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차라투스트라 직역 작업중인데 한번 올려봅니다.

차라투스트라 강독한답시고 글 한창 올리다가 요즘은 직역 작업을 하고 있었네요.
이제 곧 출간을 앞두고 있는데,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여 서문 1장만 한 번 공유해봅니다.

피드백이나 여러 의견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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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보다는 주석서에 더 가까운 내용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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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이 좀 많아요.ㅎㅎ 5000개 정도

아주 꼼꼼히 보지는 못했고, 몇 가지 간단하게 적자면,

1.
주석 3번 등에서 등장하는 차라투스트라가 “올바른 이해”를 갖게 됐다는 것에 관해: 차라투스트라가 ‘올바른 이해’를 가졌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우리 인간과 독립적인 실재를 정확히 반영하는 지식이 있는데, 그것을 차라투스트라가 갖추게 됐다고 주장하시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에서 니체는 (형이상학적) 대응론을 펼치는 것인가요? 아니면 차라투스트라 "(자신이 보기엔) 올바른 이해"인가요?

덤으로, 주석 1번 등에서 등장하는 “사회의 부조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차라투스트라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회의 이러저러한 측면을 염두에 두신 것이라면, 왜 그것을 “부조리”라고 칭하셨는지요?

2.
주석 4-7에서 등장하는 “태양”에 관해: (1) 시각적 비유를 사용하여, 태양은 우리가 대상을 볼 수 있게 만든다는 점을 통해 태양과 그 빛이 “올바른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이자 올바른 이해 자체를 의미한다고 쓰셨는데, 태양(빛)이 과하면 우리는 눈을 멀어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관련하여 (2) 차라투스트라가 태양의 빛을 통해 앎을 얻게 됐다고 볼 근거가 있는지요? 즉, 차라투스트라가 플라톤식의 태양의 비유를 썼다고 볼 근거가 있는지요? 차라투스트라는 전통 철학처럼 태양을 지식을 담지하고 전달하는 고귀한 존재로 대우하기보단, 전통 철학과 달리 친구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동굴” 속에서 은둔하며 지혜를 얻지 않았나요? (3) 태양의 빛을 받을 존재가 없다면 태양의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비약입니다. 태양이 빛을 발산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3.
번역과 관련한 몇 가지 굵직한 것들만: (1) 원문에서는 “네 모든 행복이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에서 이어지는 “10년 동안” 문단을 포함해 직접 인용 부분은 앞선 문단과 double enter 처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2) “사람들 사이에 있는 현자들” 문단에 두 번 사용된 “wider einmal”이 모두 빠져있습니다. (3) “이 잔은 다시 채워지길 바라고” 앞에 있는 “Siehe!”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4) “untergehen”과 “Untergang”을 각각 “저무다”와 “저물음”으로 번역하셨는데,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차라투스트라>의 추후 내용을 염두에 봤을 때, “몰락”이 더 낫다고 봅니다. (5) 원문에서 니체가 강조표시를 한 것은 “untergehen” 뿐입니다. 그러니까 “muss”에 해당하는 “~해야 한다” 부분은 강조표시를 빼셔야 합니다. 나아가 니체는 마지막 나래이션 문장에 강조표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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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이해는 그릇된 이해와 대비되는 것으로 참인 이해/진리에 해당됩니다. 즉 현상을 왜곡하거나 그릇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닌, 현상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 해당되죠. 이후 이야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어떤 생각을 가지셔서 그 이야기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단순히 객관적으로 올바른 것이냐, 주관적으로 올바른 것이냐를 이야기하신다면, 객관적 올바름을 의미합니다.

(1)
이야기하신 부분은 문맥의 의미와 더불어 <차라투스트라> 전반에서 언급되는 태양의 의미와 또 어둠/밤에 대한 의미와 함께 볼 수 있습니다. 태양이 과하면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관점은 차라투스트라에서 제시하는 태양에 대한 관점이 아니기에, 관련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어지긴 합니다.
참고로 현재 여기 올린 서문은 <차라투스트라> 전체에 대해 번역 및 5천여개의 주석을 모두 삽입한 후 공유한 서문 번역이라는 점을 참고해 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2)
태양이 플라톤의 태양과 관련지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동굴에 빛을 비춘다는 표현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술된 주석의 내용에 따르면, 국가 6권에서 플라톤이 태양과 어둠을 비교하게 되는데, 이에 따른 태양과 밤, 어둠의 비교가 차라투스트라 전반에 나타납니다.
(3)
빛을 받을 존재가 없다면 태양의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주장은 니체/차라투스트라가 단적으로 표현한 표현이며, 이를 풀어 전달하는 것이기에, 태양을 둔 해석은 다양하게 볼 수 있으나, 니체에 대한 제 해석은 그러합니다.

