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희망의 정신> - 리뷰

주로 한병철의, 아직 국역 출간되지 않은 <희망의 정신>을 참조해서 한, (진정한 의미의) 희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아주 설득력 있는 글이다. 그렇지만 좌파적 사회비판 이론 전통에 친숙한 이들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줄 만한 글은 아니다. 한병철은 독자적 일가견을 내놓기보다는 최근까지의 그 전통의 관점들/테제들을 잘 소화하고 잘 적용하고 잘 구체화해서 학업이 직업이 아닌 이들도 재미를 느끼면서 읽을 만한, '적당히' 어려운 동시대 사회비평서들을 양산하고 있다. 일, 이십년 내에 그 보다 한 단계 더 올라간 한국계 사회철학자가 나오게 될지 조금은 궁금하다. 쉽지 않을 것 같다. '(동시대) 사회비판'이라는 주제에 관한 한, 어느 나라에서도 이제는 더는 새로운 얘기가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상황이 암울해 보일 수 있지만 (마리 스나이더)

2025년 3월 26일

한병철의 <희망의 정신>은 조심스럽게 다루고 싶고 감히 페이지 모서리를 접지 않을 아름다운 책이다. 안셀름 키퍼의 삽화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아이디어들 사이에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해하는 데 몇 주가 걸렸던 <피로 사회>보다 더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지만, 못지않게 심오하다.

<희망의 정신>
https://www.wiley.com/en-us/The+Spirit+of+Hope-p-9781509565191

<피로 사회>

희망의 혁명적 정치

우리는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안전한 환상을 좋아하지만, 그렇게 해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우리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병철은 “문제 해결과 위기 관리 속에서 삶은 시들어간다. 그것은 생존이 된다. ... 의미 있는 지평을 여는 것은 희망이다” (2)라고 쓴다.

한병철은 희망의 부재가 어떻게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궤도를 더욱 심화시키는지 설명한다:

“두려움과 분노가 사람들을 우익 포퓰리스트의 품으로 이끌고 있다. 그것들은 증오를 낳는다. 연대, 친근함, 공감은 약화된다. ... 민주주의는 화해와 대화의 분위기 속에서만 번성한다. ... 희망은 의미와 방향을 제공한다. 반대로 두려움은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 희망은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내레이션을 한다. 반면에 두려움은 말을 할 수 없고, 내레이션을 할 수 없다” (2-3).

기후 운동가 로저 할람은 최근 인류가 금세기에 멸종할 가능성이 높다고 썼지만, 그는 정치적 포획에 대한 대중적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길을 계속 써나가는 바로 그 행동으로 희망을 보여줬다. 우리가 가능성을 보는 것에 더는 열려 있지 않을 때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지만, 그것은 [시스템의] 버그가 아니라 시스템의 특징인 것처럼 보인다.

로저 할람

“현재 만연한 공포는 사실 현재 진행 중인 재앙의 결과가 아니다. ... 신자유주의 체제는 공포의 체제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기업가로 만들어 고립시킨다. ... 우리 자신과의 관계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남들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 두려움이 점점 더 지배하고 있다. 두려움의 만연은 생산성에 좋지 않다. ... 자유롭다는 것은 강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자유는 강박을 낳는다. 이러한 형태의 강박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비롯된다. 성과에 대한 강박과 자신을 최적화하려는 강박은 자유의 강박이다. 자유와 강박은 하나가 된다. ... 우리는 자신을 실현하고 있다는 착각을 품으면서 자신을 최적화하고, 자신을 혹독하게 착취한다. 이러한 내면의 강박은 두려움을 심화시키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자기 창조는 생산성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자기 착취의 한 형태이다” (9-10).

이것은 일상적인 집안일과 업무를 의식하지 못한 채 해치우는 습관을 만들어 생활을 자동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권장되는 수많은 생활 요령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요령들을 익히면 몽유하듯이 모든 것을 더 잘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인데, <세버런스>의 심리학 버전의 권장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가 자신을 최적화하는 한,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물체들일 뿐이며,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을 더욱 방해한다. 소셜 미디어는 또한 역설적으로 사회적 응집력을 약화시키는데, “희망은 우리를 고립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단결시키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두려움에 대한 반대 형상, 심지어 반대 기분이다” (10-11).

