 “진리의 도덕”을 흔들기 위해 등장하고, 힘에의 의지는 기독교적·금욕주의적 도덕이 삶을 부정하는 방식을 파고들기 위해 동원되며, 고통의 의미는 공리주의적 행복 계산이 도달하지 못하는 삶의 층위를 겨냥한다. 큰 정치는 민족주의의 좁은 정체성 정치에 대한 반감을 포함하지만, 동시에 문화와 인간을 ‘형성’하고 ‘서열화’하려는 상상까지 품는다. 가치의 위계와 거리의 파토스는 민주주의적 평준화가 만들어내는 취향의 단조로움, 인간형의 균질화를 겨눈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의 개념들은 “무언가를 반박하기 위한 반사작용”이라기보다, 특정 도덕·철학·정치가 어떻게 생겨났고 무엇을 은폐하는지를 폭로하기 위한 진단 도구로 보인다. 문제는 그 도구들이 현실에 곧바로 적용되기 어렵고, 적용하려는 순간 위험해진다는 점이다. 니체는 보편 규범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그 자리를 비워둔다. 그래서 칸트처럼 “규범의 왕국”을 설계하려는 철학과는 정반대 방향에 서 있다. 니체가 남기는 것은 체계라기보다 ‘감각’과 ‘시선’이다.
또 니체의 핵심 개념들은 쉽게 오용된다. 예컨대 힘에의 의지는 특정 정치 이념에 귀속되는 선악의 표지가 아니다. 오히려 “삶이 자기 자신을 확장하고 조직하고 지배하려는 경향”을 설명하려는 기술적 개념에 가깝다. 그래서 같은 힘에의 의지는 기업가의 자기확장에서도, 혁명가의 전복 충동에서도, 예술가의 창조 욕망에서도, 금욕주의자의 자기극복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이 보편성은 장점이면서 동시에 위험이다. 누구나 자기 언어로 끌어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적용되어야 할 것은 니체의 ‘내용’이 아니라 니체의 ‘방법’일까. 나는 여기서 니체가 남긴 것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첫째, 가치의 기원을 의심하는 계보학적 시선.
둘째, 도덕을 이성의 명령이 아니라 감정과 권력의 문제로 읽는 심리학적 예민함.
셋째, 미덕과 덕목을 무조건 선으로 취급하지 않는 잔혹한 정직성.
넷째, 고상함과 저속함을 가르는 미세한 차이 감각.
다섯째, 말해지지 않은 것을 듣는 귀—동기의 층위를 알아채는 청력.
하지만 정말 이것만 남는가? 니체의 철학이 “해체의 기술”로만 남는다면, 그것은 끝내 공동의 삶에서 통용될 실천 규범을 만들지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니체는 규범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 규칙’의 형태로는 내놓지 않는다. 대신 그는 어떤 방향을 암시한다. 삶을 긍정하는 가치평가, 자기기만과 원한의 약화, 자기극복과 형성, 그리고 인간형과 문화의 고양 같은 지향들이다. 다만 그것들은 법전이 아니라 시험지에 가깝다. 따라야 할 규칙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시련과 취향의 기준으로 주어진다.
여기서 비판점이 분명해진다. 니체는 도덕과 가치를 해부하는 데에는 탁월하지만, 그 해부 결과를 사회적 규범으로 번역하는 경로를 일부러 제공하지 않는다. 그 결과 니체는 두 가지 위험을 동시에 낳는다. 하나는 “아무 말이나 가능한 상대주의”로 오해되는 위험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자의 논리”로 폭주하는 오용의 위험이다. 니체는 모든 관점이 동등하다고 말하지 않지만, 관점들의 ‘질적 위계’를 말하면서도 그 위계를 보편 규칙으로 고정하지 않는다. 이 빈틈이 곧 니체의 힘이자 니체의 위험이다.
요컨대 니체는 반대의 맞은편에만 서 있는 철학자라기보다, 기존 가치들의 심리적·권력적 뿌리를 폭로하면서 “새 가치”를 요구하는 철학자에 가깝다. 다만 그 요구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태도와 감각, 그리고 시련의 형식으로 제시된다. 그래서 니체는 유혹적이며, 동시에 위험하다. 그의 철학이 남기는 것은 체계가 아니라—‘눈’과 ‘귀’와 ‘잔혹한 정직성’이다. 그리고 그 감각을 어떻게 공동의 삶으로 옮길지에 대한 책임은, 철학자보다 독자에게 더 무겁게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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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가 친다는 것은 허상이다. 번개는 원인이고 '친다.'라는 것은 결과라고 말할 수 없다. 그냥 그런 작용에 이름을 붙이다 보니 주어가 생기고 이게 주체가 된 거다.
즉 주체는 작용에 붙은 이름이고 영혼은 원인이 아닌 효과이며 "내가 원했다."는 충동들의 사후적 서사다. 선택과 결단은 힘들의 충돌 결과이며 자유의지는 형이상학적 허구이며 주체는 원인이 아니라 전장이다.
그렇다면 니체 철학으로 윤리를 만들 수가 있나? 니체에 따르면 주체나 영혼도 효과일 뿐이고 환상인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제시할 수 있나? 좀 더 구체적으로 주체가 강자나 고귀한 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게 되지 않나? 주체는 실체가 아니라 작용의 응결일 뿐이고 영혼은 원인이 아니라 효과일 뿐이다. "나는 원한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얻었다."가 아니라 여러 충동과 힘이 우연히 나라는 이름 아래 묶인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이나 결단은 허상 아닌가? 자유의지는 형이상학적 허구다. 주체는 원인이 아니라 전장이며 선택은 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힘들 사이의 승패 결과다. 그냥 더 강한 힘이나 의지 작용만이 있을 뿐 아닌가? 강자가 되려고 노력한다는 말 자체가 이미 도덕적 주체적 언어 아닌가? 고귀한 자(강자)는 이미 그렇게 평가하고 그렇게 반응하고 그렇게 창조한다. 그는 결코 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존재하는 힘의 배열이다. 즉 니체 철학은 "강자가 되어라"가 아니라 "강자의 언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라"라고 말한다. 결국 세계에는 더 강한 힘, 더 약한 힘, 그리고 그 상호작용만이 남게 되는가? 다만 반응적 힘과 능동적 힘으로 나눠볼 수는 있다. 반응적 힘은 억압에 반응하고, 원한을 저장하고, 규범을 만든다. 반면 능동적 힘은 스스로 가치를 만들고, 기준을 정하고, 긍정한다. 하지만 다시..주체라는 게 있어서 능동적 힘이라는 걸 선택할 수 있는가???
결국 니체 철학은 규범이 아니라 진단일 뿐이다. 즉 규범 윤리는 붕괴되고 평가 구조만이 남는다. 니체를 통해서는 결코 "이렇게 살아야 한다."를 말할 수 없다. "이런 삶이 더 고귀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니 니체가 역사철학적인 것이다. 절대 니체는 명령하지 않는다. 단지 해부하고 해체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