(1), (2), (3)
해당 번역본은 굳이 의미 없는 부분에 대한 것은 축약하고 정리하였습니다. 즉 의도하에 배제된 사항들입니다. 이 번역의 목표는 직역을 <그대로 옮기기>가 아니라 한국식으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전달>하며 <의미를 이해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untergehen에 대한 번역은 몰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번역서들의 추세이지만, 그렇게 보는 경우 차라투스트라 전체에 대한 의미가 훼손됩니다. 이 번역어의 선택에 따른 결과는 저희 버전의 차라투스트라를 보시면 알 수 있지만, 기존 번역서에 맞추어서 본다면 이상한 번역으로 보일 듯하군요.ㅎㅎ
(5)
muss 강조는 한국어 번역상의 이유로 강조를 달리 하였습니다.
(6)
볼드는 책 구조상 필요에 따라 넣은 것으로, 니체는 어떤 구절에도 볼드 처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굳이 답변하실 필요 없습니다.

몇 가지 말씀을 덧붙이자면,

1.
<차라투스트라> 시기 니체는 "객관적"으로 참인 지식의 존재를 긍정했고, 차라투스트라는 그러한 지식을 갖춘 자라는 입장이신데, 그렇게 볼 근거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우선, <차라투스트라> 1권과 2권이 1883년에 출판됐는데, 이맘때 시기에 니체가 정말로 세계에 대한 객관적으로 참인 지식이 있고, 인간이 그것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는 학계에서 첨예한 논쟁 대상입니다. 둘째로, <서문 1>을 올리셨으니 <서문>에서 드러나는 점을 말씀드리자면, <서문 4>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가 아닌 위버멘쉬의 전령으로 그려집니다.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것이 신의 가르침 같은 객관적 참인 믿음(또는 지식)이라고 볼 수 없지 않을까요? 특히나, 차라투스트라가 이런저런 여정을 거치며 생각이 변화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요.

2.
플라톤이 태양과 지식을 관련짓는다고 해도,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에서 똑같은 의미를 담고 비유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냐는 것이 제 질문이었습니다. "동굴에 빛을 비춘다"라는 표현이 " Zehn Jahre kamst du hier herauf zu meiner Höhle: du würdest deines Lichtes und dieses Weges satt geworden sein, ohne mich, meinen Adler und meine Schlange. Aber wir warteten deiner an jedem Morgen, nahmen dir deinen Überfluss ab und segneten dich dafür" 문단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여기엔 태양이 차라투스트라에게 지식을 전달했다는 식의 함축이 들어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3.
untergehen을 몰락으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느냐는 것은 기존의 번역서가 그렇게 옮겨서 말씀을 드린게 아니라, 제가 보기엔 몰락으로 옮기는게 적절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니체가 강조하는 자기 극복이 (흔히 말하는) 좌절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아래로 내려가서 가르침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동시에 좌절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전체 내용의 핵심 줄거리라면, "untergehen"은 '내려감'과 '몰락' 두 가지 의미를 담아 니체가 사용하고, 상황에 따라 '내려감'과 '몰락'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untergehen(to go under)"가 "to descend"와 "to be destroyed" 양자 모두를 함축한다고 여기고, 맥락에 맞춰 후자를 번역하면 몰락이 적절한 것 같아서요. 만일 "untergang"을 "저무름"이라고 옮긴다면, <서문 4>에서 나오는 "Was gross ist am Menschen, das ist, dass er eine Brücke und kein Zweck ist: was geliebt werden kann am Menschen, das ist, dass er ein Übergang und ein Untergang ist" 문장 뒷부분도 "사람을 사랑받게 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과정과 저무름이다" 정도로 번역해야 할 것인데, 사람이 저문다는 표현은 잘 와닫지가 않네요.

4.
저는 니체가 볼드 처리를 했다거나 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고, 강조표시를 했거나 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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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오류가 있는 것 같아 간단히 달겠습니다.