<세버런스>

한병철은 희망을 “인류의 모든 병에 대한 해독제”라고 부른다. “치료제로서 희망은 여전히 숨겨져 있다. 희망은 세상의 모든 병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체념하지 않도록 해준다. ... 소비자는 희망이 없다. 그들이 가진 것은 소망이나 욕구뿐이다. ... 희망하는 이들은 소비하지 않는다” (18). 한병철은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공포의 체제에 맞서 희망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희망의 정치학이다. ... 희망한다는 것은 ‘희망을 퍼뜨리다’, ‘횃불을 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 희망은 혁명의 촉매제이자 새로운 것의 촉매제이다. ... 공포를 통한 혁명은 없다. 희망은 우리를 우울증에서, 지친 미래에서 해방시켜주는 봄(春), 열정이다” (14-15).

우리에게는 공동체와 인류애가 필요하다. 한병철은 지식은 교반(攪拌)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공지능은 우리가 직면한 난제를 곰곰히 생각해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55-7). 우리는 다가오는 것에 열려 있기 위해 기존의 것과 근본적으로 단절해야 한다.

“여러분, 사랑은 분노보다 낫습니다. 희망은 두려움보다 낫습니다. 낙관주의는 절망보다 낫습니다. 그러니 사랑하고, 희망차고, 낙관적으로 행동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잭 레이튼 (1950-2011)

힘내세요! – 낙관주의의 문제점

나는 보통은 희망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는데, 희망에 대한 한병철의 설명은 문제인 것은 희망하기(하나의 존재상태)가 아니라 낙관주의의 기만, 또는 무언가에 대한 희망(더 정확하게는 소망)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한병철은 대상이나 사건과 관련된 소망인 소극적 희망과 사람들을 창조적 행동으로 이끄는 능동적 희망을 구분한다:

“희망은 행동을 이끄는 내러티브를 전개시킨다. ... 그것은 능동적으로 꿈을 꾼다. 소망은 반드시 결핍감을 수반하는 반면, 희망은 그 자체로 충만함과 광채를 지니고 있다. 강한 희망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 희망은 힘이자 가속도이다. 대조적으로, 소망은 결코 힘차지 않다” (23).

무언가를 소망할 때, 낙관적일 때, 우리는 기대하고 설레지만, 그것에는 적어도 우리의 노력이 열매를 맺지 못 할지도 모른다는 체념의 기미가 섞여 있어 부족감과 우리가 때때로 희망이라고 부르는 내면의 간청이 생긴다. 능동적 희망은 어떤 방향을 취할지 경청하기 때문에 특정한 좁은 지점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열려 있다.

한병철은 “희망은 주로 환상을 만들어 사람들을 현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며 희망을 “치명적인 회피” (17)라고 부른 초기 카뮈의 희망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지적한다. 이러한 유형의 긍정성은 시간관이 폐쇄적이어서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망상적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과 대조적으로, 능동적인 희망은 우리의 현실과 우리가 견디고 있는 난센스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낙관주의에는 부정성이 없다. ... 절대적인 희망은 사물에 ...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확실한 발판을 마련해 주는 의미가 있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포함한다 ... 희망에는 깨어짐이 내재되어 있다. 부러짐의 부정성은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 희망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절대적인 재앙조차도 견뎌낸다” (39).

한병철은 예정된 미래와 알 수 없는 l’avenir를 비교하여 그 차이를 분명히 한다. 우리는 예측하고 계획할 수 있는 미래에 의지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고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l’avenir는 예측할 수 없고 변혁적인 미래, 예측할 수 없고 계산할 수 없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가능성의 가용한 공간을 열어준다. 그것은 타자의 예측할 수 없는 도래를 알린다” (7).