이것은 차라투스트라 2부를 참고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Aber wir warteten deiner an jedem Morgen, nahmen dir deinen Überfluss
ab und segneten dich dafür.
Siehe! Ich bin meiner Weisheit überdrüssig, wie die Biene, die
des Honigs zu viel gesammelt hat, ich bedarf der Hände, die sich
ausstrecken.
그러나 우리는 매일 아침 너를 기다렸었고,
너의 풍요로움을 받아들였으며, 너의 베풂에 감사해했다.
보라! 결국 나는 꿀을 너무 많이 모은 벌처럼
내 지혜에 싫증이 나버렸고,
이제 내게는 내가 모은 꿀을 얻고자 하는 손들이 필요하다.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으로부터 풍요로움을 받아들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결국 가득차 졌고, 질렸다'는 이야기가 이어지죠. 문맥 전체를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차라투스트라에서 untergehen의 의미는 태양처럼 저물고 싶다는 의미에서 나오는 표현으로, 아래 구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Dazu muss ich in die Tiefe steigen: wie du des Abends thust, wenn du hinter das Meer gehst und noch der Unterwelt Licht bringst, du überreiches Gestirn!
Ich muss, gleich dir, untergehen, wie die Menschen es nennen, zu denen ich hinab will.
이를 위해 나도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하리라.
저녁이면, 바다 아래의 하계(下界)로 내려가
빛을 비춰주는 너처럼 말이다.
이 넘치도록 풍요로운 별이여!
산 아래의 사람들이 말하듯이, 나는 너처럼 <저물어야 한다*>.
문장 그대로 태양처럼 untergehen하고 싶다는 내용인데, 이것을 몰락으로 보는 것이 더 인위적인 해석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존 해설들의 입장이기도 하죠. 잘 참고해 보시면 좋을 듯하네요.

의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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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기에 @sophisten 님의 2번 물음은 태양이 차라투스트라에게 “지식”을 전달했다는 함축이 있냐는 물음이시고,

여기에서 지식이라는 것이 앞서 1번에서 물으신 “객관적”으로 참인 지식이냐는 것이라면,

sophisten님의 물음은 아마도 차라투스트라가 태양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였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지식’을 태양으로부터 받았느냐 하는 물음이신 것 같습니다. 저도 이 번역본을 읽고 동일하게 들었던 물음이라 질문하고 싶었거든요. (아니실 수도 있습니다.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제가 읽기에도 니체가 여기서 쓰고 있는 태양은 차라투스트라에게 객관적 지식을 전달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선 @boni 님이 말씀하신대로 여기서 등장하는 태양과 동굴은 플라톤을 염두에 두고 패러디하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니체가 플라톤이 태양의 의미를 사용한 의도대로 니체가 사용했느냐, 아니면 자기식으로 비틀어서 패러디했느냐는 다른 문제라 생각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명백히 후자라고 생각하거든요.
제 생각에 <차라투스트라>에서 태양은 어떤 선의 이데아처럼 이성적으로 직관하고 관조하여 영원불멸하는 참된 지식을 주는 그런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2부 Von der unbefleckten Erkenntniss를 보면 그런 대상은 태양이 아니라 달로 나오고 있고, 그 대신 태양은 그와 정반대에서 넘쳐흐르는 생과 지혜, 그리고 그것을 나누어 주는 운동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보기에 태양을 ‘올바른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대상처럼 쓰게 될 경우 그것이 마치 서구 철학 전통에서 받아들여지던 절대불변의 진리 같은 이미지와 겹쳐, 마치 차라투스트라가 고전적 진리를 깨달은 자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 이건 별개로 또 질문드리고 싶었던 부분인데, 각주 12, 13번에 등장하는 “사회나 종교의 부조리”, “부조리하고 향락적인 사회”와 같은 표현에서 ‘부조리’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부조리’라는 단어를 보면 직관적으로 20세기 실존주의 문학이나 이른바 ‘부조리극’의 맥락이 떠오르지만, 여기서 사용하시는 부조리가 그와 같은 개념은 아닐 것이라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부조리”를 쓰신 것이라면, 그러니까 대략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 혹은 “불합리한 것” 정도로 의도하고 쓰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의미에서 이런 표현을 쓰신 것이라면, 니체가 과연 이런 식의 구도를 그대로 받아들였을지가 조금 궁금해집니다. 적어도 제가 읽은 니체는 “부조리”나 “불합리”를 비판하면서 그 대신 자신이 발견한 어떤 “조리있음”이나 “합리성”을 제시하는 철학자는 아닌 것 같아서요. 만약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서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이 깨달은 올바름을 기준으로 재단하는자로 나온다면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기존 도덕과 형이상학적 진리 체계를 해체하는 인물이 아니라, 단지 또 하나의 “더 옳은 기준”을 제시하는 새로운 도덕 교사에 그치게 될 것 같습니다. 이건 니체가 비판하던 성직자들과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겠죠. 그런데 각주 13번에 “차라투스트라가 부조리를 비판하며 올바른 것을 전하면…” 이라는 표현이 니체를 마치 그런 것처럼 읽게 되는 것 같아서 질문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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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기로 원래 책 제목이자 주인공인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도, 실제 조로아스터교의 '자라투스트라'와는 많이 다른 패러디죠 아마?