한병철은 바츨라프 하벨의 희망에 대한 이해를 언급한다:

바츨라프 하벨

“희망은 영혼의 차원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세상에 대한 어떤 특정한 관찰이나 상황에 대한 예측에 의존하지 않는다. 희망은 예후가 아니다. 그것은 영혼의 정향이다. ... 무언가가 좋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능력이다. ... 무언가가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라, 무언가가 의미가 있다는, 어찌 되든 의미가 있다는 확신이다.” (47)

한병철은 결과와 기대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희망은 ‘마음의 상태’로서 사물의 내재적 과정과 무관하기 때문에 실망할 수 없다. ... 희망의 실체는 실제 결과에 대한 우려와는 무관하게 무언가가 의미 있는 것이라는 깊은 확신이다. 희망은 사건들의 세계 내적 경로를 넘어 초월적인 것에 위치해 있다. 하나의 믿음으로서, 그것은 절대 절망 한가운데서도 행동할 수 있게 한다.” (51).

이것은 1952년에 라인홀드 니버가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생애에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므로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진실하거나 아름답거나 선한 것은 역사의 어떤 즉각적인 맥락에서도 완전한 의미를 갖지 못하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아무리 고결한 것이라도 혼자서는 이룰 수 없으므로 우리는 사랑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라인홀드 니버

영화 <플레전트빌>의 엔딩 장면: “이제 어떻게 될까요?” “모르겠어.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요?” “아니, 몰라.”

허리를 굽혀 귀를 기울이는 희망

한병철이 곳곳에 사용하는 이미저리는 이 관점을 예시하는 데 도움이 된다. 희망이 수동적인 부정이라는 나의 이전의 견해와 대조적으로, 한병철은 희망이 독일어 ‘hoffen’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잘 듣고, 귀를 기울이고, 냄새를 맡기 위해 가만히 서 있다. ... 희망하는 사람은 ... 올바른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주의를 기울여 잘 듣는다. 희망의 수용성은 그것을 부드럽게 만들고, 그것에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부여한다. ... 희망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열린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탐색의 움직임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을 향해 나아간다. 새로운 것, 완전히 다른 것, 전례 없는 것을 향해 출발한다. ... 그것은 깨운다. 종종, 그것은 요청되고 호소되어야 하며... 헌신으로 특징지어져야 한다.” (4-5).

희망은 우리를 험한 지형으로 인도하고 “길을 보여준다” (47). 희망은 길이나 방향, 목적지는 알지 못 하지만 길을 받아들인다. “절대 절망 한 가운데서도 희망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새로운 것에 민감해진다. ... 희망적인 사람은 계산할 수 없는 것을, 모든 공산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기대한다.” (68-9).

카뮈는 나중에 희망에 대해 다르게 썼다. 한병철은 카뮈가 노벨상 수상 후 쓴 연설문의 일부(한병철의 글에서 약간 확장)를 소개한다:

카뮈

“위대한 관념들은 비둘기처럼 부드럽게 세상에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면 제국들과 국가들의 소란 한 가운데서 날개들의 희미한 펄럭임, 삶과 희망의 부드러운 꿈틀거림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희망이 한 국가에 있다고 말할 것이고 다른 이들은 한 인간에게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그보다는 그것이 매일매일 한계들과 역사의 가장 조야한 함축들을 부정하는 수백만 명의 고독한 개인에 의해 깨어나고, 되살아나고, 영양을 공급받는다고 믿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과 기쁨의 토대 위에서 모두를 위해 건설하는 모든 위협적인 진리가 순간적으로 빛을 발합니다.”

한병철의 견해로는 희망은 “새로운 것의 산파 ... 내적인 준비, 강렬하지만 아직 다 쓰지 않은 활동성” (26)이다. 그는 “절대적 희망은 절대적 절망의 부정성에 맞서서 생겨난다. 그것은 심연 가까이에서 싹을 틔운다”고 쓴다. 니체는 임신 중에 필요한 수용적 태도를 암시하면서 새로움을 산출하기 위한 상반되는 것들의 연결을 언급한다:

“우리는 그것의 가치나 그것이 올 시기를 결정할 권리가 없다.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영향력은 그것을 안전하게 지키는 데 있다. ‘여기서 자라고 있는 것은 우리보다 더 위대한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가장 은밀한 희망이다.” (552).