네. 달라요.

역사적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을 신으로 숭배했으나, <차라투스트라>의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을 신으로 숭배하지 않아요. 내용을 보면 마치 태양의 행위의 의미가 다른 존재에 의존한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이건 신 개념에 부합하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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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객관적 지식을 태양으로부터 전수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니체/차라투스트라가 비판한 것은 교조주의이지, 객관적 지식의 부정은 아니기 때문이죠. 그게 아니라면, 니체는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해 비판할 수 없는 모순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니체의 관점에 대해서 언급하신 것처럼 다루기는 하죠. 그게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오독으로 이어지기에, 기존 관점과 차별적이게 느껴진다면 제가 의도한 바가 잘 전달 되는 듯하네요.

2부 15장의 달의 경우,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비판하는 대상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야기하신 것과는 다릅니다. 2부 15장 구절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Als gestern der Mond aufgieng, wähnte ich, dass er eine Sonne gebären wolle:
so breit und trächtig lag er am Horizonte.
Aber ein Lügner war er mir mit seiner Schwangerschaft;
und eher noch will ich an den Mann im Monde glauben als an das Weib.

Freilich, wenig Mann ist er auch, dieser schüchterne Nachtschwärmer.
Wahrlich, mit schlechtem Gewissen wandelt er über die Dächer.

Denn er ist lüstern und eifersüchtig, der Mönch im Monde, lüstern nach der Erde und nach allen Freuden der Liebenden.

Nein, ich mag ihn nicht, diesen Kater auf den Dächern!

어제 달이 떠올랐을 때,
나는 그것이 태양을 낳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달이 지평선 위에 불룩한 배를 하고서
임신한 듯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은 임신한 것처럼 나를 속인 것이었다.
나는 이 달이 여자라기보다는 남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는 그다지 남자답지도 않다.
이 소심한 밤의 방랑자는 말이다.
정말로, 그는 질 나쁜 양심을 가진 채 지붕 위를 걷는다.

그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뿐만 아니라 질투심도 많은데,
이 달 속의 수도사는 대지와 사랑하는 자들의 모든 즐거움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제가 사용한 부조리란 표현은 인간 사회와 종교에서 나타나는 모든 종류의 부조리를 말합니다.

어떤 것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니체는 부조리함과 그릇됨에 대해서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교조주의나 인간에 대해 이성적인 존재로만 파악하려는 인류학자들을 비판하곤 하였죠.

기존 도덕과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이유는 교조주의와 우상화 때문이기에, 언급하신 것은 좀 더 생각을 해보셔야 할 것 같네요. 니체는 교조주의와 우상화를 염려하였고, 이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사고하고, 그러면서 답을 찾아가는 삶을 살아가라고 하였죠. 그리고 상황마다 답이 다르고, 경우와 조건마다 답이 다르다고 했지, 답이 없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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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선생님도 동의하시듯이 달은 차라투스트라가 비판하는 대상입니다. 저도 그렇게 쓰고 있고요. 그런데 제가 말씀드린 것은 달이 바로 ‘객관적 지식’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차라투스트라가 달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것이 ‘순결한 인식’, ‘때 묻지 않은 인식’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여기서 순결한 인식을 곧 객관적 지식으로 읽어야할 것 같습니다.

2부 15장에 제목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는 때 묻지 않은 인식unbefleckten Erkenntniss은 서양 이성주의 철학 전통이 견지하온 입장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즉, 어떠한 경험적 요소를 갖지 않고, 순수하게 이론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인식이자, 정신의 관조(Beschaulichkeit)나 직관 같은 것으로 얻어지는 순수 객관적 인식이 있으며, 그것을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말이죠. 모든 주관성을 배제하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순수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입장인건데, 선생님께서 말하시는 객관적 지식은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그 때 묻지 않는 인식을 상징하는 달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장 전체적으로 반복되어 모두 언급할 수는 없고, 한문장만 가져온다면,

„Und das heisse mir aller Dinge unbefleckte Erkenntniss, dass ich von den Dingen Nichts will: ausser dass ich vor ihnen da liegen darf wie ein Spiegel mit hundert Augen.“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거울처럼 사물들 앞에 누워”있고, “사물들로부터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때 묻지 않은 인식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울로 상징되는 바는 해석자의 어떠한 주관을 배제한 채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인식인데요, 그것은 곧 주관성이 배제된 객관적 인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거울을 객관으로 이해하는 해석을 지지하는 내용은 <선악의 저편>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듯 보입니다.