552

한병철은 헤겔의 희망 이미저리도 인용한다:

“그것은 어둠을 뚫고 자신 있게 끝없이 터널을 파는 역사의 용감한 두더지와 닮은 듯하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사 강의>에서 정신을 7리그 부츠를 신은 그러한 두더지에 비유한다: ‘종종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정신은 (햄릿이 자신의 아버지의 유령에 대해, ‘잘 말했다, 늙은 두더지! 땅을 그렇게 빨리 파?’라고 말한 것처럼) 힘을 모아, 그것을 자신의 태양, 자신의 개념으로부터 분리시킨 지표를 조각내어 지면이 무너질 때까지 내부적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 그리고 [그 때] 정신은 새로운 젊음의 모습을 하고 7리그 부츠를 신는다’” (547).

7리그 부츠
유럽 민속의 한 요소이다. 이 부츠를 신은 사람은 한 걸음당 7리그 (약 34km)를 걸을 수 있다. 이 부츠는 종종 마법 캐릭터가 주인공에게 중요한 임무를 완수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선물한다.

한병철은 7리그 부츠를 신으면 한 걸음에 큰 도약을 할 수 있다는 동화나 심연의 생명체처럼 “희망의 정신 또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어둠 한 가운데서도 계속 해나간다. 어둠 없이는 빛도 없다” (8-9)라고 쓴다.

[7리그 부츠 삽화]

동화
https://victorianweb.org/art/illustration/cruikshank/fairy3.html

그것은 기분이다

마리아메 카바는 우리가 함양하는 기율로서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리아메 카바

“희망은 ‘느낌이 어떤가’보다는 여전히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내딛겠다는,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겠다는 결심을 매일 하는 실천에 더 가깝다. 그리고 당신은 여전히 고군분투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 실천에서 얻은 것이었다. 희망을 갖는 것이 일이다.”

하지만 한병철은 그것을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기분이라고 설명한다.

“성취와 만족은 희망과는 거리가 멀다. 희망은 어떤 대상이나 세계 내적인 사건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것은 기분이다. ... 하나의 근본적인 기분으로서, 희망은 언어 이전의 것이다. 그것은 언어를 조율한다. 희망은 우리가 습득하거나 의식적으로 산출하는 미덕이 될 수 없다. 그것에는 의지의 내재성을 뛰어넘는 초월성이 고유하게 있다. ... 기분은 습관과 절대적으로 다르다. ... 우리는 단순히 기분이 든다. 우리는 기분에 빠진다” (24). “우리가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이기 전에 우리는 이미 하나의 기분 속에 있다. 기분은 대상들을 색칠하는 하나의 주관적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반성적 수준에서 세상을 드러낸다” (72).

하지만 우리가 의식적으로 희망의 기분을 유발할 수 없다면 어떻게 기분을 함양하거나 촉진할 수 있을까? 나는 음악이나 시, 영화를 통해 절망에서 고양된 기분으로 내 기분을 바꿀 수 있는 것 같다. 예술이 희망을 되살릴 수 있을까?

한병철은 희망을 진리의 매체로 제시하기 위해 아도르노로부터 한 구절을 인용한다: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의 61번 에세이와 143번 에세이

“진리란 언젠가 있었다가 회고적으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허위적인 것으로부터, 나쁘게 현존하는 것으로부터 비틀어 떼어내 얻어야 하는 것이다. ... ‘희망 없이는, 진리 이념은 거의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며, 나쁘다고 인식된 현존재를 단지 그것이 인식되었다는 이유로 진리로 고지하는 것은 근본적인 비진리이다. ... 예술은 진리라는 거짓으로부터 해방된 마술이다.’ ... 희망 자체에는 마술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논리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희망은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믿음에 의해 운반된다.” (62-3).