Der objektive Mensch ist in der That ein Spiegel: vor Allem, was erkannt werden will, zur Unterwerfung gewohnt, ohne eine andre Lust, als wie sie das Erkennen, das "Abspiegeln" giebt (…) Was von "Person" an ihm noch übrig ist, dünkt ihm zufällig, oft willkürlich, noch öfter störend <선악의 저편> 207

여기서도 객관적인 인간은 거울로 나타나고 있는데요. 객관적인 인간은 “반사”가 주는 즐거움만 누리려 하구요. 무엇보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인격은 방해가 되는 것으로 여기죠. 즉,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반사하는데 그치는 사유를 거울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워보입니다. 따라서 다시 차라투스트라로 돌아와서 보면, 거울처럼 사유하는 것=때 묻지 않은 인식=객관적 인식=달로 상징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어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 부분에서 선생님 주장과 배치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객관적 지식을 태양으로부터 전수”받을 수 없습니다. 객관적 지식은 달과 연관지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니체는 객관적 지식을 긍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해석자와 무관하게 독립하여 존재하는 ‘진리’, ‘정답’ 같은 것은 오히려 니체가 비판하고 있는 서구 이성주의 전통의 순수인식, 관조적 인식 따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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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보았는데, 제가 보기엔 2부 15장에서 언급된 각각의 개념들에 대한 해석이 저와 다르다고 생각이 되네요. 기존 입장들과 더 맞닿아 보이구요.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개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2부 15장을 풀어낼 때, 얼마나 <있는 그대로> 의미부여하지 않고 일관성있게 풀어내냐를 따져야 할 텐데요.

일단 제가 보기엔 BuenCamino님의 해석대로면, 해석이 어려운 구절들이 있어 보입니다.
또 BuenCamino님의 해석대로면 문맥의 흐름상 몇몇 구절들은 의미 해석을 포기한 채로 나아가야 할 것으로 보이구요.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일일이 언급하며 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전체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나의 근거는 이 발췌에 따른 것이고, 그러므로 타당하다'는 접근을 하기에 앞서서, BuenCamino님의 해석이 2부 15장 전체를 두고 보아도 타당한 것인지 확인해봐야 할 듯합니다.

최대한 모든 구절을 살피며 남겨보시면, 아마 막히는 부분이 자연스레 생기거나 해석을 억지로 맞춰야 하는 상황이 생길 것으로 보이는데요. 우선은 해석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

글쎄요. 선생님이 보시기에

라고 한다면, 제가 제시한대로 해석했을 때 문제가 생기는 부분을 제시해주시고 선생님의 해석이 제 해석 혹은, 선생님께서 ‘기존의 해석’이라 부르는 해석보다 낫다는 점을 제시해주시는게 맞아보입니다.

저는 적어도 선생님의 서론 해석에서 태양이 차라투스트라에게 객관적 지식을 주고 있다는 점에 대해 2부 15장의 근거를 들어 해석의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즉, 태양이 객관적 지식을 주었다고 해석할 경우 <차라투스트라> 이후에 나올 내용들과 정합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2부 15장을 가져와 예시로 들었던 거죠.

그렇다면 선생님은 ‘차라투스트라에게 태양이 객관적 지식을 주고 있다’는 충분한 근거를 제시해주시고, 2부 15장도 충분히 선생님의 관점에서 풀 수 있다는걸 보여주셔야 이치에 맞아보입니다. 그런데 그저 제 해석대로면 해석에 문제가 생긴다는 부분만 지적하시고, 거기에 대한 근거가 ‘제가 직접 해보면 안다’라면 그것은 충분히 올바른 대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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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2부 15장을 언급하며 이야기를 진행한 것은 BuenCamino님이시기에, 제가 2부 15장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제가 2부 15장을 잘 아는지 판단이 필요하다면, 먼저 2부 15장에 대한 전체적인 해석을 제시해주는 것이 좋을 듯하구요.
왜냐면 저는 태양의 의미를 살피기 위해서 굳이 2부 15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고, 제 해석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서 BuenCamino님이 2부 15장을 제시하셨는데, 그 근거로 제시하신 것을 보기에 '어떻게 2부 15장을 보기에 저렇게 보고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지 않은 채 제 입장과 일일이 대조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기에, 전체에 대한 흐름을 어떻게 보는지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2부 15장에 대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고자 한다면, 전체적으로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제게 알려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한 서문 1장을 두고도 충분히 태양이 올바른 이해를 전하는 존재라는 것은 파악이 되고, 그에 대해서는 이미 sophisten님의 댓글에 대한 답글을 통해 충분히 알렸지만, 제가 왜 서문 1장에서 그렇게 보는지를 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서문 1장을 두고서만 이야기를 논해도 되는 사항을, 굳이 2부 15장과 관련 지은 것은 제가 아니라 BuenCamino님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해보시기 바라며, BuenCamino님의 관점을 더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전체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보는지를 알려주시는 것이 원활한 대화를 함에 있어서 더 적절해 보입니다.