그는 희망이라는 토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불안이라는 토대와 대조한다. 하이데거는 불안이 인간들이 개별화되는 데 필요하다고 여겼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들을 고립시킨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진정한 고독 속에서는 대중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불안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반면 비진정한 고독 속에서 타자를 전유하거나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려고 한다고 생각하지만, 한병철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애정어린 고독이라는 개념을 간과하고 있다.

“공동체는 고립된 인간들이 나란히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 희망은 자아에 그 중심이 있지 않다. 오히려, 희망하는 인간들은 타인들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희망 속에서, 우리는 자아를 넘어서는 것을 신뢰한다. 그러므로 희망은 믿음에 가깝다. ... 그래서 하벨은 희망은 초월적인 것, 즉 저 멀리서 온다고 믿는다” (78-9).

“불안은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이데거의 생각은 탄생이 아니라 죽음에 의해 조율된다. 이 죽음에 초점 맞추기는 하이데거의 생각을 아직 있지 않은 것에, 탄생하지 않은 것에 눈 멀게 한다. 희망에 초점을 맞추는 생각은 죽음이 아니라 탄생을, 즉 ‘세계 내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도래하는 것’을 지향점으로 삼는다. 희망은 죽음을 넘어서 희망한다” (86).

그러니까, 희망은 고립을 줄이고 우리를 진리로, 어쩌면 혁명으로 이끌 수 있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분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이런 기분 속에 들어갈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다.

인생은 페이지 넘기기이다!

어쩌면 나는 이미 그 길에 들어섰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자신이 기후 변화, 분쟁, 질병, 오늘날 세계의 끔찍한 상태에 몰입하고 있으면서도 내 근본적인 기분이 그 뉴스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대체로 꽤 행복하고 노래를 잘 부르며 웃음이 많은 편이다. 내가 희망이라고 부르는 것을 피했던 것, 언제나 실험적인 성향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인데 그 둘은 같은 것일까? 나는 세상을 질문하고 궁금해하며 다양한 가설을 시험하는 곳으로 보고 자랐다. 실패한 실험이라도 무엇이 안 되는지 보여줌으로써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야망보다는 호기심에 이끌린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면 매개변수를 다시 설정해 다시 시도하면 된다. 실험적인 태도는 항상 현실에 기반을 두면서도 무엇이 될지 모르는 것에 열려 있다. 다음에는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다. 모험이다!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적어도 시작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가 하나의 기분으로서의 희망을 선택할 수 없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 사로잡혀 있다. 희망이 우리가 빠지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을 불러 일으켜 우리를 휩쓸도록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의 희망이 타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태도상의 변화로만 파악하려는 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라면 아마 그럴 것이다[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희망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 역자]. 모든 것이 망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희망은 끝나는 방식이 아니라 시작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희망을 기율 또는 마음가짐으로 보는 카바의 희망 정의로 돌아간다.

희망에 대한 나의 희망은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하루의 모든 사소한 결정에서 합당한 일을 하는 것, 즉 실천 속에 희망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프랭클의 조언처럼, “우리의 답은... 올바른 행동에 있다.” 물의 전사 모드 발로우는 더 많은 의도를 가능하게 하는 정의를 제공한다: 희망이란 “미래 세대와 지구를 위해 좋은 모든 것을 보호하겠다는 결의,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어쨌든 손을 내밀어 할 수 있을 때 우주를 만지고,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 즉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모드 발로우

예전에는 기후 변화로 인해 우리 종이 멸종할까 봐 가장 걱정했지만, 이제는 그보다 훨씬 전에 우리가 자신의 사형 집행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되지 않을 가능성도 항상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올바르게 살면서 우리가 내일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생기게 할지 주의를 기울여 보고 듣고 있다.

노암 촘스키: 희망이 없다고 가정하면 희망이 없다는 것이 보장될 것이다. 자유에 대한 본능이 있다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가정하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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