또한 객관적 지식에 대해서도 이미 본문에 올린 이미지의 주석에 다 담겨 있으므로, 제대로 글을 보신 후에 이야기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

@BuenCamino 선생님의

댓글에 더해, 글쓴이 분께서 입증하셔야 하는 사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무엇보다 "객관적" 지식에서 말씀하시는 '객관성'이 (1)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맥락에서의 객관성인지 (2) 퍼트넘류의 내재적 실재론의 맥락에서의 객관성인지 밝히셔야 합니다. 이것이 글쓴이분께서 밝혀야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고선 철학적 논의가 불가능합니다.

만일, 주장대로 니체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면 첫 번째의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둘쨰로 밝혀야 하는 것은 니체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그대로 가져와서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맥락에서의 참된 앎이 존재한다는 점을 니체가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문헌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답변은 너무나 모호합니다. 말씀하신 것은 "태양이 풍요로움을 차라투스트라에게 줬다" 정도 뿐입니다.

나아가 셋째, 니체는 (1)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대응론을 받아들이면서 (2) 그러한 객관적 지식을 인간이 얻을 수 있다고 봤다라고 주장하신다면, 이에 대한 입증도 필요합니다. 적어도 학계의 표준적인 견해에서는 니체의 어느 시기에도 양자를 동시에 받아들인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표준적 견해(대표적으로 Clark 1991)에 따르면, 초기 니체는 형이상학적 실재론 및 대응론을 받아들이지만, 그러한 객관적 지식을 인간이 얻을 수 있다고 보지 않았고, 후기 니체는 형이상학적 실재론 및 대응론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표준적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앞서 말씀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동의하지 않는 이유와 자신의 입장이 맞는 이유를 문헌에 입각해서 그리고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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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정리해 보면,

1 - 태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올바른 이해를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2 - 올바른 이해를 전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객관적 지식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3 - 객관적 지식이란 것이 가능한가? 객관적 지식을 니체가 받아들인 게 맞나?

이 순으로 가고 있고, 객관적 지식을 니체는 부정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니체는 객관적 지식을 부정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하며, '니체는 맹목적인 교조주의와 우상화를 비판했다(이는 곧 맹목적으로 교조화되고 절대화되는 것들 속에서 올바른 것을 찾으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교조주의와 우상화가 '진리'로서 니체에게 부정당한 이유는 그릇된 것임에도 사회와 학계 속에서 '객관적인 진리'처럼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죠.^^)'고 이야기를 하였음에도, 이에 대해서 반영이 이뤄지지 않은 채,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따른 객관적 지식을 받아들였다는 표준적 견해는 없다'라고 한다면.

제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그렇다면 여러분의 해석대로 보면 이해가 되는가? 막히는 구절이 생기지 않는가?' 입니다.

여러분이 제가 전하는 해명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내 말이 맞는 이유는 이거야. 여기도 이러고 저기도 이래.'라고만 하고 있는데, 이를 본 저는 '그 말로 보면 2부 15장의 해석이 어떻게 된다고 보기에 그러는 것이지? 해석이 안 될텐데?'라고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고, 이에 따라 전체 해석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

기존 관점에 입각한 입장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히 기존 관점과 유사한 입장을 가지신 것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명확한 것은 여러분의 관점이 맞다면, 여러분의 관점에 따라서 해당 장들이 해석이 되고, 차라투스트라가 이해되면 되는 것이겠지만, 기존 관점에 따라 책을 보던 많은 이들은 이미 차라투스트라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고 있고, 그에 따라 이해한 사람들에게 해석을 요구하고 이해한 사람들이 나름의 책이나 논문을 써서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해에 있어서 일관되며 유의미한 결론에 이르는 해석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를 두고 보여지는 기존 관점의 가장 큰 문제점이죠. ^^

그러니 제가 해명한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에 따라서 내용을 보려고 하지 않은 채 '내가 본 근거는 이거고, 그래서 너의 말은 이상해'라고 하겠다면, '내가 본 근거에 따라서 이 장을 보면 이렇게 되니까 내 말이 맞아'를 명확히 입증해주시면 될 겁니다.

오류에 기반한 비판은 공허한 비판이 될 수 있으니까, 서로 자신의 근거에 오류가 있는지를 살피는 것도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

여러분은 '내 말엔 근거가 있으니 오류가 아냐'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릇된 근거에 기반하면 오류가 되기도 하니 근거를 댄다고 해서 오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죠. 여러분의 말이 타당하다면, 전체를 해석함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고, 전체를 해설함에도 오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여러분의 말의 신빙성을 위해서라도 전체를 해석해내심이 좋을 듯합니다. ^^

저는 왜 선생님께서 지셔야하는 입증책임을 지시지는 않고 그걸 저에게만 요구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해석을 가져오신 것은 선생님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선생님의 해석대로라면 <차라투스트라>를 일관적으로 읽는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2부 15장을 들어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선생님의 대답은, 선생님의 새로운 해석에 대한 변호대신, 제 관점(+기존의 관점)대로는 잘읽히는지 여부를 묻고 계십니다. 논의가 이렇게 흘러가게 된다면 설령 제 관점이 틀리다는 것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여전히 선생님의 새로운 해석이 올바르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결국 선생님이 대답하셔야 하는 것은 ‘니체가 객관적으로 참인 지식의 존재를 긍정했는가’에 대한 물음과 거기에 파생되는 <차라투스트라> 여러 구절의 해석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입니다.

물론 선생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 바 있지만, 이것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추가적인 설명을 계속 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교조주의를 비판하는 이유가 그들이 형이상학적 실재론이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고 있어서라고 본다면, 교조주의를 비판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객관적 지식을 지지했다고 보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예시이고 이외에도 선생님이 주장하시는 것이 정당하게 제시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철학적/문헌적 논의와 뒷받침이 필요해보입니다. 아마 sophisten님도 문헌이나 구체적으로 입증하시기를 요청하시는 것은, 선생님께서 하시는 주장이 충분히 뒷받침되고 있지 못하다고 느껴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렇게 말씀하시는 부분처럼요. 기존의 관점이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해석이 일관적이지 못한 부분을 찾아서 정당하게 비판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면 되는 것인데, 기존의 관점이 문제라고 하시면서 든 근거는 ‘많은 이들은 이미 차라투스트라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고 있음’, ‘일관되며 유의미한 결론에 이르는 해석이 없음’ 입니다. 이것은 근거가 아니라 주장이죠. 일관되며 유의미한 결론에 이르는 해석이 없다고 한다면, 그 약점을 찾아 비판하는 것이 학술적인 태도이지, 기존이 잘못되었으니 기존을 비판하는 내 해석을 맞다는 식으로 주장하시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논의가 더 생산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것 같으니, 저는 이정도로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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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입증을 책임져야 한다면, 책임질 영역은 '니체는 교조주의와 우상화를 비판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고, '니체는 객관적 지식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선 니체가 교조주의와 우상화를 비판했는지를 살피면, 이미 언급했던 것과 같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인간적인'이나 '2부 16장의 학자에 대하여'를 보게 되면, 이미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죠.

니체가 객관적 지식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증명과 관련해서는, 이는 제가 입증할 수가 없는데요. 왜냐면 객관적 지식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객관적 지식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객관적 지식을 긍정한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예시로 삼을 수 있는 것이나, 이를 표현하는 상징적 표현들은 많습니다.
예컨대, 신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입장은 개인의 망상이거나 사유에 따른 결과일 뿐, 신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며 신을 비판하고 부정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을 두고 이성적 존재로 보는 인류학자를 비판하는 것 역시 니체가 '인간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며 살펴야지, 인간을 두고 마냥 이성적인 존재인 것처럼 보아선 안 된다'고 표현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입증은 이미 제가 댓글을 통해 앞서 했던 것으로 생각이 되네요. ^^
그렇다면 저로서는 이미 입증을 할 부분을 다 한 상황인데,

2부 15장을 언급하시면서, 달은 객관적 지식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제가 말한 것과 다른 전개를 펼치면서 BuenCamino님의 말의 근거로 삼으셨죠.
그렇다보니 저는 2부 15장을 어떻게 보는지 살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BuenCamino님이 어떻게 2부 15장을 보고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고, 그냥 발췌를 통해서만 '내 말에 근거가 확실하다'고 하고 있으니, '과연 저말이 맞다고 보면서 2부 15장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BuenCamino님의 주장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있고, 그것이 오류에 근거했는지 아닌지를 알 수도 있겠죠.

저는 이미 기존 관점에서의 문제점을 이미 밝혀두었습니다.
"태양은 올바른 이해고, 그것은 객관적 지식을 말하며, 니체는 객관적 지식을 부정한 바가 없다. 니체는 교조주의와 우상화를 부정했다"라고 말이죠.

그리고 제 해석이 올바른지를 살피고자 한다면, 제 주장에 대한 반박을 하셔야 합니다.

제 주장은 "태양은 올바른 이해고, 그것은 객관적 지식을 말하며, 니체는 객관적 지식을 부정한 바가 없다. 니체는 교조주의와 우상화를 부정했다"입니다.
이 주장에서 객관적 지식과 교조주의/우상화를 동일하게 보고 계시는게 BuenCamino님과 sophisten님이며, 저는 이 둘이 다르다고 하고 있는데요.

이 둘이 같다는 것에 대해서 증명을 하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니체의 사회 비판은 무엇을 목적하는 것인지도 살펴야 할 것이구요.

과연 어디서부터 이 대화에서 꼬임이 발생하였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 말이 맞다. 여기에 이렇게 나오지 않느냐'만 말해선 끝이 나지 않습니다. 말이 맞다면, 맞음에 따라 결론이 어떻게 나오는지도 내놔야 하죠.
철학이 뜬구름 잡는 소리로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이처럼 내 말의 근거만 말하고는 그것의 결과물을 살피지 않는 행태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님이 하시는 이야기가 맞다면, 님의 해석에 따른 결론을 지어주시면 좋을 듯하고, 제 의견을 듣고자 하신다면, 제가 말한 "태양은 올바른 이해고, 그것은 객관적 지식을 말하며, 니체는 객관적 지식을 부정한 바가 없다. 니체는 교조주의와 우상화를 부정했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니체가 '교조주의와 우상화를 부정하며 이 세상에 올바른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인지를 증명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러나 이는 이미 멀리서 찾지 않더라도 '차라투스트라'의 내용 속에서 여럿 등장하죠.. 힘에의 의지를 두고도 생물의 본성에 대한 올바른 것이라고 한다거나 말입니다.^^)

생산적이지 않다고 하시며 이야기를 하지 않으신다고 하시면, 그것은 비판을 할 뿐, 비판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는 좋지 못한 태도로 보이구요.

약점을 찾아 비판하는 것은 학술적 태도이지만, 약점을 찾아 비판하는데, 그래서 그 비판에 따랐을 때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입증하지 않는 것도 학술적 태도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저는 이미 '니체가 비판한 것은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교조주의와 우상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객관적 지식'이라는 개념을 좀 더 명료하게 분리해서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
앞서 언급하신 2부 15장 달을 이야기하며 언급한 '객관적 지식'이 니체/차라투스트라에게 왜 비판의 대상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시구요.
그러면 아마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을 듯합니다.

여러 가지 조건을 살펴서 '이 칸에 들어갈 퍼즐 조각이 이거다'라고 말하고는 퍼즐을 완성해서 그것을 증명하지 않는다면, 그저 칸의 형태와 비슷한 형태를 지닌 조각이었을 뿐, 실제론 그 자리에 넣을 것이 아니라면, 오류 아니겠습니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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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 말고 그냥 이 부분만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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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대로 두면 제가 보기에 이야기가 ‘순환논증’이나 ‘선결문제 제시 오류’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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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체가 비판을 하지 않았다는 것(P)" 은 제가 증명할 수 없습니다.
2.)왜냐하면 "니체가 비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P)" , 그걸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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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제가 보기에 계속 주장되고 있는 이야기 구조가 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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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P를 증명할 수 없다
2.) 이유: P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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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마치, 1.) "저 사람은 결백하다는 걸 제가 증명할 수는 없어요. 2.) 왜냐하면 저 사람은 결백하거든요." 이런 것과 같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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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논의가 계속 이런 방식으로 이어지게 되어서 논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미 "비판하지 않았다"를 사실을 전제하고, 다시 그 사실(비판하지 않았다)을 근거로 제시하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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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처럼, '니체가 그런 것들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전제가 사실이라면, 이제 다른 분들의 해석에 대한 언급보다는 boni님께서 제기하신 주장에 대해 이를 뒷받침하는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해주시면 토의를 해나가고 의견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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